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6화
사실 오토 역시 바토리와 겨뤄보고 싶었다.
바토리는 군주들 가운데 매우 강한 무력을 보유한 무인이었고, 그런 만큼 좋은 상대가 될 게 분명했다.
그러나 바그람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바토리는 반드시 양보해야만 하는 상대였다.
바그람은 군주의 지위를 박탈당한 게 아니었고, 아직 그 잠재력이 살아 숨 쉬는 상태.
그런 바그람이 바토리와의 대결에서 승리한다면, 엄청난 양의 경험치를 먹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성물인 차우차우와 아스트라의 도끼를 얻은 것만큼이나 실력이 발전해서, 바그람에게 있어 바토리와의 대결에서 승리한다는 건 엄청난 기회였던 것이다.
그래서 오토는 바그람에게 바토리를 양보했던 거고.
“괜찮겠습니까?”
카미유가 오토에게 물었다.
“바토리는 강한 상대입니다. 지금 바그람으로서는….”
“나도 알아.”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토리가 훨씬 강하다는 거.”
“그런데 왜 바그람에게 바토리를 맡기십니까? 차라리 제가….”
카미유 역시 천둥산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뤘던 터라, 자신감이 있었다.
물론 바토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충분히 승산이 있을 정도로.
“아니.”
오토가 고개를 저었다.
“바그람이 직접 상대해야 돼.”
“하지만….”
“이겨.”
오토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 결투는 무조건 바그람의 승리로 끝나.”
“그걸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그냥 알아.”
“……?”
“그리고 바그람한테는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있고, 목표 의식이 있어.”
“음.”
“대결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 그러니까, 이길 수밖에 없어. 온 세상이 바그람을 향해 웃어 주는데, 실력 차이가 좀 난다고 해서 질 리가 없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운 말이야, 운.”
“……?”
“누가 세고 누가 약하고? 물론 중요하지. 근데 싸움이란 건 실력이 다가 아니잖아. 그날 컨디션, 상황, 마음가짐, 상성 등등. 여러 가지 요소에 의해 갈리기 마련이지. 비벼보지도 못할 압도적인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카미유가 오토의 의견에 동의했다.
때로는 목숨을 건 결투에서 운도 실력으로 작용할 때가 있다는 걸 경험으로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토가 바그람의 승리를 장담했던 근거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100퍼센트 이기지.’
오토가 아는 정보에 의하면, 바그람과 바토리의 대결은 무조건 바그람의 승리로 끝나게 되어 있었다.
백이면 백.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싸워도 바그람은 바토리와의 대결에서 승리할 ‘예정’ 이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래서 오토는 바그람을 믿고, 근처 바위에 걸터앉아 조용히 대결을 지켜보았다.
만에 하나.
혹시나 모를 ‘변수’ 에 대비하면서.
* * *
오토의 예상과는 다르게, 바그람과 바토리의 대결은 바토리의 압승으로 전개되었다.
“이 더러운 가축 놈이!”
“취이익!”
“어딜!”
“취, 취익!”
“감히!”
“취이익!”
“과인에게!”
“취이이이이익!”
“덤비느냐!”
“취이익!”
바그람이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바토리의 검은 그야말로 강력했다.
놀랍게도, 검에 실린 파괴력이 바그람이 휘두르는 아스트라의 도끼보다 강력했던 것이다.
스으으으!
게다가 바토리 역시 강자들만의 특권인 오러 블레이드를 구사하고 있어서, 바그람이 밀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스트라의 도끼에서 뿜어져 나온 전류로 오러 블레이드에 간신히 대항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네놈부터 죽이고.”
어느새 바그람에게 다가선 바토리가 검을 휘둘렀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까지 죽일 것이다.”
“취이이익!”
“가축 주제에 어딜!”
바그람은 겨우겨우 버틸 뿐이었다.
바토리는 실력으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바그람을 압도했다.
어려서부터 검을 잡았고, 이제는 어느덧 중년에 접어들어 경험까지 갖춘 바토리의 실력은 그야말로 발군이었다.
