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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여기는 제 아내 젤나르입니다.”

살라딘이 왕세자비와 왕세손을 소개했다.

‘젤나르 왕세자비. 칼리프 왕국 안에서도 소수민족 중의 소수민족 출신.’

시나리오에 따르면, 살라딘과 젤나르의 러브스토리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로 한편의 멜로영화 같았다.

하지만 그게 화근이었다.

압둘 2세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찌어찌 결혼에 성공하긴 했지만, 그 덕분에 미운털이 박히게 되었으니까.

게다가 젤나르는 힘 있는 가문이 아닌 가난한 소수민족 출신.

때문에 살라딘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약해서, 누구도 지지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당장 절대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압둘 2세로부터 미운털이 박혔는데, 누가 감히 살라딘을 지지하겠는가?

“은인을 뵙습니다.”

젤나르가 오토를 향해 인사했다.

“그리고 여기는 제 아들 마수드입니다.”

“은인을 뵙습니다.”

살라딘의 아들 마수드가 오토에게 꾸벅 인사했다.

‘올해로 아홉 살. 아직은 애지.’

아버지 살라딘을 닮아 벌써부터 미소년의 티가 나는 마수드는, 비록 어리지만 딱 봐도 의젓해 보였다.

‘압둘 2세한테 사랑도 듬뿍 받고 있고.’

미운털이 제대로 박힌 왕세자 부부에 비해, 마수드는 압둘 2세의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었다.

워낙에 총명하고, 심성이 곱고, 의젓한 성격을 타고났기에 할아버지인 압둘 2세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만방자하거나 무례한 기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왕가의 아들로서 아바마마를 구해 주시고, 우리 칼리프인들을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수드가 오토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놈 봐라?’

오토는 마수드의 말과 행동에서, 타고난 군주의 자질이 비치는 듯해 솔직히 좀 놀랐다.

고작 아홉 살밖에 되지 않는 꼬맹이 주제에!

‘그럴 만해.’

오토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마수드를 인정했다.

오토는 마수드에 대해 아는 게 많았다.

살라딘의 아들이자 현 왕세손인 마수드는 훗날…….

“저와 왕세자비는 연회에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마수드에 대해 생각하는데, 살라딘이 입을 열었다.

“함께 자리하지 못해 그저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예?”

덕분에 오토는 마수드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신다고요?”

“예.”

살라딘이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아바마마께서 저와 왕세자비는 연회에 참석하는 걸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아.”

“다만 아바마마께서 손주인 제 아들은 어여삐 여기시어, 연회에 참석하는 걸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니 은인께서는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이해하고 말고 할 게 있겠습니까.”

“부디 따로 시간을 내어주신다면, 제가 은인께 보답하겠습니다.”

“얼마든지 시간 내야죠. 아무렴요. 내일 차 한잔 같이하시죠.”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럼요.”

“그럼, 제가 내일 시종을 보내겠습니다. 아, 카미유 경도 함께 참석해주십시오. 저를 구한 장본인은 카미유 경이시니, 저로서는 보은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살라딘이 카미유를 돌아보았다.

“예, 찾아뵙겠습니다.”

카미유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려던 순간.

오싹!

순간 카미유는 오토가 눈에 쌍심지를 켠 것을 보고 그만 식겁했다.

‘어쭈? 이젠 내 앞에서 대놓고 놀아나?’

‘…그런 거 아닙니다.’

‘머리채 다 쥐어 뜯어놓을 줄 알아.’

눈빛을 이용한 살벌한 대화가 오갔지만, 살라딘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들아.”

“예, 아바마마.”

“여기 오토 드 스쿠데리아 국왕 전하와 카미유 경은 매우 훌륭한 분들이시다. 그러니 너는 우리 칼리프 왕국의 왕세손으로서 마땅히 본받고, 공경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살라딘이 아들 마수드에게 미소를 지으며 당부했다.

“예, 아바마마.”

마수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오토와 카미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살라딘·젤나르 부부가 떠나고.

“지금부터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근위기사들과 시종·시녀들이 나타나 오토 일행과 마수드를 안내했다.

“…이거 안 좋은데.”

멀어지는 살라딘·젤나르 부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오토의 표정은 매우 심각했다.

* * *

연회장은 이보다 더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울 수 없을 정도로,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둥 하나부터 바닥 재질, 천장의 장식, 조명 기타 등등등….

이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고급 자재들로만 만들어져 있어서, 연회장을 짓는 데 도대체 얼마가 들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세계 각국에서 천문학적인 금액을 주고 데려온 요리사들이 이 세상의 모든 산해진미들을 내놓았고, 그 산해진미들이 억! 소리 나는 가격의 식기에 담겼다.

