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2화
“네가 말하는 그 게임 속 세상이 아니란다.”
“그럼… 현실인 겁니까?”
“그럼 가짜겠느냐? 껄껄껄!”
쿠란이 웃었다.
“오토야. 세계와 세계는 알게 모르게 서로 연결되어 있단다.”
“……!”
“네가 살던 세상의 그 게임이라는 놀이가 우리 세계의 이 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는 건 우연이 아니란다.”
“우연이… 아니라고요?”
“그 놀이를 만든 사람들의 집단의식이 무의식적으로 우리 세계의 이 시대를 묘사한 것 같구나.”
“그게 가능합니까???”
“충분히.”
쿠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드넓은 우주와 무수히 많은 차원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진단다. 그걸 머리로 이해하려 하면 안 된단다.”
“아하?”
“간혹 세계와 세계 사이에 미세한 틈이 벌어지는데, 그때 어떠한 파장이 들어맞으면 오토 네가 겪은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
“음.”
“그런 경우가 드물긴 해도 수천 년에 한 번쯤은 일어나는 일이니까, 이 세계가 현실이 아니라거나 네 녀석이 미친 게 아니라는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구나.”
“그럼….”
오토가 다시 쿠란에게 물었다.
“제가 왜 이 세계에 오게 된 걸까요?”
“그야 나도 모르지.”
쿠란이 어깨를 으쓱 했다.
“이 우주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는 곳에 접속한다면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
“절대 그런 행동은 하면 안 된단다.”
오토는 쿠란의 말에 대학살의 서를 이용해 허공법계에 접속해 볼까 생각했다가 뜨끔! 했다.
“그곳에 자주 들락거리다 보면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된단다.”
“아시는군요.”
“알다마다. 명색이 드래곤인데 그런 것도 모르겠느냐.”
“하하하….”
“내가 왜 이 세계에 오게 되었는지는 네 스스로 알아내렴. 살아가다 보면 어느 날 깨닫게 될 거란다.”
“명심하겠습니다.”
오토는 쿠란의 조언대로 허공법계에 접속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카이로스가 수도 없이 경고했듯이, 그곳은 이 우주의 모든 정보가 담긴 곳.
그런 곳을 들여다 봤자 좋을 게 없으리라는 건 누구나가 예상할 수 있는 일일 테니까.
“왜 이 세계로 왔는지도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쿠란이 오토에게 조언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어찌 보면 더욱 중요한 거란다.”
“어떻게 살아가느냐….”
“이유가 있어 태어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게지.”
“……!”
“아무 걱정 말고 주어진 삶에 충실하다 보면 아무 문제없을 거란다.”
“그런가요?”
“벌어질지 벌어지지 않을지 모르는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예를 들면… 어느 날 갑자기 네가 온 세계로 다시 돌아가는 일 같은 것 말이다.”
“……!”
“그게 두려워서 지금 이 세계에서의 삶을 주저할 필요는 없단다.”
오토는 정곡을 찔린 것 같은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게 오토가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마음 편히 먹고, 현재에 집중하렴. 그게 네가 행복해지는 길이란다.”
“어르신….”
“오토 너는 반드시 행복해질 수 있을 게야. 너는 착하고 똑똑한 녀석이니 말이다.”
오토는 쿠란의 조언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세계가 단순히 게임 속 세상이 아니며, 자신이 미친 게 아니라는 답만 들었을 뿐인데도 마음이 엄청나게 편해지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오토가 쿠란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어르신 덕분에 마음이 좀 편해졌어요.”
“껄껄! 다행이로구나. 이 늙은이의 조언에 오토 네 마음이 편해졌다니.”
“아닙니다. 정말로 감사드려요.”
오토는 정말로 마음 속 한편에 자리했던 불안감이 상당부분 해소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주저하지 마라.
벌어질지 벌어지지 않을지 모르는 일을 미리 걱정부터 하지 마라.
현재에 충실해라.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였지만, 지금 오토에게는 가장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던 것이다.
* * *
오토는 엘리제가 북부 장벽 너머로 돌아가기 전에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때마침 무더운 여름인지라, 오토는 엘리제에게 수영을 제안했다.
이 세계의 여름은 엄청나게 더워서, 차가운 음료를 마시며 물놀이를 한다거나 하는 방법으로 더위를 이겨내는 수밖에 없었다.
왜?
에어컨이 없었으니까.
물론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주변 온도를 낮출 수도 있고, 냉기를 품은 마정석으로 실내 온도를 낮게 유지할 수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에어컨에 비해 비효율적이었고, 실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수영은 여름에 즐기는 대표적인 놀이기도 했고.
“우리 수영이나 할까?”
“이제 수영할 줄 아는 건가?”
“그러엄!”
오토가 으스대었다.
“이제 완전히 물개지, 물개.”
“열심히 수련한 모양이군.”
“…….”
“좋은 자세다.”
엘리제는 오토가 물 공포증을 극복하고 수영을 배웠다는 말을 수련이라고 해석했다.
‘엘리제한테 수련이 아닌 건 대체 뭘까?’
이쯤 되면 생활이 곧 수련이고, 수련이 곧 생활인 경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좋다.”
엘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늘 추운 곳에만 있었으니 이렇게 따뜻한 곳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하하… 하하하.”
“그럼, 이따 수영장에서 보자.”
“응.”
수영장으로 가는 길.
“너무 노골적이신 거 아닙니까?”
“으응?”
“수영이라니. 너무 속이 뻔히 보이는….”
“그런 거 아냐!!!”
오토가 카미유의 말에 소리를 빽! 질렀다.
