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0화
“일어나요.”
“으음.”
“어서요.”
카심은 미야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어, 얼마나 잔 겁니까?”
“잘 모르겠네요.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아요.”
“아하하…….”
“잠깐 뒤돌아 계실래요? 옷이 다 말랐거든요.”
“아, 알겠습니다!”
카심은 미야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등을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다 입었어요. 이제 당신도 입으세요. 여기요.”
“감사합니다.”
카심은 미야가 다 마른 옷과 방어구들을 건네주자 잽싸게 그것들을 착용했다.
“저도 정신없이 잤네요. 당신 품, 많이 따뜻하고 포근하더라고요.”
“예?!”
“농담이에요. 저도 어색하거든요.”
“하하하.”
“근데 당신…….”
미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카심에게 물었다.
“혹시 가족 중에 드루이드가 있나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순수 대륙인입니다.”
“그런가요?”
“그건 왜 물으십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요.”
“닮은 사람이 있나 봅니다.”
“뭐, 그런 셈이죠.”
미야는 쓴웃음을 짓더니 짐을 챙기고 몸을 일으켰다.
“아, 이름도 못 여쭤봤네요.”
“카심, 카심이라 합니다.”
“그렇군요. 기억해 두죠.”
“그런데…….”
카심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미야에게 물었다.
“미야 님께서는 드루이드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맞아요.”
“보통 드루이드라면…….”
“왜 혼자냐고요?”
미야가 웃으며 대답했다.
드루이드들은 인간이지만 다른 이종족, 혹은 동물들과의 친화력 및 교감에 특화된 이들.
그러다 보니 드루이드라 하면 자연스럽게 동물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드루이드인 미야가 혼자 있다는 건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저는 혼자가 아니에요.”
“예?”
“나와 봐요.”
미야가 카심을 잡아끌었다.
“아, 예.”
카심은 미야에게 이끌려 이글루 밖으로 나왔다가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으르르르!”
“으르르르!”
“으르르르!”
이글루 밖에 그야말로 거대한 늑대들 여러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뭐, 뭔 놈의 늑대들이 호랑이보다 커?!’
카심은 늑대들의 덩치에 그만 기가 질려 버렸다.
늑대가 아무리 덩치가 크다고 한들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미야를 기다리고 있던 개체들은 못 해도 수백 킬로그램 이상은 나가 보였다.
이쯤 되면 늑대가 아니라 몬스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크르르르르-!!!”
그중 가장 덩치가 큰, 대장 개체가 카심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어, 안녕.”
카심은 자신을 향해 적대감을 드러내는 늑대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나 나쁜 사람 아니니까 경계 안 해도 돼.”
“……크르르!”
“아이고, 멋있게도 생겼다.”
카심이 대장 늑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돼요!”
미야가 황급히 카심을 뜯어말리려 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겨 죽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야의 그런 걱정은 애초부터 할 필요가 없는 거였다.
“멍! 멍멍!”
놀랍게도, 대장 늑대는 카심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멍! 멍멍멍! 멍!”
“옳지, 착하지.”
“멍멍!”
“하하하!”
대장 늑대는 오히려 카심의 손길이 기분 좋다는 듯 짖더니, 아예 눈밭에 벌러덩 드러누워 배를 보이기까지 했다.
‘마, 말도 안 돼!!!’
미야는 카심이 대장 늑대를 길들인 것을 보고 경악했다.
‘어떻게 대륙인이 럭키를 드러눕게 만들 수 있는 거야?!’
대장 늑대인 럭키는 어마어마하게 사납고, 또한 경계심이 많은 개체.
그러다 보니 드루이드들 사이에서도 럭키와 교감을 쌓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카심이란 이름의 저 대륙인은 그런 럭키를 첫 만남에서부터 발라당 드러눕게 만들고, 배를 쓰다듬는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정말 대륙인 맞아? 그럴 리 없어. 드루이드가 아니면 초면부터 럭키를 이렇게 다룬다는 건 불가능해.’