“취이이익! 취이이익!”
바그람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나왔다.
어느새 바그람의 몸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비록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자잘한 상처들을 입으며 온몸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보기에는 바토리가 바그람을 마치 회라도 뜨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네놈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취, 취이익!”
“이 버러지 같은 가축 주제에!”
“취이익!”
“언제까지 네놈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취이이이익!”
바그람은 단 한 순간도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했다.
그러던 중.
촤아아!
바토리의 검이 바그람의 가슴 정중앙을 갈랐다.
푸화아아아아아악!
시뻘건 피가 확 튀어 오르고, 바그람이 수십여 미터를 날아가 눈밭을 굴렀다.
바그람의 피가 하얀 눈밭을 붉게 물들였다.
“커헉! 컥!”
치명상을 입은 바그람이 피를 토해내며 고통스러워했다.
뽀드득, 뽀드득.
바토리가 쓰러진 바그람을 향해 다가섰다.
“네놈.”
바토리가 오토를 돌아보았다.
“가축을 도축하고 난 뒤에는 네놈의 목을 따 줄 것이다.”
“글쎄.”
오토가 듣기 싫다는 듯 귀를 후비적거렸다.
“지금 그런 말을 할 입장이 아니신 거 같은데.”
“뭐라?”
“저기 보라고.”
오토가 바토리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
바토리는 바그람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걸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다시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취익… 천둥 발굽 부족은… 쓰러지지… 취익… 않는다… 절대로… 쓰러질 수… 없다… 취이익….”
비록 치명상은 입었지만, 다시 몸을 일으킨 바그람의 기세는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파직! 파지지지직!
아스트라의 도끼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류도 엄청나게 강해져 있기까지 했다.
‘광폭화.’
오토는 바그람의 변화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사실 바그람이 익힌 마나운용법은 아스트라의 도끼와 만났을 때, 특정 패턴을 발동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광폭화란 생명력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졌을 때, 전투력이 최소 3배 이상 증가하는 기술.
또한, 생명력의 재생이 엄청나게 빨라져 어지간한 중상을 입어도 순식간에 회복했다.
즉, 바토리는 바그람에게 잠재되어 있는 광폭화라는 힘을 일깨워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 바로 그거지.”
오토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바그람의 승리를 점친 근거에는, 광폭화의 발현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이다.
“취이이이익….”
바그람이 온몸에서 허연 증기를 뿜어내며, 아스트라의 도끼를 치켜들었다.
“우리 오크들은… 취익… 인간들의… 취익… 가축이 아니다!!!”
그 순간.
번쩌어어어어어억!
새하얀 섬광이 세상을 뒤덮고.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수십여 발의 번개가 바토리를 때렸다.
“으아아아아악!”
바토리가 비명을 토하고.
“취이이이이이이익!”
바그람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바토리에게 달려들어, 아스트라의 도끼날을 미친 듯 휘둘렀다.
콰앙!
쾅!
아스트라의 도끼가 가히 엄청난 위력을 품은 채 바토리를 노렸다.
“이이익!”
바토리가 황급히 검을 세워 바그람의 공격을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광폭화를 발동시킨 바그람은 조금 전까지 밀리기만 하던 바그람이 아니었다.
지금의 바그람은 바토리를 힘으로 압도하는, 우르크 평원의 지배자이자 유일무이한 오크 군주였다.
“취이이이이이익!”
바그람이 더욱 거세게 바토리를 몰아붙였다.
쾅! 콰앙!
쩌어어어엉!
아스트라의 도끼가 연신 바토리의 검을 강타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쨍그랑!
바토리의 검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바그람이 휘두르는 아스트라의 도끼날에 실린 파괴력을 이기지 못하고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이, 이런 말도 안 ㄷ….”
그때.
촤아악!
아스트라의 도끼가 바토리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
바토리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스트라의 도끼가 머리를 세로로 쪼갠 것으로도 모자라서, 가슴팍까지 갈라 버린 것이다.
“……!”
“……!”
“……!”
이 믿지 못할 광경에 에르제베트 왕국의 근위기사들은 너무나도 놀라 얼어붙고 말았다.
