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5화
오토가 제대로 된 오러 블레이드를 구사하는 것을 본 카미유와 카심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오러 블레이드는 진정한 강자들의 전유물과도 같은 기술.
이 세계에서는 강함의 척도로서, 이것을 구사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진정한 강자의 반열에 올랐느냐 아니냐를 따지곤 했다.
왜냐하면, 오러 블레이드는 누가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는 것은 오직 스스로의 깨달음에 달려 있었다.
스스로 갈고닦은 무력에 대한 깊은 이해와 마나 운용에 대한 깨달음이 없인 오러 블레이드의 사용은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맞네.’
오토는 자신의 검에 맺힌 오러 블레이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적검술은 6성을 찍으면 신세계가 펼쳐지지.’
경험상 무적검술은 6성을 찍느냐 찍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 위력이 많이 차이가 났다.
이제 와서 보니 왜 6성이 기준이 되는지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약혼자.”
엘리제가 오토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새로운 경지에 오른 걸 진심으로 축하한다.”
“아?”
오토는 얼떨떨했다.
“고, 고마워. 하하. 하하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게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서,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잘 분간하지 못했다.
“오러 블레이드를 깨달았다는 건.”
엘리제가 오토에게 조언했다.
“마나 운용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의미다.”
“으응?”
“적용시켜 봐라. 네가 가진 권능들에.”
“……!”
“분명 뭔가가 다를 거다.”
오토는 엘리제의 조언에서 또다시 깨달음을 얻었다.
‘다, 다르다.’
오러 블레이드를 일으킬 때 사용하는 마나 운용법을 기준으로 가지고 있는 마법들을 다시 돌아보니 느낌이 확 달랐다.
마법을 더욱 강력하고, 정교하게 펼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되나?’
호기심에 검을 들고 마나를 일으켜 보았다.
촤라락!
크게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
회색 오러가 부채꼴 형태로 뻗어 나가고.
쩍!
쩌어억!
전방에 있던 모든 것들이 돌이 되었다.
칼립소의 권능 중 하나인 석화의 눈.
그 기술을 눈이 아닌 검을 통해서 펼쳐진 것이다.
그것도 더 강하게, 더 넓게.
“어?!”
오토는 석화의 눈 기술을 검으로도 뿜어낼 수 있게 된 것에 크게 놀랐다.
눈을 통해 뿜어냈을 때는 범위도 한정적이고 위력이 크지 않았었는데, 검을 이용하니 완전히 다른 기술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개인의 무력이 더 중요하다고 했던 거구나.’
오토는 비로소 엘리제의 가르침을 이해했다.
‘네 스스로가 먼저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네가 가진 권능들도 빛을 발휘하는 거다.’
엘리제가 했던 조언이 뇌리를 스쳤다.
그녀는 괜한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이 옳은지.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진정한 강함을 손에 거머쥘 수 있는 정확한 방향성을 제시해 준 것이다.
“정말 고마워.”
오토가 다시금 엘리제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덕분에 정말 많이 배웠어.”
“고마워할 필요 없다.”
엘리제가 고개를 저었다.
“난 단지 길을 제시해 주었을 뿐이다. 깨달음은 오직 네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 것이니.”
“그래도.”
“오히려 내가 고맙다.”
“으응?”
“넌 가르치는 재미가 있는 사람이다. 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조금씩 발전해 나가는 게 모습을 볼 때마다 더없이 큰 즐거움과 기쁨을 느낀다. 넌 내게 그런 존재다. 내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사람.”
오토는 엘리제의 그 말을 듣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떠한 감정 같은 걸 느꼈다.
한편, 카미유와 카심은 곁에서 그런 오토와 엘리제를 지켜보며 어이 없어 했다.
“이게 맞는 겁니까?”
카심이 카미유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잘 모르겠다.”
카미유가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제3자들이 보기에 오토와 엘리제의 연애 방식은 어딘가 좀 이상하긴 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연애하면서 감정을 키워 나가면 참 좋을 텐데…….
“사랑을 키워 나가는 방식은 저마다 다른 것 아니겠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샤워나 하러 가지.”
“예, 카미유 경.”
카미유와 카심은 오토와 엘리제가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슬쩍 자리를 비켜 주었다.
* * *
오토는 엘리제와 수련하고, 밥 먹고, 차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잠자는 시간만 뺀 모든 시간을 함께했다.
평소 서로 바쁘다 보니 만날 기회도 적고, 함께할 시간도 얼마 없어서 이렇게 만날 때마다 최대한 많은 시간을 공유해야만 했던 것이다.
‘누가 보면 월간부부인 줄 알았네. 큭큭.’
오토는 자신과 엘리제의 관계를 그렇게 생각하며 키득거렸다.
주말부부도 아니고 월간부부라니.
“왜 웃나?”
차를 마시던 엘리제가 오토에게 물었다.
“아냐, 아무것도.”
오토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요즘 장벽 너머는 어때?”
“늘 똑같다.”
“항상 전투?”
“그렇다.”
“음.”
오토는 엘리제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면 곤란한데.’
엘리제는 주인공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아주 커다란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그녀의 주무대인 북부 장벽 너머 역시 세계의 운명을 결정지을 매우 큰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장벽 너머 정세가 계속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곤란해지는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오토는 미래에 벌어질 일들을 알고 있었고, 엘리제의 운명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엘리제와 엮이지 않았다면 모르되, 이미 이렇듯 관계를 맺게 된 이상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적당한 시기에 시나리오를 바꿔야 돼. 그러지 않으면….’
그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엘리제가 오토에게 물었다.
“생각이 많아 보인다.”
“많지.”
오토가 희게 웃으며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많을 수밖에 없지.”
