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이틀 뒤.
“언제까지 이렇게 버텨야 한다는 거야?”
“이런 빌어먹을! 다 굶어 죽게 생겼어!”
“엄마… 우리 집에는 언제 가?”
콩기라트 부족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거의 2주 동안 먹을 것도 없는 산에 틀어박혀 쫄쫄 굶었더니, 슬슬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던 것이다.
“젠장! 콩기라트 부족이면 어떻고 케레이트 부족이면 어때! 이런 산 속에서 나무껍질이나 벗겨먹다가 굶어 뒈지는 것보다는 낫지!”
“버티면 되긴 개뿔!”
인내심이 부족한 부족민들이 하나둘 부족을 떠나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족장! 부족민들이 이탈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다들 눈치를 보느라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곧 너도나도 산을 내려가 케레이트 부족에게 항복할 기세입니다!”
“그런가.”
“족장! 이대로라면 전사들까지 항복하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내버려두어선 안 됩니다!”
하브르 초원에서 부족을 이탈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부족은, 부족을 이탈하려는 자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끝까지 추적해, 죽인다.
혹시 남겨진 가족들이 있다면, 산 채로 껍질을 벗긴 뒤 늑대 밥으로 던져 주는 끔찍한 형벌을 내린다.
그게 초원의 법칙이다.
그러나….
“가게 둬라.”
아무칸은 떠나는 부족민들을 막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예…? 아니, 족장! 부족민들이….”
“상관없다. 떠나지 못하게 막을 필요도, 굳이 쫓아가 죽일 필요도 없다.”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초원의 법칙을 잊으신 겁니까?”
“어차피 우리가 이길 것이다.”
“……!”
“곧 지원군이 온다. 머지않았다. 지원군이 케레이트 부족을 쳐부술 것이다. 그럼, 초원의 패권은 우리 부족 차지가 된다. 그러니 떠나는 이들에게 애쓸 필요 없다. 결국에는 우리 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테니.”
“그, 그게 정말입니까?”
“나는 족장이기 이전에 전사다. 전사인 내가 왜 적들에게 등을 보이고 구차하게 산속에 숨어들었겠나. 만약 믿는 구석이 없다면, 나는 싸우다 죽었을 것이다. 그것이 전사의 명예가 아니던가.”
“족장….”
“나를 믿는다면, 힘을 비축하라. 곧 전투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힘이 없어 싸우지 못한다면 섭섭하지 않겠나.”
아무칸 역시 지난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서 훌쭉 야윈 모습이었지만, 눈빛만은 아직도 생생했다.
오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에,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 * *
“크핫핫핫핫!”
토그릴은 콩기라트 부족민들이 하나둘 항복해 오기 시작하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슬슬 포기하기 시작하는군. 아무칸 네 이놈. 어디 언제까지 산 속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지, 내 두고 볼 것이다. 흐흐흐!”
토그릴이 생각하기에, 지금의 아무칸에게 선택권은 두 가지.
계속 버티다가 산속에서 굶어 죽거나.
혹은 제 발로 산을 내려와 최후의 저항을 하다가 죽거나.
“이리 쉽게 하브르 초원의 패권을 차지하게 될 줄이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콩기라트 부족이 제 발로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어 준 덕분에, 대규모 전투 한번 치르지 않고 전쟁에서 이기게 생겼으니 기분이 안 좋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토그릴의 좋은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자가 있었으니….
“한데… 조금 이상합니다.”
한 장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것이냐?”
“아무칸은 전사 중의 전사입니다. 그런 그가 부족민들까지 이끌고 도망쳤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차라리 싸우다 죽었으면 죽었지, 등을 보일 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게다가 정찰 활동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척후병들과 정찰병들이 계속해서 사라지거나, 혹은 시체로 발견되고 있습니다. 적 별동대가 우리 군의 눈과 귀를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게 분명합니다. 어쩌면… 우리 군이 함정에 빠진 것일지도….”
“이 밥버러지 같은 놈이.”