술탄인 압둘 2세가 국빈인 오토 일행을 접대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이니만큼, 특별히 술도 허락되었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술 역시 어마어마한 고가의 명주[名酒]들이 종류별로 제공되었다.

“모두 들어라.”

압둘 2세가 그야말로 서릿발 같은, 위엄 넘치는 목소리로 연회장을 호령했다.

“오늘 이 자리는 우리 칼리프 왕국의 국빈이자 형제의 나라이며, 또한 과인의 동생을 접대하는 자이다. 그러니 모두들 기뿐 마음으로 즐겁게 먹고 마시길 바란다. 알겠는가.”

“예! 술탄이시여!”

과연 절대 권력의 소유자답게, 압둘 2세는 연회장에서도 대소신료들을 아주 제대로 휘어잡는 모습을 보였다.

아르곤 대제의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들을 살 때는 그저 돈 많은 졸부 같았는데, 대소신료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는 그런 모습을 눈을 씻고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우리 전하께 바가지를 썼던 사람이 맞나?’

이게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180도 다른 모습이라, 카미유는 꽤나 당황했다.

반대로, 오토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느긋하게 연회를 즐겼다.

“우리 동생은 이 형이 마왕을 무찌르면 뭐가 되는 줄 아나?”

“형이 마왕을 무찌르면?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바로 ‘형용사’라네.”

“꺄르륵!”

오토가 배를 잡고 웃었다.

“하하하! 형용사라니! 하하! 너무 웃긴 거 아닙니까? 하하하!”

“그런가? 껄껄껄!”

“더 없습니까? 더 듣고 싶습니다! 하하하!”

“그래? 정 그렇다면 과인의 농담을 더 들려주지 않을 수가 없지! 껄껄껄!”

카미유는 압둘 2세의 말 같지도 않는 말장난에 배를 잡고 웃어 대는 오토를 바라보며, 안쓰럽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나름 애쓰고 계시는군.’

그렇게 연회가 무르익었을 대로 무르익었을 무렵.

“동생, 내 자네에게 천상의 기쁨을 선물해 주겠네.”

한껏 기분이 좋아진 압둘 2세가 오토 일행을 어딘가로 데려갔다.

“오오오오오오오!”

잠자코 술만 퍼마시던 카이로스는, 드디어 하렘에 가는 줄 알고 눈이 뒤집어졌다.

“뺀질아! 드디어 하렘에 가는 것이냐!”

“응.”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괜히 나서지 말고 조용히 따라와. 압둘 2세 앞에서 말실수하지 말고.”

“걱정 마라! 뺀질이! 하렘에 가기 위해서라면 입을 꽉 다물고 있을 터이니!”

그간 카이로스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렘을 경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 * *

“오오오! 오오오오오!”

하렘은 과연 카이로스가 상상하던 곳인 ‘것처럼’ 보였다.

왕궁 내 깊숙한 곳에 자리한 하렘에는, 하늘하늘 야시시한 복장을 입은 무희[舞戱]들이 거의 100명 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뭡니까.”

카미유가 오토에게 물었다.

“갑자기 기분이 좋고 몸과 마음이 편안합니다. 사람 기분이 갑자기 이렇게 좋아질 수가 있는 겁니까?”

“그게 왜?”

“이거 혹시….”

“마약이라도 뿌려 놓은 거 아니냐고?”

“예.”

카미유가 매섭게 눈을 빛냈지만, 오토가 안심하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거 아니니까 안심해. 하렘은 유흥시설 같은 게 아냐. 오히려 휴양시설에 가깝지.”

오토가 카미유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기 천장에 수정구 보이지.”

오토가 천장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아주 커다란, 거의 소 머리만 한 크기의 수정구를 가리켰다.

“천상요람이라고. 아티펙트거든? 저게 이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마다 최상의 습도, 온도, 냄새, 공기의 질 같은 걸 모든 환경적인 조건을 맞춰 줘.”

“예…?”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환경적 요인에 민감하거든. 그리고 근심 걱정 같은 걸 덜어주는 심리적인 마법도 걸려 있고.”

“아.”

“그래서 이 공간 안에 있으면 뭘 해도 편안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거야. 술을 마셔도 좋고, 차를 마셔도 좋고. 사랑을 속삭여도 좋은 거지.”

“알려진 거랑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마굴이겠지.”

오토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온 세상의 모든 쾌락과 향락이 있는 곳. 온갖 퇴폐적, 쾌락적, 변태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매음굴 같은 곳이라고 알려져 있겠지.”

“맞습니다.”

