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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어억!”

카미유에게 명치가 꿰뚫린 오토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입을 쩍 벌린 채 고통스러워했다.

“지금 미치셨습니까? 예?”

카미유가 아주 작은, 그러면서 낮게 깔린 목소리로 오토에게 으르렁거렸다.

“죽고 싶어 환장하신 것 같습니다만.”

“나, 나도 모르게 그만. 으윽.”

오토는 카미유를 탓하지 않았다.

외상이 되냐는 질문에 몸이 반사적으로 차용증을 작성할 종이를 꺼내 들었을 뿐이지, 결코 의도한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래서 사람 습관이 무섭다니까. 으으윽.’

오토도 스스로의 행동을 깊이 반성했으므로, 카미유의 갑작스러운 하극상에 대한 불만은 단 1도 없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차용증을 쓰겠는가?

“나중에 천천히 갚아 주세요. 으윽.”

오토가 욱신욱신 명치를 문지르며 엘리제를 향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차용증은 안 써도 되나?”

“엘리제 님과 저는 약혼한 사이잖아요. 우리 사이에 차용증 같은 걸 써 봐야 뭐합니까. 이런 건 그냥 서로 신뢰로서 믿고 가는 거죠. 의리로요.”

“신뢰와 의리라.”

“예…?”

“좋은 말이군.”

이상한 데서 흡족한 표정 좀 짓지 마요.

핀트가 이상하잖아요, 핀트가.

“반드시 갚도록 하겠다.”

결연한 표정 뭔데?

“아무튼, 오늘은 늦었으니 취침에 들었다가 내일 이야기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올리브 시녀장님.”

오토가 옆을 슥 돌아보았다.

“음!”

올리브는 엘리제를 보자마자 크게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이오, 엘리제 양.”

“올리브 시녀장님.”

엘리제와 올리브가 서로 안면이 있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엘리제는 아라드 제국 최고의 명문가인 잘츠부르크 가문 출신.

올리브는 아라드 제국 황궁의 시녀장 출신.

같은 아라드 제국 출신이니만큼, 오고 가며 서로 안면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대가 우리 전하의 약혼자셨소? 썩 그대의 눈에 차는 남자는 아니었을 터인데?”

“조부님들끼리의 약속입니다.”

“그렇구려. 그렇다면 어쩔 수가 없지. 일단 서로 만나는 봐야겠지.”

“그렇게 됐습니다.”

“정 마음에 안 들거든 그때 가서 치워 버리든 하면 될 터이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대가 어련히 잘할 테니.”

엘리제는 올리브의 살벌하기 짝이 없는 발언에 대답하지 않고는, 그저 희게 웃었다.

‘뭐, 뭐야! 결국 죽이려고?’

오토는 그 미소에 담긴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에,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시중을 들어주겠소. 따라오시오.”

“예.”

엘리제와 올리브가 떠난 후.

털썩!

긴장이 탁! 풀린 오토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단기간에 너무 큰 심적 압박을 받은 바람에, 그만 진이 빠져 버리고만 것이다.

엘리제가 피칠갑을 한 상태로 나타난 것부터가 심장이 쫄깃해지게 만드는 시각적 공포였으므로….

* * *

다음 날 아침.

아침 일찍 일어난 오토는, 샤워를 마치자마자 즉시 훈련장으로 나가 아침 체력단련에 나섰다.

엘리제가 숙제(?)를 검사하기 전에 미리 몸이라도 좀 풀어 두려는 것이다.

“멋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멋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맛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멋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저 멀리 연병장 쪽에서 병사들이 부르는 군가 소리가 들려왔다.

늘 그렇듯 병사들 역시 아침 체력 단련으로 군가를 부르며 구보를 실시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후우!”

오토는 차가운 겨울날의 아침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시며, 남은 졸음을 떨쳐내었다.

‘이렇게 좋은 공기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하니까 호연지기가 절로 솟아오르네.’

이 세계에 온 후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라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게 되었다는 거였다.

평범한 현대인이었던 오토로서는 아무래도 운동량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딱히 헬스에 진심인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런저런 아웃도어 스포츠를 즐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일 년에 두어 번 친구들과 함께 동네 뒷산에 등산이나 가는 정도.

