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8화
결국, 북부제국군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연합군이 남겨 놓고 간 탄약이 모조리 폭발해 버리는 바람에 수천여 명이 비명횡사했음은 물론.
식량 또한 도저히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닌지라 북부제국군은 또 다시 쫄쫄 굶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탄약은 그렇다 치더라도 식량이라도 노획했다면 적어도 며칠은 더 버틸 만했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으니 그야말로 상처뿐인 승리에 불과했다.
덕분에 북부제국군 군영 내에서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이런 씨발!”
“개 같은! 도저히 못해먹겠다!”
“우릴 다 죽이려고 작정했군!”
북부제국군 장병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제대로 된 보급도 받지 못한 채 실컷 부려 먹히기만 하니, 그들로서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거듭된 전투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성과조차 내지 못한 것도 사기저하의 핵심 요인이었다.
게다가 본토가 공격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수도가 함락 위기에 있다는 소식까지 퍼지면서, 북부제국군 장병들 사이에서는 패전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간 상태였다.
그리고…….
“커헉!”
“모, 몸이…… 너무 아파…… 내 몸이…… 으으윽……!”
“전투자극제…… 전투자극제를 더 줘…….”
전투자극제의 부작용을 호소하는 장병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면서, 북부제국군 장병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복용하기만 하면 힘이 불끈불끈 솟았었는데, 약기운이 떨어지자 어마어마한 후유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
“차라리 항복하고 말지!”
결국, 몇몇 북부제국군 장병들은 몰래 군영을 떠나 연합군 진영으로 향했다.
그렇게 시작된 탈영은 점점 늘어났고, 북부제국군의 사기를 더욱 저하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개중에는 탈영을 막는 장교들이나 기사들을 죽이는 사건도 여러 차례 발생해서 수뇌부들의 골머리를 썩였다.
그리고 그 소식은 고스란히 바실리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탈영이라?”
뇌출혈 후유증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해지고 말투가 어눌해진 바실리는, 탈영 보고를 받고 엄청나게 분노했다.
안 그래도 번번이 엿을 먹어 분노해 있었는데, 그 와중에 탈영병들까지 발생하니 바실리로서는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탈영하는 놈들은 절대로 용서하지 마라. 무조건 죽여라. 탈영의 ㅌ자라도 꺼내는 자들도 그 자리에서 베어라.”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
어떻게 어떻게 포위망을 뚫고 진출하긴 했지만, 이대로라면 굶어 죽을 판국이었다.
‘앞으로 열흘도 버티지 못한다. 지금 몰아쳐야 한다.’
바실리는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이 공세를 성공시켜서 장벽을 점령하지 못한다면, 북부제국은 끝장이었다.
아니, 본토가 공격당하고 있는 이상 이미 패전한 전쟁인지도 몰랐다.
‘저들이 내 통제에 따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게다가 정체불명의 외계종족과의 계약은 그 기한이 30일에 불과했다.
그 기간이 지나면 그들의 봉인이 완전히 풀릴 테고, 통제력이 상실될 터.
그 안에 어떻게든 승부를 봐야 했다.
지금이 사실상 바실리 인생 최대의 위기이자 최후의 기회였던 것이다.
“장병들에게 전투자극제를 보급하고…… 계속 진격하라.”
결국, 바실리는 진격을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기엔 이미 너무나도 멀리 온 상황.
외계종족을 부릴 수 있을 때 반전의 발판을 만들어야 했기에, 그는 진격을 명령했다.
계속해서 비전투손실이 발생하는데도 군을 재정비할 틈도 없이 억지로 공세를 계속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 *
탄약과 식량이라는 미끼를 던지고 간 덕분에, 연합군의 후퇴는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북부제국군의 공세 당시 몇 백 대의 트리톤을 잃긴 했지만, 병력 규모를 생각해보면 피해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토는 트리톤들을 전방에 배치시켜서 적의 공세를 늦추려 하는 한편, 아군 병력은 계속해서 후방으로 후퇴시켰다.
최후의 전투는 북부장벽에서 공성전의 형태로 벌어져야 했으므로, 계속해서 병력을 뒤로 물렸던 것이다.
그러던 중 문제가 생겼다.
“여긴…… 어디지?”
“당신은 누구야?”
