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레스는 오토의 곁에 머물며 그를 극진히 간호해줬다.
오토는 금세 컨디션을 되찾았고, 눈에 띄게 건강이 좋아졌다.
사실 간호랄 것도 없었다.
앙겔레스는 저주를 건 장본인.
오토가 잠든 사이 저주의 유효기간을 슬쩍 늘려주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오토는 25번째 생일인 1월 1일을 무사히 넘기고 생존에 성공했다.
‘역시 죽어도 저주를 풀어주진 않네. 어휴. 이 사악한 것.’
오토는 앙겔레스가 저주를 풀어주지 않고 강도를 조절하는 걸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앙겔레스가 오토의 저주를 풀어주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보험.
지금이야 쓸개고 빼줄 것처럼 굴고 있었지만, 앙겔레스는 수틀리면 언제든 오토를 죽여 버리고도 남을 악마였다.
지금은 오토와 썸을 타는 사이니, 일단은 살려둔 것이지만, 혹시나 사이가 틀어지게 되면 다시 저주를 발동시키려는 것이다.
‘사랑은 개뿔. 이성을 그냥 장난감으로 보는 싸이코패스지.’
오토는 그런 앙겔레스의 성향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학을 떼었다.
하기야, 그런 사이코패스니까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의 아들―심지어 죽이려고 저주까지 걸었던―에게 반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날 밤.
오토는 생일파티를 여는 대신 앙겔레스와 시간을 보냈다.
“생일 축하해요.”
“정말 고맙습니다.”
앙겔레스의 축하에 오토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제 곁을 지켜줘서.”
“별말씀을요.”
“아닙니다. 당신은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오토가 앙겔레스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는 반지를 내밀었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어머!”
“이 반지는… 돌아가신 제 어머니의 결혼반지입니다.”
“저, 정말요?!”
“제 아버지께서 어머니와 결혼할 당시에 선물하신 반지입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이 반지를 물려주셨습니다. 훗날 결혼하고픈 여성에게 청혼할 때 쓰라고 하셨지요.”
“아…!”
“부디 제 청혼을… 받아주시겠습니까?”
그 순간.
‘눈빛 보소.’
오토는 앙겔레스의 눈에 순간적으로 소름 끼치는 광기가 번뜩였다가 사라지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오토의 생각은 아주 정확하게 맞았다.
‘깔깔깔깔!’
앙겔레스는 자신에게 어머니의 반지를 바치며 청혼해오는 오토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득의양양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 개 같은 년아~ 보고 있니~? 니 아들이 니 반지를 내게 바치고 있는 걸~? 깔깔깔깔~!’
오토가 내민 반지는 앙겔레스가 그토록 원하던 거였다.
저 반지가 오토의 어머니가 아닌 자신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자리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25년이란 긴 시간이 지나 결국 이 반지가 자신에게로 오게 되었으니, 앙겔레스로서는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오릭스, 보고 있어? 당신이 내게 주지 않았던 결혼반지를 당신 아들이 내게 줬어. 호호호! 그러기에 비참한 꼴을 안 당하려거든 내 사랑을 받아줬어야지!’
앙겔레스는 그런 음흉하고 사악한 생각을 하면서, 오토를 향해 슬쩍 왼손을 내밀었다.
“조, 좋아요.”
“받아주시는 겁니까?”
“네에….”
“그, 그럼….”
오토가 앙겔레스의 왼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우린 결혼하기로 약속한 겁니다.”
“네.”
“사랑합니다.”
“저도 사랑해요.”
그때.
‘으으으! 이걸 해야 된다고?’
오토는 지금이 앙겔레스에게 키스를 할 타이밍이라는 걸 깨닫고, 속으로 절규했다.
앙겔레스의 본모습을 아는 오토로서는 차마 키스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해야 했다.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면 반드시 지금 뜨거운 키스를 나눠야 앙겔레스를 100퍼센트 안심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래. 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자. 개한테.’
애꿎은 개들은 무슨 죄인지 모르겠지만, 오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딱 감고 앙겔레스에게 키스했다.
츄릅츄릅!
쭈왑! 쭈와압!
낼름낼름!
그러자 앙겔레스가 혀를 내밀어 오토의 키스에 열정적으로 호응했다.
‘으으으으윽! 뭔 혀가 이렇게 길어!’
오토는 마치 뱀처럼 긴 앙겔레스의 혀에 몸서리쳤다.