“더워서 그냥 물놀이나 하려는 거지! 내가 변태인 줄 아냐!”
“아니었습니까?”
“아니야!!!”
오토는 카미유가 자신을 변태라고 오해하자 씩씩대며 쿵쾅쿵쾅 발걸음을 옮겼다.
“흥. 누굴 음흉한 사람인 줄 알아.”
양심에 손을 얹고, 오토는 그런 의도에서 수영을 제안한 게 아니었다.
‘여유를 선물해 주고 싶어.’
오토는 엘리제가 느긋하고 평온하게 휴가를 보내기를 원했고, 그런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엘리제는 저 혹독한 환경의 북부장벽 너머에서 늘 전투를 치르기 일쑤.
오토는 그런 엘리제가 휴가 때만이라도 조금은 편안한 시간을 갖기를 원했던 것이다.
“근데 카미유는 수영 안 해?”
“근무 중입니다만.”
“그런 게 어딨어. 갑옷 벗고 검 내려놓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와.”
“괜찮습니다.”
“좀 쉬라니까.”
“근무태만입니다.”
“으으.”
오토가 답답하다는 듯 치를 떨었다.
“하여간 앞뒤 꽉 막혀 가지고. 왕인 내가 괜찮다는데 고집을 부ㄹ….”
바로 그때.
사라락.
수영복을 갖춰 입은 엘리제가 수영장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
“……!”
“……!”
모두가 놀랐다.
오토도.
카미유도.
시종·시녀 할 것 없이 모두 다.
‘저, 저게 사람이야?!’
오토는 수영복을 입은 엘리제의 모습을 보고 그만 뇌정지가 오고야 말았다.
수영복을 입은 엘리제는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또한 고혹적이었다.
대륙에서 제일가는 미녀가 수영복을 입은 모습이란 정말이지…….
주르륵.
오토의 코에서 코피가 흘러나왔다.
“젠장! 뭐 하시는 겁니까!”
카미유가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코피를 닦아 주었지만, 오토는 그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듯 그저 멍하니 엘리제를 바라볼 뿐이었다.
오토는 엘리제와 더불어 수영을 즐기고, 차가운 음료를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정말이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수영이 끝나고 나란히 침대에 누워 마사지까지 받으며 오래간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즐겼다.
으득!
으드득!
“꾸웨에에에에에엑!!!”
“엄살 피우지 마십시오.”
“시, 시녀장님 제발! 컥! 으어어어어어억!”
“이래야 풀립니다.”
물론 오토는 시녀장 올리브가 마사지를 해 준 덕분에 저승길 문턱까지 구경하고 와야 했지만.
* * *
그날 밤.
오토와 엘리제는 식사를 마친 후 왕궁을 산책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엘리제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오래간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한 느낌이다.”
“으응?”
“좋은 시간을 선물해 줘서 고맙다.”
“하하하. 뭘 이런 걸 가지고.”
오토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내심 뿌듯했다.
‘자주자주 이렇게 해 줘야지. 헤헤헤.’
오토는 엘리제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게 너무 좋았다.
“그리고.”
엘리제가 덧붙였다.
“약혼자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라서 더 좋은 것 같다.”
“……!”
“항상 즐겁다, 너와 함께 있으면.”
“그, 그래?!”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어떤 생각?”
“언젠가 우리가 늘 함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닌 게 아쉬울 뿐이다.”
오토는 엘리제의 말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전부터 그랬다.
첫 만남이 조금 험악했을 뿐이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오토와 엘리제와 관계는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나도 같은 마음이야.”
오토는 처음으로 엘리제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했다.
“함께했으면 좋겠어. 그러고 싶어.”
“그게 정말인가?”
“으응?”
“여태 한 번도 그런 얘기 한 적 없지 않았나.”
엘리제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간 엘리제는 비록 서툴지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 왔는데, 오토는 거기에 대해 이렇다 할 대답을 내어놓은 적이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벌어질지 벌어지지 않을지 모르는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예를 들면… 어느 날 갑자기 네가 온 세계로 다시 돌아가는 일 같은 것 말이다. 그게 두려워서 지금 이 세계에서의 삶을 주저할 필요는 없단다.’
오토는 쿠란의 조언을 듣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했던 불안감을 떨쳐 버린 뒤였다.
“솔직히 말하면.”
오토가 엘리제에게 말했다.
“난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사람이야.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어.”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야.”
오토가 엘리제에게 자신이 가진 가장 큰 비밀에 대해 털어놓았다.
엘리제는 그런 오토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었다.
오토의 이야기가 끝난 후.
“그래서 그랬던 건가.”
엘리제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말했다.
“항상 너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어딘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
“어떤…?”
“마치 언젠가 사라질 사람처럼, 나와 거리를 두는 느낌이었다.”
“그랬구나.”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 같다.”
엘리제는 그렇게 말하면서, 오토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리고는 오토를 살포시 안아 주었다.
“그간 얼마나 힘들었던 건가.”
“……!”
“마음이 편치 않았을 텐데. 많이 외로웠을 것 같다.”
오토는 엘리제가 자신의 마음을 다독여주자 엄청나게 큰 위안을 얻었다.
“난 상관없다.”
“뭐가…?”
“언젠가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게 약혼자 너의 의지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의한 것이라면.”
엘리제가 말했다.
“내가 널 찾아갈 거다.”
“……!”
“약속하겠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널 찾아내기로. 나는 절대로 널 잃지 않을 거다. 그러니 내 곁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토는 그 말을 듣고 엘리제와 눈을 마주쳤다.
엘리제도 그런 오토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윽.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오토와 엘리제가 서로를 향해 다가가 입술을 포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