트리톤들을 조종하는 마검사들 중 일부가 기억상실증을 호소했다.
“전하, 트리톤 조종사들이 기이한 증상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기이한 증상……?”
오토는 카미유의 보고를 받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퇴하는 과정에서 몇 명이 전사하기는 했지만, 조종사들이 기이한 증상을 호소할 정도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몇몇 조종사들이 기억상실증뿐만 아니라 치매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치매 증세……?”
“예. 갑자기 다른 인격을 보인다거나, 혹은 방금 전에 있었던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등 아주 심각합니다.”
“전투 중에 머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던 건 아니고?”
오토는 뇌손상을 의심했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조사 결과 뇌손상을 입을 만한 부상을 입었던 조종사는 거의 없습니다. 다만…….”
“……?”
“적들의 트리톤들 중 거대하고 강력한 기체들과 가까이 접촉했던 조종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설마.”
오토가 눈살을 찌푸렸다.
“강화된 적 트리톤들에 가까이 가면 뇌손상을 입는다는 거야?”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으음.”
오토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외계종족은 정신기생. 외계종족에 빙의된 사람과 트리톤은 기이한 에너지를 내뿜어. 그 에너지가 아군 조종사들에게 영향을 미친 건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그럴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우선 후유증을 호소하는 조종사들한테 다이애닌을 복용하게끔 해 봐.”
“알겠습니다.”
연합군은 치매 치료제인 다이애닌 역시 상당량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전투 중 뇌손상을 입는 장병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전투를 치르다 보면 머리를 크게 다치는 장병들이 꽤 많았는데, 그때 다이애닌이 큰 효과를 보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전하, 다이애닌을 복용한 조종사들이 후유증에서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역시.”
오토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이 내뿜는 기이한 에너지가 뇌에 손상을 입히는 것 같네. 근데 말야…….”
“예?”
“어르신들께서 싸웠다던 외계문명이 그놈들인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르신들이 그러셨잖아. 드래곤들이 이 세계를 침공하려던 외계문명과의 전쟁에서 멸종하게 된 거라고. 그 당시 후유증으로 어르신들이 치매를 앓게 된 거고.”
“아……!”
“설마 100년 전에 북부제국에 추락했던 정체불명의 비행체가 그 외계문명이라면……?”
“그럼 전령을 보내 어르신들께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카미유는 오토의 뜻을 이해하고는, 곧장 적절한 조치를 내렸다.
북부제국군 진영 안에 있는 정체불명의 강자들.
마신과 그의 권속들이 사실 드래곤들이 싸웠던 외계종족이라면, 쿠란과 아드리아나 부부로부터 그들을 상대할 방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니지.”
오토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우리가 가는 게 빨라.”
“예?”
“전투가 코앞이야. 어느 세월에 전령을 보내겠어. 우리가 다녀오자.”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카미유와 함께 공간도약의 권능을 이용해 쿠란과 아드리아나 부부를 만나러 갔다.
대학살의 서에 영혼에너지가 충만한 상태라, 공간도약의 시간 제약을 어느 정도 상쇄시킬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 *
오토와 카미유는 이오타 왕국에서 육아에 힘쓰고 있던 쿠란과 아드리아나 부부를 만나, 그들에게 이 세계를 침공하려던 외계문명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 그게 정말이냐?!”
쿠란은 트리톤을 조종하던 조종사들이 뇌손상과 비슷한 증상을 호소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크게 놀랐다.
“사실 우리 드래곤들이 치매 증세를 호소하게 된 것도 단순히 늙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란다.”
쿠란이 외계문명과의 전쟁 당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 외계문명은 육체가 없는 존재들로 이루어진 것이었지.”
“……!”
“그들은 우주의 여러 생명체들의 육체를 그릇 삼아 기생해 살아가는 존재란다. 때에 따라서는 그들이 전투 중에도 우리 드래곤들의 육체를 지배하기도 했지.”
“마, 맙소사.”
“그들이 내뿜는 기이한 에너지에 노출되면 정신이 흐려지면서 자아가 무너진단다. 그래서 우리 드래곤들조차 고전할 수밖에 없었단다.”
쿠란의 증언은 마신과 그의 권속들의 특성과 매우 비슷했다.
마신과 그의 권속들이 드래곤들이 싸웠던 외계문명의 잔존세력일 수도 있겠다는 합리적인 추론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몰랐던 것이다.