* * *
오토가 앙겔레스에게 청혼했단 사실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한 달 후에 그녀와 결혼하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열린 어전회의에서 앙겔레스와의 결혼 소식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렇게 왕비(진)이 된 앙겔레스는, 기다렸다는 듯 시녀들을 쥐 잡듯 잡으며 갑질을 일삼기 시작했다.
“여기 먼지가 쌓였잖아! 청소 똑바로 못해? 이 게으른 년 같으니!”
“꺄악!”
“내 눈에 먼지 하나라도 보이면 그때마다 이렇게 뺨을 처맞게 될 거야!”
시녀장 올리브는 그런 앙겔레스의 갑질에 분노했다.
“제, 제발 참으세요! 제발!”
“놔라! 왕비고 나발이고! 내 당장 저년의 허리를 반으로 접어버리겠다!”
“제발요오오오!”
오토는 분노한 올리브를 간신히 뜯어말리고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다니까요? 제가 살려면 일단 참아주셔야 합니다. 제발요.”
“음! 저 잡것이 사악한 마녀였다니! 알겠다! 내 당분간은 참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단, 조건이 있다.”
“뭐죠?”
“그 마녀를 처치하고 저주가 풀리면 운동을 시작해라. 언제까지 그런 비실비실한 몸뚱이로 살 건가?”
“…….”
“설마 싫다는 건가?”
“아, 아뇨. 해야죠, 운동. 암, 그렇고말고요. 하하… 하하하하….”
“좋다.”
오토는 겨우 올리브를 진정시킨 뒤 카미유에게로 가 이야기를 나눴다.
<지지리도 못난 놈> 저주를 완전히 푸는 방법은 단 하나.
앙겔레스를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앙겔레스를 죽일 계획을 짜야 했다.
“왜 공격 안 하십니까? 지금이 기회 아닙니까?”
“지금은 안 돼.”
오토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싸우면 답이 없어, 답이. 절대 못 죽여. 오히려 우리가 전멸할걸?”
“그럼 어떻게 처치합니까?”
“방법이 있어.”
오토가 카미유의 귓가에 앙겔레스를 처치할 방법을 속삭여주었다.
“정말 그게 약점입니까?”
카미유가 살짝 놀라며 물었다.
“그렇다니까? 문제는 사전작업이 완료되려면 한 한 달은 더 필요하단 거지.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꾹 참자.”
“알겠습니다.”
관건은 앙겔레스를 처치하기 위한 사전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얼마나 잘 버티느냐 하는 것.
앞으로 한 달 동안은 앙겔레스의 비위를 최대한 맞춰주면서, 그녀가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했던 것이다.
* * *
앙겔레스의 패악질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미래의 왕비 자리를 꿰찬 순간부터, 앙겔레스는 자신이 왕이라도 된 것처럼 아랫사람들을 들들 볶아대었다.
또한, 엄청난 사치를 부리기 시작했다.
결혼식을 준비한답시고 온갖 보석을 사들이는가 하면, 비싼 웨딩드레스를 수십 벌을 주문했으며, 무려 12마리가 끄는 초호화 마차까지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덕분에 이오타 왕국의 재정은 휘청거리다 못해 뿌리가 뽑힐 지경이 되었다.
앙겔레스의 사치 수준은 코딱지만 한 왕국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앙겔레스의 만행에 가장 크게 분노한 사람은 다름 아닌 와지르 대공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이따위 재정 상태로 뭘 하라는 게야! 적자다! 적자! 고작 3주 만에 재정이 파탄이 나버렸단 말이다!”
와지르 대공은 마치 성난 드래곤처럼 분노했다.
국정 운영을 도맡아 하는 입장에서, 돈이 줄줄 새는데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발 한주만 더 참아주십쇼….”
“뭣이?!”
“다 계획이 있습니다, 계획이.”
“계획 두 번 있었다간 네놈의 이 코딱지만 한 왕국에 빨간딱지가 붙을 게다!”
“…….”
“딱 한주만 더 두고 볼 것이다!”
“예….”
오토는 와지르 대공에게 아주 호되게 깨졌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꾹 참았다.
‘1주일만 더 버티자. 1주일만.’
오토는 앙겔레스를 처치할 사전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마음속에 참을 인[忍]자를 수없이 새기며, 1주일을 더 버텼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에고 상단이 돌아왔습니다.”
“역시. 오늘쯤 올 줄 알았지.”
