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순식간에 들이닥친 체로키 왕국군은, 마치 성난 파도처럼 헬무트가 지키는 요새를 공격했다.
하지만 헬무트가 지키는 요새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이라서, 체로키 왕국은 첫 번째 전투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채 후퇴하고 말았다.
이오타 왕국군의 준비가 잘되어 있었을뿐더러, 헬무트가 지키고 있는 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내일 아침 다시 공격한다!”
체로키 왕국군 사령관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공성을 시도했다.
하지만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체로키 왕국군은 한번 전투에 나설 때마다 엄청난 피해를 입은 채 퇴각해야만 했다.
반대로, 이오타 왕국군은 인명피해가 거의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의 공성전에서 체로키 왕국군이 거의 3천 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낸 반면, 이오타 왕국군의 전사자는 50명도 채 되지 않았다.
절대방어.
혹은 우주방어.
헬무트는 방어 작전이나 수성전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기에, 체로키 왕국군의 기습적인 공세를 최소한의 피해를 입고 막아냈던 것이다.
물론 헬무트라고 해서 마냥 편안한 건 아니었다.
“허억, 허억.”
헬무트는 오늘도 성벽에 몸을 기댄 채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전투를 벌이느라 숨이 차오를 대로 차올라 있었던 것이다.
‘젠장.’
헬무트는 문득 오토의 신하가 된 걸 후회했다.
‘이렇게 혹사당할 줄 알았다면 그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건데. 지금이라도 사직서를 내고 낙향해야 하나.’
헬무트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정말로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악덕 국왕 오토는 언제나 최소한의 병력만 쥐어 주었고, 그때마다 헬무트는 탈진 직전까지 싸워야만 했다.
이러다가는 전투 중 전사가 아니라, 과로사할지도 모른단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오토에 대한 충성심이 흐려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오토는 헬무트에게 충분히 좋은 대우를 해 주고 있었고, 가족을 볼모로 잡지도 않았으며, 영지의 자치권도 인정해 주었다.
단지 너무 혹사당하는 기분이 들 뿐.
그건 그만큼 헬무트가 가성비(?)가 좋은 인물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 줌 병력으로도 대군을 능히 막아낼 수 있는 능력.
더불어 변경백의 결의라는 성물까지 소유하고 있었기에, 헬무트는 혹사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러다 늙어서도 은퇴 못 하고 부려 먹히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다. 아니어야만 한다.’
헬무트는 오토가 은퇴를 허락하지 않고 늙어 죽을 때까지 자신을 부려먹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었다.
* * *
오토와 이야기를 나눈 토르문트 백작은, 즉시 바야바를 만나 항복 의사를 전달했다.
“귀국에 항복하기로 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현명하신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바야바는 토르문트가 이오타 왕국이 아닌 체로키 왕국에 항복한다는 의사를 표시해 오자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우선.”
토르문트가 말했다.
“저는 귀족들과 함께 거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지원은 필요치 않으십니까?”
“그 정도는 저희 힘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부분입니다.”
“오오.”
“일이 마무리되면, 즉시 국경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내려 귀국의 군대가 본국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토르문트 백작이 조건을 내걸었다.
“오실 때 많은 양의 식량을 가지고 오셔야 합니다.”
“많은 양의 식량 말씀이십니까?”
“아시다시피 본국은 오랜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려 있는 상태입니다. 또한, 군의 보급도 아슬아슬합니다. 귀국에서 식량을 지원해 주지 않는다면, 함께 이오타 왕국과 싸울 수 없습니다.”
“으음!”
바야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이오타 놈들을 몰아내려면 본국의 군대뿐 아니라 로우레딘 왕국군까지 나서긴 해야겠지요.”
“맞습니다.”
“그건 칼마르 국왕 전하께 말씀드려 식량을 가져올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군수물자도 많이 부족합니다. 식량뿐 아니라 무기, 그리고 자금도 많이 필요합니다.”
“하하하.”
바야바가 웃었다.
“토르문트 백작께선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굳이 말씀하시지 않아도, 저희 국왕 전하께서는 군대를 보낼 때 천문학적인 액수의 물자를 함께 보내실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그저 든든할 따름입니다. 하하하.”