미야는 카심이 진짜 대륙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신, 정말 대륙인 맞나요?”
“예?”
“혹시 가족들 중에 드루이드가 있는 거 아닌가요?”
“없습니다만.”
“정말로요?”
“예.”
카심은 미야가 어째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드루이드는 무슨. 우리 집안에서 기사도 나 하나뿐인데.’
카심의 가문은 쿤타치 공국의 하급 귀족인지라 드루이드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 무척 귀엽군요. 하하하.”
“멍멍! 멍멍멍!”
“손?”
“멍멍!”
“옳지, 잘했다. 하하하.”
“멍멍멍!”
미야는 카심이 럭키를 데리고 노는 걸 보고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냐. 절대 대륙인일 리 없어. 럭키는 평범한 늑대가 아냐. 늑대 정령의 화신인데. 잠깐.’
순간 미야의 얼굴이 굳었다.
‘이분은 설마…….’
미야가 놀란 눈으로 럭키와 놀아주고 있는 카심을 돌아보았다.
* * *
오토 일행은 계속해서 카심을 찾아 헤매다가, 기어코 툰드리아와 북부제국의 접경지대로까지 흘러들어가고 말았다.
툰드리아와 북부제국의 접경지대는 험준한 설산(雪山)들이 우뚝 솟은 산맥이었는데, 다행히도 높은 산은 없어서 공중정찰에 큰 무리는 없었다.
“전하!”
카미유가 오토를 돌아보았다.
“저기 보십시오!”
“카심 경?”
“아닙니다.”
카미유가 고개를 저었다.
“북부제국인 것 같습니다.”
“뭐?!”
오토가 카미유가 가리킨 방향을 돌아보았다.
‘북부제국의 기사들이 맞다!’
오토는 북부제국의 기사단이 이동 중인 걸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벌써?’
아직은 북부제국이 툰드리아까지 침공할 시기가 아닌데, 놈들이 이곳에서 어슬렁거린단 말인가?
“어떻게 합니까?”
“음.”
오토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은 카심 수색 작전 중이라 북부제국의 기사들을 추적할 여유가 없는 상황.
‘인원을 나눠야겠지.’
오토가 펭이를 돌아보았다.
“펭이야.”
“귀익?”
“네가 까막이랑 같이 카심 경을 찾아봐. 우린 저놈들을 추적할게.”
“귁! 알겠다! 귁귁!”
오토는 펭이와 까막이로 하여금 카심 수색작전을 펼치게끔 하고, 카미유와 함께 지상으로 내려가 북부제국을 추적하기로 했다.
그들이 이곳 툰드리아에서 무슨 작전을 펼치는지 미리 알아둘 필요성이 있었으므로.
“조심조심 뒤를 밟아. 전투는 나중에.”
“예, 전하.”
오토와 카미유는 북부제국 기사단을 뒤쫓아 이동했다.
투시 능력이 있었기에, 그들을 추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눈밭에 찍힌 발자국들만 따라가도 되기도 했고.
그렇게 두어 시간쯤 뒤를 밟았을 무렵.
“전하, 저기 보십시오.”
“아.”
오토는 산맥 깊숙한 곳에 북부제국의 비밀기지가 있는 걸 발견했다.
‘이건 사전작업이다.’
어쩐지 북부제국의 기사단이 지금 이 시기에 왜 이곳 툰드리아에 있나 했더니, 미리 비밀기지를 설치해 놓고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
‘맞지.’
오토는 북부제국의 툰드리아 침공에 대한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북부제국은 기습적으로 티라누스 부족의 땅을 침공해서 초토화시켰지. 여기서 티라누스 부족의 땅은 그리 멀지 않다.’
티라누스 부족은 하얀 곰, 그러니까 말하는 북극곰들로 이루어진 이종족들이었다.
“어떻게 합니까?”
“일단 지금 당장은 공격하기 좀 그러니까, 물러서서 대비해야지.”
“알겠습니다.”