이건 오토조차도 몰랐던 사실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한 발견이었다.
최후의 결전에서 외계종족의 기이한 에너지 때문에 아군 피해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토야, 조심해야 한다. 놈들과 가까이 접촉하면 반드시 정신에 이상이 생길 수밖에 없단다.”
“어떻게 상대할 방법이 없을까요? 놈들의 약점이라든지?”
“정신력이 강한 생명체라면 기이한 에너지에 저항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우리 드래곤들조차도 쉽지 않았지. 그러니 나와 내 아내가 치매에 걸린 것 아니겠느냐.”
“아…….”
“하지만 다이애닌을 복용하고 싸우면 이야기가 다를 수도 있겠구나.”
“……!”
“꼭 다이애닌을 복용하고 싸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놈들과 싸우다가 정신이 무너져 내리는 수가 있을 거란다. 놈들이 내뿜는 기이한 에너지에 노출되면 평범한 사람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정신을 지배당할지도 모른다.”
“헉.”
오토는 쿠란의 경고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이 사실을 모르고 그냥 지나쳤거나, 혹은 다이애닌이라는 치매 치료제가 없었다면 얼마나 큰 곤경에 처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놈들은 플라즈마 에너지로 이루어진 정신기생체들이란다. 처치한다 한들 금세 다른 육체로 갈아타기에,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지.”
“그럼 어떻게 상대해야 하죠?”
“정신체를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은 그리 많지 않단다. 쉽게 설명하자면 영혼까지 소멸시켜야 하는데, 그게 쉬울 리가 없지 않겠느냐.”
“그, 그렇죠.”
“네가 가진 금지된 마도서나, 그 카이로스란 인물이 가진 원혼귀갑 같은 게 도움이 되겠지. 영혼마저 베어 버릴 수 있는 마음의 검을 얻은 자라면 그들을 온전히 베어낼 수 있을 테고.”
“마음의 검이라면…….”
“인간들이 말하는 심검(心劍)의 경지에 오른 자라면 정신체인 그들을 소멸시키는 것도 가능할 테지.”
“아!”
오토는 엘리제가 어떻게 마신과 그의 권속들을 처치하고, 북부제국의 침공을 저지했는지를 깨달았다.
엘리제는 이미 심검의 경지를 완성한 자.
오직 그녀만이 마신과 그의 권속들을 온전히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네게도 그런 힘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네……?”
“무형의 검을 얻지 않았더냐.”
“……!”
“그 검이라면 놈들을 소멸시킬 수 있을 게다. 그러니까, 다이애닌만 잘 복용하고 싸우면 된다.”
무적황제의 마지막 권능인 무형검.
뭐든지 베어낼 수 있는 그 검이라면, 정신체조차 소멸시킬 수 있단 말이었다.
요약하자면, 이미 오토는 마신과 그의 권속들을 상대할 모든 준비가 끝나 있다는 것.
미리 아군 장병들에게 다이애닌만 보급한다면, 더는 걱정할 게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언 감사합니다, 어르신.”
“아니다.”
쿠란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드래곤들이 깔끔하게 해결했어야 하는 일이었는데, 잔존세력이 남아 이 세계를 어지럽히려 하고 있을 줄은 몰랐구나. 오토야.”
“예, 어르신.”
“네가 우리 드래곤들을 대신해서 그 외계종족으로부터 우리 세계를 지켜다오.”
“그럴 겁니다.”
오토의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떠올랐다.
* * *
오토와 카미유는 쿠란으로부터 조언을 얻은 즉시 북부장벽으로 이동해 아군 장병들에게 다이애닌을 보급했다.
알퐁달 어르신이 개발해낸 치매 치료제가 이제는 북부제국과의 전쟁에도 어마어마한 활약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연합군은 마지막 준비를 끝마치고, 북부제국군을 기다렸다.
그로부터 약 3일 후.
척! 척! 척! 척!
쿵! 쿵! 쿵! 쿵!
저 멀리 북부제국의 대군이 거센 눈보라를 뚫고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뿌우우우우우우우―!!!
연합군 진영 곳곳에서 북부제국군의 출현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하.”
“들었어.”
오토는 카미유의 부름에 그렇게 대답하고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