“그거 허풍쟁이들이 떠벌린 헛소문이 부풀려진 거야. 상식적으로 술탄도 일국의 군주인데 왕궁 한복판에 그런 유흥시설을 만들어 놓고 즐긴다는 게 말이 돼? 나라 말아먹으려고 작정한 것도 아니고.”

“하긴 그렇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호호호!”

“어머나! 이 단단한 근육 좀 봐!”

“여기 앉으셔요.”

수십여 명의 무희들이 카이로스를 둘러싸 술을 따라주고 온갖 시중을 들어주었다.

개중에는 카이로스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마사지를 해 주는 여인까지 있었다.

“크핫핫핫핫!”

카이로스는 아리따운 무희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시중을 들어주자 엄청나게 좋아했다.

“휴양시설이라면서 저 아리따운 무희들은 뭡니까? 한두 명도 아니고.”

“글쎄? 뭘 거 같은데?”

오토가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야. 모르고 지나가면 더 좋고.”

“그게 무ㅅ….”

그때.

“과인은 자리를 비켜 줄 터이니, 우리 동생은 편하게 놀다 가게.”

압둘 2세가 다가와 말했다.

“형님이 가시면 어떡합니까? 형님의 농담 없이 저희들끼리만 놀면 흥이 안 날 것 같습니다.”

“그런가? 껄껄껄껄!”

압둘 2세는 오토가 자신의 유머감각에 대한 칭찬해 주자 매우 좋아했다.

“하긴. 다들 과인의 농담을 듣고 싶어 하긴 하지. 신하들도 과인의 농담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네.”

“심히 공감합니다.”

“허나 과인도 처리할 일이 많아 지금은 같이 놀 수 없구먼. 조만간 다시 자리를 마련하겠네.”

“아이고, 고생 많으십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살펴 가십시오.”

“재밌게들 놀게나.”

압둘 2세가 사라지고.

“수고하셨습니다.”

카미유가 오토를 격려했다.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말장난이나 들어주시느라 꽤 힘드셨겠습니다.”

“응?”

오토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소리야? 진짜 재밌어서 그런 건데.”

“예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섬 이름이 뭐라는 줄 알아? 아마도래, 아마도.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카미유는 오토와의 대화를 포기해버렸다.

* * *

압둘 2세의 배려로, 오토 일행은 하렘에서 일종의 회식자리(?)를 가졌다.

아리따운 무희들은 오토 일행에게 칼리프 왕국의 전통 춤을 선보이고, 시중을 들어주었으며, 함께 맛있는 술과 음식을 즐기며 놀아주었다.

사실 여기까지만 보면 유흥업소 같긴 했지만, 특별히 퇴폐적이거나 불필요한 신체접촉 같은 건 일절 없었다.

쾌락보다는 오구오구 함께 놀아주며 장단을 맞춰 주는 느낌이 더 강했다.

“크핫핫핫핫! 술 하면 짐! 짐 하면 술! 이 세상에 짐만큼 술을 잘 이해하는 사내는 없을 것이다! 크핫핫핫!”

앞선 1차… 가 아니라!

이미 연회에서부터 얼큰하게 취해 있던 카이로스는, 무희들과 더불어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좋단다~’

오토는 그런 카이로스를 바라보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예~ 어르신~ 실컷 즐기십쇼~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면 놀라 나자빠지실 테니까~ 큭큭큭! 모르고 넘어가는 편이 나을지도~? 큭!’

오토가 ‘진실’을 떠올리며 킥킥거릴 때.

“전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왜? 조금만 더 있다 같이 들어가지.”

오토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카미유에게 말했다.

“전 이런 자리가 오히려 더 불편합니다.”

“그러니까 아싸 소리 듣지.”

“예?”

“아냐. 신경 쓰지 마. 불편하면 일어나야지, 뭐. 먼저 들어가서 쉬던지.”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고집하고는.”

카미유는 기사로서의 본분을 다하려, 밖으로 나가 문 앞을 지켰다.

칼리프 왕국의 기사들과 함께.

‘무슨 바람이 불어서 무희들과 어울리시는지 모르겠군. 한동안은 여색을 극도로 멀리하시더니. 혹시.’

오토가 다시 술과 여색에 빠지는 건 아닐지 걱정하던 그때.

“안에 약혼자 있나.”

엘리제가 카미유에게 물었다.

“……!”

카미유의 표정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굳어졌다.

‘내가 취한 건가?’

혹시나 싶어 눈을 연거푸 깜빡여 보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녀가 맞았다.

엘리제.

오토의 약혼녀.

‘왜 아가씨가 여기에???’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비, 비상사태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카미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엘리제가 하렘 안에서 무희들과 어울리는 오토를 본다면…….

카미유의 상상 속.

뎅겅!

오토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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