오토는 북부제국의 비밀기지의 위치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그 규모를 파악한 뒤 안전한 장소로 이동했다.
저들을 괜히 들쑤셨다간 북부제국의 조기 침공을 유발할 수 있었으므로, 괜히 벌집을 건드릴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갑니까?”
“여기서 가까운 곳에 드루이드들의 마을이 있대.”
“아?”
“그들과 먼저 안면을 터야지. 드루이드들이야말로 툰드리아의 중재자이자 수호들이니까.”
이곳 툰드리아에서 드루이드들의 위치는 매우 중요했다.
드루이드들은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여러 이종족들과 동물들의 분쟁을 중재하는, 매우 큰 역할을 맡고 있었다.
각기 다른 종족들의 다른 의견과 가치관들을 어느 정도 한데 모아 주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니만큼, 툰드리아의 결속을 위해서는 드루이드들과의 연합은 필수.
‘드루이드의 왕과 얘기를 나눠 봐야겠어.’
그래서 오토는 즉시 드루이드들의 마을로 이동하기로 했다.
* * *
드루이드들의 마을로 간 오토는, 마을 입구에서 카심을 만났다.
“전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카심이 오토를 보자마자 헐레벌떡 달려왔다.
“어? 카심 경!”
오토는 실종되었다던 카심이 달려오는 걸 보고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그 개고생을 해 가며 찾아 헤맸는데, 이렇게 드루이드들의 마을 입구에서 재회할 줄이야.
‘역시 걱정하는 게 아니었어.’
오토는 괜한 걱정을 했단 결론을 내리고는,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절 찾으러 와 주신 겁니까? 흑흑흑!”
“당연하죠. 얼마나 찾았는데요. 걱정했다고요.”
“흑흑흑! 역시 전하뿐이십니다! 흑흑흑!”
“괜찮아요, 괜찮아.”
오토는 눈시울을 붉히는 카심을 달래 주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왜 울고 그래? 맨날 멀쩡히 잘 살아 돌아오면서. 어휴.’
어느새 카심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오토의 가슴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분은…….”
“아, 이분은 미야라는 분입니다.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카심이 오토에게 미야를 소개해 주었다.
‘어라라?’
오토는 미야라는 드루이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미야는 북부제국의 툰드리아 침공 시나리오에서 꽤나 큰 활약상을 펼칠 드루이드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이오타의 국왕 오토 드 스쿠데리아라고 합니다. 제가 가장 아끼는 신하를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 미야라고 해요.”
통성명을 나눈 뒤.
“드루이드들의 왕을 만나 뵙고 싶은데, 혹시 자리를 주선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왕께서도 대륙인들의 방문을 환영하실 거예요.”
미야는 흔쾌히 오토 일행과 드루이드들의 왕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어서들 오시오.”
드루이드들의 왕은 은발에 가까운 금발과 회색 눈동자를 가진, 매우 잘생긴 미중년이었다.
그런 그의 곁에는 온갖 동물들이 득실거렸는데, 거의 걸어 다니는 동물원이라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이오타의 국왕 오토 드 스쿠데리아라고 합니다. 알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알현은 무슨.”
드루이드들의 왕이 피식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냥 갈리온이라고 부르시오. 코딱지만 한 마을의 촌장인데. 하하하.”
“아닙니다. 툰드리아의 드루이드들을 통솔하시는 분이니, 마땅히 왕이라 칭해야 옳습니다.”
“하하하. 얼굴에 금칠을 해 주시는구려. 그런데…….”
드루이드들의 왕 갈리온이 오토 일행을 슥 둘러보며 말했다.
“대륙인들이 이 먼 툰드리아까지는 무슨 일로 오시…… 음?”
갈리온의 시선이 특정한 인물에 딱 멈추었다.
“그, 그대는.”
갈리온이 카심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당혹스럽단 표정을 지었다.
“예? 저 말씀이십니까?”
카심이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자네 몇 살인가?”
드루이드들의 왕 갈리온이 카심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