“어떤 생각인가?”
“그런 게 있어.”
“내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생각인가?”
“그 누구한테도… 어?”
오토는 엘리제의 물음에 대답하다가 문득 든 생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뭐라고 했어?”
“뭐 말인가.”
“방금 한 말 말야.”
“……?”
“내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생각이라고 말하지 않았어?”
“그랬다.”
“무슨 의미야~?”
“그, 그건.”
엘리제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 그야. 우린 서로 약혼한 사이고. 앞으로 부부가 될 테니. 서로 간에.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헤헤헤.”
오토는 엘리제의 수줍어하는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아이를 많이 낳고 싶단 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니, 이런 대화에는 부끄러워할 줄이야.
“털어 놓고 싶지. 그러고 싶은데.”
오토가 미소를 지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런가?”
“나중에. 때가 되면 말해 줄게. 내가 가진 모든 비밀을.”
만약 정말로 엘리제와 이어진다면.
세계대전에서 살아남는다면.
그 후 이 세계에 계속 머무르게 된다면.
엘리제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게 되면.
그때가 되면.
오토는 엘리제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말도 해 줄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갑자기 본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게 명확해지면, 그때 이야기해 줄게.”
“알겠다.”
엘리제는 오토를 추궁하지 않았다.
오토를 존중했기에, 그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 * *
한편, 우르크 평원과 인접한 국가들은 오크들의 습격으로 인해 엄청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오크들이 인간들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인간들은 오크들을 두려워했다.
오크들에 대한 선입견과 인식이 워낙에 흉흉해서, 이미지 개선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크들은 타고난 전투력이 매우 강한 종족이다 보니 인간들로서는 상대하기가 버거운 게 사실이었다.
특히나, 강한 군사력을 지니지 못한 약소국들은 작은 오크 부족 하나에 쩔쩔매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약소국들은 즉시 에르제베트 왕국에 외교관을 보내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했다.
에르제베트 왕국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약소국들로서는 오크들의 난을 진압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하!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부디 대국으로서의 자비를 바라옵나이다!”
“저희 국왕 전하께서 바토리 전하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계시옵니다!”
약소국들의 외교관들이 일제히 바토리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바토리가 그들을 따로따로 만나주지 않았기에, 이렇듯 다 같이 모여서 읍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토리는 그런 약소국 외교관들을 매우 느긋하고 여유롭게 바라보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 배은망덕한 버러지들 같으니. 아쉬우니 찾아와서 싹싹 비는 꼬락서니가 아주 보기 좋구나. 호호호.’
바토리는 고소해서 크게 웃고만 싶었다.
이오타 왕국에 빌붙으려던 놈들이 오크들의 침공해 오자 헐레벌떡 달려와 비는 꼬락서니란 아주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그대들 왕들의 뜻은 잘 알겠다.”
바토리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과인은 최근 그대들 왕의 부덕한 모습에 크게 실망한 상태다.”
그러자 약소국의 외교관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며 싹싹 빌었다.
“전하! 그것은 오해이시옵니다!”
“어찌 그리 서운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본국의 국왕 전하께서는 늘 바토리 전하에 대한 존경과 존중을 보내오셨사옵니다!”
하지만 바토리는 지원군을 보내줄 생각이 단 1도 없었다.
‘안 그래도 저놈들의 국력이 커 가는 게 거슬렸던 참인데 잘 되었다. 네놈들은 아주 단단히 혼쭐이 나야 할 것이야.’
바토리는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약소국들의 피해는 물론이요, 오크들의 피해도 커질 터.
그렇게 되면 에르제베트 왕국의 영향력이 자연스럽게 더 커지리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가 아니겠는가?
어쩌면 이번 기회에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지정학적 약점을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남쪽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주변 세력들에 대한 정복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발판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내 당분간은 그대들의 국왕들이 어찌하는지 두고 볼 것이다. 그러니 돌아가라. 우리 에르제베트 왕국군은 그대들과 같이 배은망덕한 이들을 위해 피를 흘릴 수 없으니.”
바토리는 아주 냉정하게 애걸복걸하는 외교관들을 돌려보냈다.
주변국들이 제 발로 찾아와 불평등한 조약을 맺을 것을 청하고,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할 때까지 절대 도와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 * *
한편, 맥라렌 왕국의 국경 요새는 붉은 망치 부족의 공격을 받아 거의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버, 버텨야 한다! 어떻게든 버텨라! 이곳이 뚫리면 안 된다! 힘을 내라! 힘을 내!”
최후의 요새를 지키던 지휘관은 목이 터져라 소리치며 아군 장병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붉은 망치 부족 오크 전사들의 공격 앞에서, 맥라렌 왕국군은 속절없이 망하기만 할 뿐이었다.
“으악!”
“으아아아악!”
“사, 살려 줘어어어어어!”
맥라렌 왕국군 장병들의 입에서 처절한 절규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
지휘관의 입에서 절망 가득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최선을 다해 버텼지만, 이제 더 이상은 오크들을 막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ㅌ….”
결국, 지휘관의 입에서 후퇴 명령이 흘러나오려던 순간.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악!”
“캬아아아아아악!”
뜬금없이 나타난 와이번 무리가 오크들을 공격했다.
심지어, 개중에는 검은색 비늘을 지닌 블랙 와이번은 오크들을 향해 시퍼런 불길을 내뿜기까지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르릉! 쾅쾅!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저 멀리서 멧돼지를 탄 오크들이 달려와 요새를 공격하던 오크들을 공격했다.
“이, 이 무슨!”
지휘관은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나타난 와이번들은 무엇이며, 오크들이 왜 같은 오크들을 공격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