“하하하.”
바야바는 토르문트가 이미 오토를 만나 계략을 꾸몄단 사실도 모른 채 그저 임무를 완수한 것에 즐거워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조만간 뵙겠습니다.”
바야바가 돌아간 후.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체로키 왕국군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오토는 토르문트의 손을 맞잡고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토르문트가 아니었다면 오토는 정말이지 큰 위기에 처할 뻔했다.
칼리프 왕국에서의 여정이 길어진 덕분에 시간이 많이 지체됐고, 그 때문에 체로키 왕국이 재정비를 마치고 이오타 왕국을 견제할 수 있게 됐다.
만약 토르문트를 만나러 오지 않았거나, 혹은 시간이 며칠만 더 지체되었다면?
‘로우레딘 왕국은 먹지도 못하고 체로키 왕국과 싸울 뻔했어.’
오토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토르문트를 만나러 와서 그의 신뢰를 산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아군들도 철저히 속이셔야 합니다.”
오토가 토르문트에게 신신당부했다.
“귀족들조차 체로키 왕국에 항복하는 줄 알아야 합니다.”
“예, 전하.”
“그럼 저희는 체로키 왕국군을 맞이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시옵소서.”
“이들이 백작님을 도울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토는 토르문트에게 쿤타치 가문 출신의 마검사 100명을 지원해 주기까지 했다.
그 정도 병력이라면 로우레딘 왕실을 장악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 테니, 일에 차질이 빚어지는 일은 없을 터였다.
“전군, 대기한다. 로우레딘 왕국의 수도는 공략하지 않는다.”
오토는 이오타 왕국군 진영으로 복귀하자마자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 조용히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체로키 왕국군이 사지(死地)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올 때까지 힘을 비축해 두었다가, 일시에 섬멸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 * *
체로키 국왕 칼마르는 전선에서 올라온 보고를 받고 얼굴을 굳혔다.
“도대체 적 지휘관이 누구이기에 계속해서 피해만 입고 있다는 말이오?”
“예, 전하.”
신하가 대답했다.
“그 헬무트가 지키고 있어 도저히 뚫어내기 힘들다는 보고이옵니다.”
“헬무트?”
칼마르가 눈썹이 꿈틀거렸다.
“옛 마그리트 왕국의 변경백이던 그 헬무트를 말하는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이런.”
칼마르는 하필 헬무트가 이오타 왕국의 지휘관이 되었다는 사실에 낭패란 표정을 지었다.
헬무트뿐 아니라, 발데마르 가문의 군사적 능력은 대륙에서도 이름이 드높았다.
지난 수백 년 동안 하브르 초원의 유목민 전사들을 막아냈으니, 그 명성이 높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다만 주둔 중인 적 병력의 숫자가 매우 적어서, 계속해서 공략한다면 결국 요새를 점령할 수 있을 것 같다고는 하옵니다.”
“으음.”
“일단 국경을 뚫어내기만 하면 지형적으로 공격하기에 수월하니, 피해를 감수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는 현장 지휘관의 판단이옵니다.”
“희생 없는 승리는 없는 법이겠지. 알겠소.”
칼마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군은 피해에 굴하지 않고 계속 국경을 뚫어낼 것이오.”
“예, 전하.”
그때.
“전하, 신 바야바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사옵니다.”
때마침 로우레딘 왕국에 밀사로 갔던 바야바가 복귀했다.
“바야바 경. 갔던 일은 잘되시었소.”
“예, 전하.”
바야바가 미소를 지었다.
“로우레딘 왕국 귀족들의 핵심 인물인 토르문트 백작이 본국에 항복을 해 오기로 하였사옵니다.”
“오.”
칼마르의 얼굴이 환해졌다.
국경을 뚫어내기는커녕, 엄청난 피해만을 입고 있다고 듣던 도중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럼 우리 군이 로우레딘 왕국의 국경을 넘을 수 있게 되었단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바야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군과 로우레딘 왕국군이 힘을 합친다면, 이오타 놈들을 로우레딘 땅에서 몰아내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합니다.”
“정말 고생했소.”