토그릴이 벌떡 일어나 칼을 뽑더니, 장군의 목을 뎅겅! 베어 버렸다.
쏴아아아!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고.
데구르르르….
장군의 머리통이 텐트 바닥을 굴렀다.
“적 별동대 놈들의 움직임에 휘둘려선 안 된다고 내 분명히 말했거늘.”
토그릴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대업을 코앞에 두고 한 치의 흔들림이 없어도 모자랄 판에, 고작 그런 뻔히 보이는 수작에 겁을 집어먹어? 이딴 놈이 우리 부족의 전사들을 지휘하는 장군이랍시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니! 다들 똑똑히 들어라! 대업은 이미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흔들리면 놈들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열어 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알겠는가!”
“예! 족장!”
텐트에 있던 케레이트 부족의 수뇌부들은, 잔뜩 겁에 질려서 마치 발작하듯 소리쳐 대답했다.
하브르 초원에서 가장 강하고, 또한 가장 포악한 토그릴의 말에 토를 달았다간 죽은 장군과 같이 목이 뎅겅 날아갈 테니까.
“밥버러지 같은 놈이 주둥이를 놀린 덕분에 괜한 술맛만 버렸군. 퉤!”
토그릴은 침을 탁! 뱉고는 텐트를 나섰다.
그리고 그날 새벽.
목이 날아간 장군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족장! 족자아아앙!”
“…무슨 일이냐.”
곤히 잠들어 있던 토그릴은,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불쾌하다는 듯 잠에서 깨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감히 내 잠을 깨운 것이냐?”
“큰일 났습니다! 마그리트 왕국군이 대규모로 침공을 해 왔습니다!”
“뭐라? 마그리트 왕국군…?”
토그릴이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눈을 끔뻑였다.
“마그리트 왕국군은 헬무트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을 텐데?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고 하지 않더냐?”
“거,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수만 명의 마그리트 왕국군이 접근해 오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니.”
토그릴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아 혼란스러워했다.
“마그리트 왕국군이 무슨 볼일이 있어 이곳으로 접근해 오고 있다는 말이냐? 왜 대륙 놈들이 콩기라트 부족을 도와주러 온다는 것이야?”
“그건 저도 잘….”
“그리고 수만 명의 적들이 접근해오고 있는 동안 우리 정찰병들과 척후병들은 뭘 하고 있….”
그 순간.
‘아차.’
토그릴의 뇌리에 몇 시간 전 목을 뎅겅 베어 버렸던 장군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마그리트 왕국군뿐만이 아닙니다! 헬무트의 군대도 섞여 있다고 합니다!”
“뭐라? 헬무트의 군대까지…?”
그때.
“으아아아악!”
“죽여라!”
텐트 밖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족장! 헬무트가 보내 주었던 지원군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뭐라?”
“난전입니다! 헬무트의 지원군들과 우리 전사들이 뒤섞여 싸우는 바람에 접근해 오는 마그리트 왕국군의 공격에 대비하기가 어렵습니다!”
“설마… 처음부터 헬무트와 아무칸이 서로 붙어먹고 나를 속였다는 말인가?”
토그릴은 일이 이 지경이 되었음에도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건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지만 함정에 빠졌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했기에, 토그릴은 자신의 창을 집어 들고 텐트를 나섰다.
* * *
마그리트 왕국군은 케레이트 부족의 군영으로 곧장 쳐들어왔고, 뒤이어 치열한 난전이 펼쳐졌다.
카이로스와 카미유, 그리고 마검사들은 멀리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간 케레이트 부족의 척후병들과 정찰병들을 사냥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서, 전투에 참여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끌끌! 역시 뺀질이로군. 이오타 왕국군이 아니라 마그리트 왕국군을 보내다니.”
“또 무슨 협잡질을 벌인 건지.”
카이로스와 카미유는 일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는 몰랐지만, 오토가 또 뭔가 비열한 방법을 통해 마그리트 왕국군을 꼭두각시로 만들었다는 걸 눈치챘다.