오토는 카미유의 보고를 받고 즉시 에고를 만났다.
“소인, 전하께서 주신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요. 4천만 베르, 투자하겠습니다요.”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제가 부탁한 물건은요?”
오토가 지난번에 에고에게 했던 부탁을 언급하며 물었다.
“물론 구해왔습니다요.”
에고가 수레들을 가리켰다.
“좋습니다. 값은….”
오토가 지금은 돈이 없으니 거래 대금은 나중에 주겠다는 말을 하려 할 때.
“값은 안 주셔도 됩니다요. 전하와의 거래를 튼 기념으로 드리는 선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요.”
“정말요?”
“물론입니다요.”
“좋습니다.”
오토가 미소를 지었다.
“에고 상단에 로이드 포션의 독점적인 유통권을 보장하죠.”
“좋습니다요.”
“계약서는 천천히 쓰기로 하고, 일단 여기 머물면서 며칠 쉬다 가시죠.”
“알겠습니다요.”
오토는 에고와의 거래를 마친 후 카미유를 돌아보았다.
“재료가 왔네?”
“예, 전하.”
“당장 시작해.”
“기사 카미유, 명령 받들겠습니다.”
카미유가 오토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 * *
그로부터 3일 뒤.
앙겔레스의 패악질이 극에 달해 있을 무렵.
“이따위 음식을 누구더러….”
“국왕 전하 납시오!”
앙겔레스는 디저트가 맛이 없다며 평소처럼 시녀 하나를 갈구다가, 오토가 왔단 소리를 듣고 황급히 얼굴을 바꾸었다.
“다음부터는 좀 더 신경 써서 만들어주렴. 알겠니? 부탁이란다.”
“아, 알겠사옵니다.”
시녀는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티 내면 죽어. 알지?’
앙겔레스가 무언의 눈빛으로 협박을 해왔기에, 시녀는 입도 뻥끗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있었어요?”
오토가 앙겔레스에게 물었다.
“그럼요. 당신은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호호호.”
앙겔레스는 언제 패악질을 부렸냐는 듯 애교 섞인 웃음을 지었다.
“지금 시간 괜찮습니까? 보여줄 게 있는데….”
“뭘 보여주시려고요?”
“우리의 결혼식이 열릴 예식장을 준비했습니다.”
“예식장? 하지만 예식장은 이미 제가 꾸미고 있는걸요?”
앙겔레스의 표정에 살짝 분노가 깃들었다.
오토가 기껏 자신이 꾸며놓은 예식장을 바꾸려 하니 화가 난 것이다.
“그간 예식장을 꾸민 제 노력은….”
“초호화 예식장이 될 겁니다.”
오토가 재빨리 선수를 쳤다.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화려한….”
“정말요?”
“약속하겠습니다.”
“좋아요.”
앙겔레스는 <초호화 예식장>이란 말에 끔뻑 넘어가서, 아무런 의심 없이 오토를 뒤따랐다.
오토가 앙겔레스를 안내한 곳은 어전이었는데, 평소와는 달리 붉은색 천으로 뒤덮여 있었다.
“붉은색 천은 왜 쳐놓은 거죠?”
“당신은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가려놓았습니다.”
오토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얼마나 호화롭게 꾸며놓으셨는지 한 번 보겠어요.”
앙겔레스가 두 팔을 허리춤에 올려놓고는 오토를 노려보았다.
만약 예식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듯이….
“만약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그때.
퍼억!
오토가 철퇴를 휘둘러 앙겔레스의 얼굴을 후려쳤다.
예상하지 못한 기습을 당한 앙겔레스가 저 멀리 부웅! 하고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이 개 같은 새끼가….”
앙겔레스가 벌떡 일어나 으르렁거렸다.
“감히 날 철퇴로 쳐?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주마.”
뒤이어 아리따운 여성은 사라지고, 끔찍한 몰골을 한 괴물이 나타났다.
“윽.”
오토는 본체를 드러낸 앙겔레스를 바라보며 역겹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는, 탁탁! 박수를 두 번 쳤다.
촤라락!
그러자 어전을 뒤덮고 있던 붉은색 천들이 걷히며 오토가 언급했던 <초호화 예식장>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이건…!”
앙겔레스의 얼굴이 추―안 그래도 못생긴―하게 일그러졌다.
거울의 방.
어전의 천장, 벽, 바닥이 온통 거울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