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9화
포클론 공작의 말을 들은 귀족들은, 로셴 백작의 소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가 아라드 제국군을 통해 지원을 해 주겠다니, 국왕인 크바르쯤은 전혀 두렵지 않았던 것이다.
“곧 아라드 제국군 1개 사단이 본인의 영지로 지원을 올 것이오. 그러니 그대들은 아라드 제국군을 공격하지 마시고, 국경만 열어 주시면 되오.”
포클론 공작이 미소를 지으며 여유를 보이자 귀족들은 그럼 그렇지! 하며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광대 출신 국왕 전하께서 꽤나 당황하시겠습니다! 하하하!”
“근본 없는 천한 광대 주제에 왕위에 오르니 눈에 뵈는 게 없었나 봅니다!”
“정치라는 게 광대짓이 아니라는 걸 이번 기회에 뼈저리게 깨달으시겠지요, 우리 국왕 전하께서는.”
“껄껄! 참으로 가소롭소이다! 아니 그렇소? 껄껄껄!”
크바르에 대한 귀족들의 멸시와 무시는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크바르는 방계 출신에다 정식으로 교육받은 적도 없는 인물이었다.
또한, 하필 왕이 되기 전 희극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온 덕분에 귀족들로부터 무시당하기 딱 좋은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크바르가 괘씸할 수밖에 없었다.
천한 광대 주제에 왕이 되었으면 조용히 호의호식이나 하면서 허수아비 노릇이나 할 것이지, 왕이랍시고 감히 귀족들을 견제하는 게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한 달 안에 국왕을 굴복시키도록 하겠소이다. 그럼 국왕은 제위기간 동안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낼 수밖에 없을 것이오.”
포클론 공작이 호언장담했다.
“본인은 국왕과 본인의 딸을 결혼시킬 것이오.”
그러자 귀족들이 감탄했다는 듯 포클론 공작을 칭송했다.
“그, 그런 방법이!”
“오오오!”
“하하하하하! 역시 포클론 공작이십니다!”
포클론 공작은 아라드 제국군의 도움을 받아 크바르를 제압하고, 그를 허수아비로 만든 뒤 자신의 딸과 결혼시킬 생각이었다.
그와 동시에 섭정으로서 키이우 왕국을 통치하면서, 자신의 딸과 크바르 사이에서 나온 아이를 왕세자로 책봉한 뒤 왕위에 앉힐 계획이었다.
그야말로 큰그림.
키이우 왕국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원대한 야망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아무 걱정 말고, 잠자코 계시면 되오. 알겠소이까?”
“예! 공작 전하!”
그렇게 긴급히 소집됐던 키이우 왕국 지방귀족들의 회합은, 하하호호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
* * *
같은 시각.
“후우.”
크바르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전하, 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뭐가요?”
“전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로셴 백작을 처형…….”
“언제요?”
“예?”
“로셴 백작을 언제 처형하셨는데요?”
“그야…….”
크바르는 오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로셴 백작을 죽이라 해서 죽였는데, 언제 죽였냐니.
‘설마 치매라도 걸리신 건가?’
크바르는 문득 무서워졌다.
오토를 믿고 사고를 치기는 했는데, 딴소리가 튀어나오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싶어 어질어질했던 것이다.
“데려와.”
“예, 전하.”
오토의 명령에 카미유가 문을 열었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로셴 백작이 깊게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으며 크바르를 향해 한 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로, 로셴 백작!”
크바르로서는 자신이 죽인 로셴 백작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돌아온 것이 놀라울 수밖에 없을 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당연히 가짜를 죽인 거죠. 감옥에 갇혀 있던 흉악범을 세뇌시켜서, 로셴 백작으로 위장한 거고요.”
“아……!”
“로셴 백작의 죽음은 당분간은 극비사항이니까, 한동안 시종으로서 곁에 두시고 이런저런 조언을 받으시면 됩니다.”
오토가 크바르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보안이 워낙 중요한 작전이라…….”