그 바토리가, 결투가 벌어지던 내내 주도권을 잃지 않았던 그녀가 이렇듯 허무하게 패배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털썩!
바토리의 시체가 눈밭을 나뒹굴었다.
털썩!
그와 동시에 바그람도 허물어졌다.
“취익, 취이익….”
바그람은 거친 숨을 토해내면서, 아스트라의 도끼를 지팡이 삼아 겨우 몸을 지탱해냈다.
시종일관 숨도 못 쉬고 쥐 잡듯이 당하기만 하다가, 겨우 광폭화를 발동시켜 거머쥔 승리였다.
그러니 바그람으로서는 힘겨워 할 수밖에.
“수고했어.”
오토가 바그람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취익…!”
바그람이 오토가 내민 손을 맞잡고 몸을 일으켰다.
“정말… 취익… 고맙다.”
바그람이 오토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친구 덕분에… 취익. 승리했다. 이제 우리 오크들은….”
“아니.”
오토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안 끝났어.”
“취, 취익? 그게 무슨 소리냐? 사악한 인간 여왕을 죽였다. 취익. 이제 우리 오크들은….”
“미안한 말인데 이제부터 시작이야.”
“취익…?”
“말 그대로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오토가 널브러져 있는 바토리의 시신을 가리켰다.
“취익?!”
바그람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웅!
어느새 생성된 검은 블랙홀이 바토리의 시신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저, 저게 뭐냐! 취이익!”
“곧 부활할 거다.”
“취익?”
“지금보다 몇 배로 강해져서 다시 나타날 거야. 사악한 언데드 부패여왕으로서.”
오토가 담담하게 말했다.
* * *
본래 바그람과 바토리와의 일대일 대결은, 바그람의 시나리오에서 중반부에 해당하는 이벤트에 불과했다.
아스트라의 도끼를 얻은 바그람은 이 이벤트에서 광폭화를 발동시키게 되고, 바토리에게 100퍼센트 확률로 승리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100인의 군주들이 으레 그렇듯, 바토리 역시 고유의 성물을 지니고 있었다.
[부패한 심장]
부패한 심장이여.
썩은 피를 뿜어낼지어다.
- 고대의 흑마법사
설명 : 고대의 흑마법사가 만들어낸 사악한 심장.
본래 주사기 안에 든 용액이며, 이를 혈관에 주사하면 심장이 부패의 저주에 감염됩니다.
부패의 저주 바이러스는 조용히 잠들어 있다가, 사용자가 사망하면 비로소 활동을 개시합니다.
단, 사용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부패의 저주 바이러스가 활동하지 않습니다.
분류 : 성물
등급 : ★★★★
효과 : 사망 시 안전한 장소로 이동한 후 부패한 존재로 부활합니다.
바토리는 전체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부터 부패의 저주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즉, 성물이지만 물건이 아닌 바이러스로서 처음부터 심장 속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바그람과의 결투에서 패배한 바토리는 안전한 장소로 이동되고, 수일 내로 부패한 심장을 지닌 부패여왕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후 부패여왕은 오크 군주가 된 바그람과 또다시 대립하며, 시나리오를 계속 이어나가게 되어 있었다.
말인즉슨, 바그람과 바토리의 숙명의 대결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란 소리였다.
“곧 부활할 거야.”
“취익? 그게 정말인가?”
“그래.”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제베트 왕국과의 싸움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야. 그러니까 빨리 성난 늑대 부족을 토벌하고, 우르크 평원을 장악해. 그런 뒤 왕국을 세우고 오크 군주가 돼라. 그래야만 에르제베트 왕국을 상대할 수 있어.”
“알겠다, 취익.”
바그람이 오토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바토리가 부활한다니.
에르제베트 왕국과의 싸움이 이게 끝이 아니라니.
그렇다면, 바그람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오크 군주가 되어 우르크 평원의 세력을 키우고, 나아가 더 강력하게 부활한 부패여왕과 맞서 싸우는 것이 바그람의 숙명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