하지만 이 세계에 온 이후로는 매일 아침 강도 높은 체력단련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고, 어느덧 그게 습관으로 굳어졌다.

순수 체력 하나만큼은 현대인 김도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향상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단 스트레칭부터 좀 하고 구보부터 뛰자.’

그런 생각으로 훈련장에 도착한 오토.

“어?”

그런데 엘리제가 땀에 흠뻑 젖은 채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스으으!

열이 얼마나 나는지, 몸에서 허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정도.

“왔나?”

“아, 예.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 체력단련을 하려는 건가?”

“네.”

“좋은 자세다.”

엘리제가 미소를 지었다.

“아침 체력단련이야말로 하루를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일과다. 아, 일어나서 모포를 개고 침대는 정리했겠지?”

“무, 물론이죠! 하하! 하하하!”

사실 오토는 이부자리를 직접 정리해본 적이 없었다.

오토의 전담 시종·시녀들의 일이었기에,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모포를 개고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건 하루의 첫 과업을 승리로 시작하는 셈이다. 그러니 귀찮더라도 직접 하도록.”

“네에….”

“난 이미 체력단련을 마쳤다. 몸 풀고 들어오도록. 아침 같이 먹겠나? 기다릴 테니.”

“괜찮으시겠어요? 적어도 1시간 이상은 걸릴 텐데.”

“검을 닦고 기름을 먹일 생각이었다.”

“그럼 체력단련 마치고 가겠습니다.”

“이따 보자.”

엘리제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대단하네.”

오토는 엘리제의 부지런함에 감탄했다.

현재 시각이 아침 6시 30분.

그런데 엘리제는 벌써 체력단련을 마치고, 샤워 및 개인정비를 하러 가고 있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한 1시간 전에는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세계관 최강자도 새벽같이 일어나서 부지런하게 하루를 시작하는구나. 아침 체력 단련도 엄청나게 강도 높게 하고.’

엘리제는 천재.

재능과 잠재력에 있어서는 이 세계에서 독보적인 존재.

별 탈 없이 시간만 흘러도 무난하게 무적의 경지까지 올라갈 인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같이 일어나 수련을 한다는 건 정말이지 놀랄 만한 일이었다.

누가 천재는 노력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엘리제는 누구보다 노력하고, 누구보다 부지런했다.

이런 그녀가 세계관 최강자가 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리라….

‘보고 배우자. 본받을 만한 점은 본받아야지.’

오토는 엘리제를 통해 더욱 부지런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천천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 * *

1시간 30분 뒤.

오토는 엘리제와 더불어 아침 식사를 했다.

‘식단 한번 엄청나게 건강하네.’

오토는 엘리제의 접시를 보고는, 또다시 감탄했다.

삶은 달걀, 구운 소고기, 여러 종류의 야채, 고구마, 그리고 쌀밥.

소스는 아예 없었고, 약간의 소금과 후추를 뿌려 먹는 게 전부였다.

식단 자체가 영양이 균형 있게 잡혀 있고, 당분과 지방이 적어서 건강에는 이보다 더 좋아 보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다이어트 식단은 결코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엘리제가 먹는 양이 어지간한 남성의 식사량보다 족히 2배는 많았다는 것.

엘리제의 하루 활동량은 어지간한 운동선수들 뺨치는 수준이었기에, 식사량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긴. 식단, 중요하지. 아무리 마나를 이용해 인간의 한계를 쉽게 뛰어넘을 수 있어도, 그 근본은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근력과 지구력이니까.’

오토는 엘리제의 식단을 통해 또 하나를 배웠다.

‘본받을 점이 많은 분이야.’

비단 검술뿐 아니라 생활습관부터가 타의 모범이 되는 존재.

엘리제는 곁에 머무는 것 하나만으로도 오토에게 있어 가르침을 내려주고 있었다.

자기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새겨주는….

“내가 너무 많이 먹는 것 같나?”

“절대 아닙니다!”

오토는 엘리제가 툭 던진 질문에 황급히 손사래를 치면서 대답했다.