“아닙니다.”
크바르가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 신경 써 주시고 도와주는 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그래도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게 예의인 건데, 이번 건은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오토는 진심으로 크바르에게 미안했다.
“대신 다음에는 어떻게 일이 진행될지 미리 알려 드릴 테니까, 이번엔 기분 나쁘시더라도 부디 너그러이 넘어가 주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닙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하하.”
“보안이 중요하다면 말씀해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에는 말씀드릴게요.”
“음?”
“그러니까…….”
오토가 크바르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
오토의 이야기를 듣는 크바르의 눈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 그런 비열…… 헙!”
“쉿.”
오토가 크바르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다.
“거 보안이 중요하다니까 그러시네.”
“읍! 읍읍!”
“조용히 말씀해 주세요. 제발.”
“아, 알겠습니다.”
오토에게서 풀려난 크바르가 진땀을 삐질, 흘리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그런 비열한 계략을…….”
“뭐라고요?”
오토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비열하다고요?”
“그, 그게 아니라!”
크바르가 손사래를 쳤다.
“전하를 욕하는 건 아닙니다. 단지 너무 악랄한 것 같아서 그렇게 표현한 것뿐이지, 다른 뜻은 절대 없었습니다.”
“악랄하긴 뭐가 악랄합니까? 죽고 사는 문제에.”
“백번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하, 하하하하.”
크바르는 혹시나 오토가 기분이 나쁠까 애써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서 또 전하 하셨군.’
카미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놀랍지도 않은 표정이었고.
‘무, 무서운 인간!’
눈치 빠른 로셴 백작은 오토가 뭘 하려는지 깨닫고 완전히 질려 버린 기색이었다.
그만큼 오토의 다음 계획이 비열하고, 악랄해서 차마 하하호호 웃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일단 군대를 일으켜서 포클론 공작만 압박해 주시죠. 그럼 알아서 움직여 줄 테니까.”
“예, 전하. 알겠습니다.”
크바르는 오토의 말을 순순히 따르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토의 말대로만 된다면, 왕권을 아주 확실하게 틀어쥘 수 있을 것이었기에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 * *
크바르가 군대를 일으키자 포클론 공작과 지방귀족들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 역시 즉시 군대를 일으키고, 크바르가 이끄는 왕국군과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그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손에 쥔 특권과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을 사람은 이 세상에 몇 되지 않을 테니까.
“멍청한 놈.”
오래간만에 갑옷을 입은 포클론 공작은, 수도가 자리한 방향을 바라보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아라드 제국군이 오고 있었기에, 그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라도 빨리 왕국군을 제압하고, 크바르를 허수아비로 만든 뒤 나라를 주무를 생각에 싱글벙글이었다.
“부르셨어요, 아버지.”
그런 포클론 공작의 곁으로 아리따운 여인이 다가와 말했다.
그녀의 이름은 에스메랄다.
포클론 공작의 막내딸로서, 아름다운 것은 물론 고운 심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너는 곧 결혼할 것이니, 그렇게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해라.”
“네……?”
“네 결혼 상대가 정해졌다.”
“아.”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떨궜다.
‘그래, 이게 귀족가 여식의 운명인 거겠지.’
예전부터,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상대와 결혼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언니들 역시도 정략적인 판단에 의해 결혼했으니까.
“너는 우리 가문에서 가장 지체 높은 신분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몸가짐을 더욱 조심히 하도록 하여라.”
“그, 그 말씀은.”
“너는 곧 키이우의 왕비가 될 예정이고, 왕세자의 어머니가 될 것이며, 나아가 국왕의 어머니가 될 몸이다.”
“……!”
“네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자각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란 말이다. 알겠느냐?”
“……예.”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국왕인 크바르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착잡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평생 불행하겠구나.’
에스메랄다는 자신이 왕비가 된다는 게 어떠한 의미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포클론 공작과 국왕 크바르는 이미 철천지원수나 다름없는 사이.