칼마르는 몸소 바야바의 손을 꼭 잡아주며, 로우레딘 왕국에 다녀온 노고를 치하했다.
“그대 덕분에 본국의 국익이 크게 상승하게 되었소. 실로 그대의 공이 크오.”
“망극하옵니다.”
“좋소.”
칼마르가 명령을 내렸다.
“바야바 경. 그대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겠소. 2개 군단을 이끌고 로우레딘 왕국으로 가시오. 가서, 로우레딘 왕국에 있는 이오타 놈들을 몰아내시오. 그럼 이오타 놈들은 양쪽에서 압박을 받게 될 것이고, 결국엔 차츰차츰 무너지게 될 것이오.”
칼마르는 압도적인 국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오타 왕국을 전 방위에서 압박할 생각이었다.
국경에는 지형적으로 병력을 집중시키기가 어려웠기에, 남는 병력을 모두 로우레딘 왕국으로 돌리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오타 왕국의 세력 확장도 막고, 로우레딘 왕국의 영토도 흡수할 수 있으니 체로키 왕국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결과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단 로우레딘 왕국만 접수한다면, 이 전쟁은 이미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 * *
며칠 후.
“와아아아아아아아!”
야심한 밤 기습적으로 들이닥친 반란군들이 로우레딘 왕궁으로 난입했다.
불시에 이루어진 반란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토르문트 백작은 불과 2시간도 채 되지 않아 왕궁을 점령해 버렸고, 나아가 국왕을 체포하는 데도 성공했다.
“토, 토르문트! 이 역적 놈아!”
국왕이 토르문트를 향해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내질렀다.
토르문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네놈의 폭정과 무능함에 굶어 죽은 백성들이 10만을 넘어간다. 네놈에게는 군주의 자격이 없다.’
토르문트는 냉정한 눈빛으로 국왕을 바라보고는,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현 시간부로 국왕을 폐위한다. 다만, 일국의 왕이셨던 분이니만큼 마땅히 예우해야 할 것이다. 알겠는가.”
“예, 백작님.”
“즉시 전하를 별궁에 구금하라.”
“예!”
그렇게 국왕은 토르문트 백작이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 폐위되었고, 별궁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토르문트 백작은 모든 왕족들을 체포하고, 그들의 신분을 박탈한 뒤 방계혈족인 허수아비를 내세워 왕으로 옹립해 버렸다.
그런 뒤 새로운 국왕―허수아비―의 후견인으로서 섭정이 되었다.
사실상 로우레딘 왕국의 국왕이 된 것이다.
“곧 이오타 왕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체로키 왕국에서 지원군이 올 것입니다. 이에 북쪽 국경을 개방하겠소이다.”
그 말은 로우레딘 왕국이 체로키 왕국에 항복한다는 뜻이었지만, 누구도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이야 어찌 됐건 자리만 보전하면 그만이었기에, 딱히 불만이 없었던 것이다.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나라이니만큼, 이오타 왕국에 항복하든 체로키 왕국에 항복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로부터 며칠 후.
척! 척! 척! 척!
체로키 왕국군 2개 군단이 북쪽 국경을 넘어 로우레딘 왕국의 영토로 들어왔다.
그런 체로키 왕국군은 엄청난 양의 식량, 군수물자, 황금을 가지고 왔다.
토르문트의 요청대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로우레딘 왕국에 풀 구호품까지 함께 온 것이다.
그리고….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
오토는 멀리서 체로키 왕국군이 국경을 넘는 광경을 지켜보며, 냉혹한 미소를 지었다.
오토의 눈에는 체로키 왕국군 2개 군단이 산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망자(亡者)였다.
단언컨대, 이미 사지에 발을 들인 이상 살아 돌아갈 수 있는 체로키 왕국은 절반이 채 되지 않으리라.
“가자.”
오토가 카미유를 돌아보았다.
“예, 전하.”
정찰을 마친 오토와 카미유가 이오타 왕국군 진영으로 향했다.
체로키 왕국군을 맞이할 준비는 이미 끝났다.
이제 이오타 왕국군을 끌고 가 로우레딘 왕국군과 함께 포위, 섬멸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