“아까부터 물끄러미 보고 있기에 물어본 거다.”

“하하하.”

“이렇게 많이 먹지 않으면 살이 계속 빠진다. 장벽 너머에서는 일부러 기름진 음식들을 많이 먹기도 한다. 지방량이 너무 적으면 건강에 그리 좋지 않을뿐더러, 추위에 견디는 저항력도 약해진다. 작전에 나가면 끼니를 거를 때도 많아서.”

뭐지?

부끄러워하는 거 같은데?

‘하긴. 여자는 여자니까.’

오토는 엘리제의 말이 길어진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했다.

아무래도 여자의 식사량이, 그것도 아침식사가 성인 남성의 2배는 족히 넘는다는 건 민망해할 법도 했으니까.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너도 맛있게 먹어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티타임까지 가진 오토와 엘리제는, 소화를 충분히 시킨 뒤 다시 훈련장으로 향했다.

‘뭔가 보여 줘야 해.’

오토는 집중력을 끌어올리고, 정신을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비록 이래저래 바쁘다는 핑계로 수련을 제대로 하지 못해 벼락치기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엘리제가 실망할 테고, 그 뒷감당은 어마어마할지도 몰랐다.

“와라.”

“예, 갑니다.”

오토가 엘리제의 부름에 목검을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카미유가 걱정스레 오토에게 속삭였다.

“껄껄껄! 뺀질이 놈아! 오늘도 약혼녀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겠구나! 껄껄껄!”

소문을 듣고 귀신같이 달려온 카이로스가 저 멀리서 소리쳤다.

와그작, 와그작!

팝콘까지 들고 온 걸 보면, 오토가 두들겨 맞는 걸 어지간히도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집중.’

오토는 방해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성장할 기회야. 이런 배움은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어. 잘 보고 배워야 해.’

대련에 임하는 오토의 마음가짐은 달라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엘리제의 손에 꼼짝없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난번 만남에서 가르침을 받고 <무적검술>의 성취가 올라가고.

이번 만남에서 엘리제가 자기관리를 철두철미하게 하는 걸 보면서, 마음가짐을 바로 세우게 되었다.

즉, 엘리제를 사신[死神]이 아닌 더없이 훌륭한 스승으로서 받아들인 것이다.

심기일전[心機一轉].

마음가짐을 달리 먹으니 대련에 임하는 자세도 달라졌다.

위축되어 있던 움직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지면서, 더 침착해진 것이다.

“갑니다.”

오토가 <무적검술>을 전개했다.

텅! 터엉!

엘리제의 목검과 오토의 목검이 서로 맞부딪히며, 둔탁한 소리가 훈련장에 울려 퍼졌다.

엘리제는 지난번처럼 오토의 실력에 맞추어 힘 조절을 해 주었다.

그러던 중.

스윽.

오토의 목검이 엘리제의 안쪽 허벅지를 베고 지나갔다.

“어?”

오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스스로 놀랐다.

설마하니 엘리제를 상대로 시작부터 유효타를 성공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결코 운이 아니었다.

왜?

오토가 의식적으로 노리고 가한 공격이었으니까.

무작정, 무의식적으로 휘두른 게 아니었던 것이다.

“확실히 지난번보다 조금은 는 것 같군.”

엘리제가 미소를 지었다.

“배운 걸 잊지 않고 잘 활용했다. 지난달보다 아주 조금은 더 나아간 것 같군.”

“그게 정말이신가요?”

“확실히 늘었다. 넌 배움이 빠르다.”

“헉!”

오토는 엘리제로부터 칭찬을 듣자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벼락치기를 한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던 모양.

“좀 더 강도를 올려도 될 것 같군.”

“네…?”

“이번엔 내가 먼저 가겠다.”

엘리제가 오토를 향해 목검을 무심하게 휘리릭 휘둘렀다.

‘슬쩍 흘리고. 반ㄱ…’

누구나 그럴 듯한 계획이 있다.

빠악!

처맞기 전까지는.

“악!”

오토가 비명을 내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수련 강도가 올라가자마자 단 일 합 만에 머리통이 깨지고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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