그런데, 에스메랄다가 크바르와 결혼한다면 한평생 냉랭한 관계로 지내리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내전에서 패배한 허수아비 왕과 권력을 틀어쥔 실세의 딸이 어떻게 사이가 좋겠는가?
정략결혼도 정략결혼 나름.
이러한 형태의 정략결혼은 당사자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결혼생활이 될 터였다.
“쯧쯧.”
포클론 공작이 에스메랄다를 향해 혀를 찼다.
“우리 가문의 여식이면 독하게 굴어야지, 어찌 그런 표정을 짓는단 말이냐. 훗날 왕의 어머니가 될 놈이.”
“…….”
“이만 물러가 있어라.”
“네.”
포클론 공작은 에스메랄다를 도구로만 여길 뿐, 그녀의 행복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식이었다.
실제로도 그랬고.
“공작 전하.”
에스메랄다가 물러가자마자 기사가 다가와 포클론 공작에게 보고했다.
“아라드 제국군이 거의 도착했다고 합니다.”
“오! 그런가?”
“저기 보십시오.”
“오오!”
포클론 공작은 저 멀리 아라드 제국군이 접근해 오고 있는 걸 보고 크게 기뻐했다.
안 그래도 빨리 와 주었으면 했는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신속히 이루어진 합류에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다.
“아라드 제국군의 지휘관은 누구라고 하더냐?”
“예, 공작 전하.”
기사가 대답했다.
“잘츠부르크 가문의 엘리제라고 했습니다.”
* * *
포클론 공작은 엘리제가 직접 왔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기뻐했다.
“역시 오토 국왕이로군! 지원군을 보내도 엘리제를 보내다니! 오오오!”
엘리제의 명성은 전 대륙에 걸쳐 명성이 자자한 것.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할지도 모른다고 평가받는 무신(武神)을 보내왔으니, 포클론 공작의 입장에선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역시 오토 국왕이다! 보내도 자신의 약혼녀인 무슨 엘리제를 보내다니! 이리 큰 신뢰를 보내 줄 줄이야! 크흠! 내 딸이라도 하나 더 있었다면 오토 국왕의 첩으로라도 보낼 것을!”
포클론 공작은 자신에게 남은 도구, 그러니까 정략결혼을 보낼 딸이 에스메랄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걸 아쉬워했다.
‘우리 가문의 친척들 중에 오토 국왕의 첩으로 들여보낼 만한 여식이 있는지 알아봐야겠군.’
그렇게 팽팽 행복회로를 돌리던 포클론 공작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 건 그로부터 얼마 가지 않아서였다.
“고, 공작 전하!”
기사가 엘리제를 맞이할 준비를 하던 포클론 공작에게 다급히 소리쳤다.
“비상사태입니다! 비상사태!”
“비상사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던 포클론 공작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에, 엘리제가 당장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는 서신을 전해 왔습니다!”
“……방금 뭐라 했느냐?”
포클론 공작이 제 귀를 의심했다.
“엘리제가 뭐가 어쩌고 저째?”
“항복…… 하랍니다.”
“항복???”
“예! 당장 항복하지 않으면 우리 영지를 초토화시켜 버리겠답니다.”
“……!”
“아, 아무래도 오토 국왕에게 속은 것 같습니다.”
포클론 공작은 기사의 보고에 고장이라도 난 듯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워낙 정신적인 충격이 커서 그런지, 곧바로 반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그’ 엘리제.
그녀가 직접 항복을 권유해 온 이상 포클론 공작 진영에는 희망이란 게 존재할 수가 없었다.
엘리제라면 혈혈단신으로 쳐들어와 포클론 공작의 목을 베어 버리고도 남을 테니까.
“…끼.”
“예?”
“……개새끼.”
포클론 공작이 분노로 인해 몸을 덜덜 떨면서 내뱉었다.
“오도 드 스쿠데리아… 이… 이 개새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 이 씨발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기어코 포클론 공작의 입에서 쌍욕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