그러지 않고서야 마그리트 왕국군이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군대여! 모조리 쳐부숴라!”
심지어 헬무트마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나타난 걸 보면, 확실히 오토의 계략이 효과를 발휘한 게 분명했다.
“드디어!”
한편, 아무칸도 산 아래에서 한바탕 전투가 벌어지는 걸 보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봐라! 콩기라트 부족이여! 지원군이 왔다! 고통의 시간은 끝났다! 케레이트 부족을 쳐부술 시간이다!”
콩기라트 부족민들과 전사들은 아무칸의 말이 현실이 되자 크게 놀랐다.
이대로 산속에서 굶어 죽을 줄로만 알았는데, 정말로 지원군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전사들이여!”
아무칸이 기다렸다는 듯 콩기라트 부족의 전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때가 되었다! 케레이트 부족 놈들을 쳐부술 절호의 기회다! 다들 지쳐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그러니 싸울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자들은, 지금 당장 나와 함께 산을 내려가 놈들을 쳐부수자! 우리 콩기라트 부족이 전투에서 빠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러자 콩기라트 부족 전사들이 거센 함성을 내지르며, 무기를 움켜쥐고 아무칸을 뒤따랐다.
그런 콩기라트 부족 전사들은,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굶주림에 지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던 사람들 같지가 않았다.
타고난 전사들이라 <전투>라는 단어만 들어도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올라 굶주림마저 극복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콩기라트 부족까지 가세하자, 전투의 구도가 어째 영 기묘하기만 했다.
마그리트 왕국군, 헬무트의 군대, 그리고 콩기라트 부족까지.
서로 죽고 죽이던 세력들이 연합해 케레이트 부족과 싸우는, 매우 어색한 그림이 연출된 것이다.
“죽어 이 새ㄲ… 가 아니라.”
흠칫 놀라는 마그리트 왕국군.
“간 떨어질 뻔했잖아! 이 자식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헬무트의 병사.
“머저리 같은 놈들! 한눈팔지 마라!”
그런 마그리트 왕국군과 헬무트의 병사들에게 호통을 내지르는 콩기라트 부족의 전사까지.
연합훈련을 해 본 것도 아니고, 군복이 통일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감정이 좋은 것도 아닌 세력들끼리 함께 싸우려니 불협화음이 일어나는 건 당연했다.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해 팀킬도 벌어지기 일쑤.
게다가 세 세력 모두 지칠 대로 지친 상태라, 평소와 비교했을 때 전투력이 크게 떨어져 있다는 것 또한 문제였다.
굶주려 있던 콩기라트 부족.
격렬했던 전투의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헬무트의 군대.
전투의 후유증뿐 아니라 수도와 하브르 초원을 오가는 강행군에 파김치가 되어 있던 마그리트 왕국군.
애초에 세 세력 모두 싸울 컨디션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케레이트 부족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결코 밀리지 않았다.
“겁먹지 마라! 놈들은 형편없는 오합지졸일 뿐이다!”
“모조리 죽여라!”
“이 약해빠진 놈들! 크핫핫핫!”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중 기습을 당한 탓에, 기병대를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케레이트 부족은 연합군을 오히려 압도했다.
잘 먹고, 잘 쉬고, 잘 단합된 군대의 힘이란 수적 열세도 극복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케레이트 부족에는 있고, 연합군에는 없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전장을 지배하는 절대적 무력의 존재 여부였다.
“오냐! 이 쓰레기 같은 놈들! 모조리 쓸어주마!”
토그릴.
그는 하브르 초원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케레이트 부족의 족장이면서, 가장 강력한 무력을 보유한 최강자.
그리고 불행히도 지금의 연합군에는 토그릴을 막을 만한 무력을 지닌 이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카이로스·카미유·아무칸·헬무트 모두 지칠 대로 지쳐서 전투불능이나 다름없는 상태였기에, 토그릴이 전투를 지배하며 학살을 벌이는 것을 막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