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9화
“어르신, 정신이 좀 드세요?”
“누구세용???”
“…….”
“어딘 어디에용???”
오토는 쿠란이 불과 몇 초 만에 다시 치매 증세를 보이는 걸 보고, 계속해서 다이애닌을 먹였다.
쿠란이 드래곤이니만큼 많은 용량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기에, 아예 한 병을 다 비웠다.
그러자 효과가 있었다.
“오토야, 오래간만이구나.”
쿠란이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 오토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요즘은 정신이 멀쩡할 날이 없었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 정말 반갑구나.”
“어르신.”
오토가 쿠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치료제가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치료제…?”
“전에 말씀드린 치료제에요.”
오토가 다이애닌의 빈병을 쿠란에게 보여 주었다.
“정말로… 효과가 있는 것이냐?”
“그럼요.”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락가락하셨는데 이걸 드실 때마다 정신이 돌아오셨는데요?”
“오오!”
“희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오토가 쿠란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고맙구나, 정말 고마워.”
쿠란이 눈시울을 붉혔다.
“늙어서 비참하게 죽을 줄 알았는데, 네 녀석 덕분에 그래도 드래곤답게 눈감을 수 있게 되었구나.”
“여생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보내셔야죠.”
“오토야….”
“제가 앞으로도 더 잘 모실게요. 그러니까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야 합니다.”
“물론이다.”
쿠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녀석이 이렇게까지 이 늙은이를 생각해 주고 보살펴 주는데, 그래야지. 암, 그럴 것이다.”
“좋습니다.”
“이 얼마 만에 맑은 정신이더냐? 고맙다, 정말 고마워.”
쿠란이 오토의 두 손을 잡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혈육뿐 아니라 이 세상 천지에 동족 하나 없이 외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는 드래곤으로서는 오토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쿠란에게 있어 오토가 사실상 혈육이나 다름없는, 아들이나 손자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가 약속 드렸잖아요. 어르신 잘 모시기로.”
“고맙구나, 고마워.”
“어디 불편하시는 곳은 없으세요?”
오토가 쿠란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고요.”
“끌끌. 이런 호강을 누리는데 먹고 싶은 게 뭐가 있겠느냐. 분에 넘치는 호강이 아니더냐.”
“그런 말씀 마셔요.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먹는 행복이 얼마나 큰데요.”
“그, 그런 게냐?”
“그럼요.”
“음. 그게 말이다. 으음. 흠흠.”
쿠란은 우물쭈물 쭈그리처럼 속 시원히 말하지 못했다.
오토가 잘 돌봐 주는 건 물론 치매까지 치료해 주는데, 먹고 싶은 걸 말하자니 차마 염치가 없었던 것이다.
“괜찮으니까 말씀해 보세요, 어르신.”
“그래도 되는 것이냐?”
“당연하죠.”
오토는 쿠란에게 고마운 점이 많았다.
특히나, 쿠란의 그것(!)으로 만든 영약은 이미 오토뿐 아니라 여러 사람의 목숨을 살리지 않았던가?
쿠란은 단순히 곁에서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이오타 왕국에 엄청난 도움을 주는 존재였다.
“으음.”
“말씀해 보세요.”
“사실은 쫄깃한 미노타우로스가 한 마리 먹고 싶긴 하구나….”
“그럼 드셔야죠.”
오토가 그게 뭐가 어렵겠댜는 듯 카미유를 돌아보았다.
“기사단 풀어서 미노타우로스 세 마리만 잡아 오라고 해.”
“예, 전하.”
카미유가 즉시 오토의 명령을 기사단에 전달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어르신. 늦어도 내일이면 드실 수 있을 겁니다.”
“역시 오토 너밖에 없구나. 네가 내….”
바로 그때.
“누구세용???”
쿠란의 치매 증세가 다시 도졌다.
“흠.”
오토는 그런 쿠란을 바라보며 피곤해하는 대신 흥미롭단 표정을 지었다.
‘다이애닌 한 병에 한 5분 정도 정신을 차리시는 것 같은데. 약효가 도는 동안에는 제정신을 찾으셨어. 용량이 문제인가? 아니면 다이애닌으로는 드래곤의 치매가 완치가 안 되는 거야?’
지금으로서는 그걸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일단 양을 늘려 가면서 반응을 보자. 혹시 부작용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오토는 첫술에 배부르기보다는, 차츰차츰 다이애닌의 용량을 늘려서 쿠란의 치매 증세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어쨌든 1병에 5분 정도 제정신을 차린다는 사실을 알아내었으니, 이만하면 큰 소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양이 적을 뿐이지, 계속해서 다이애닌을 복용하다 보면 치매가 완치될 가능성도 있었고.
만약 완치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이애닌을 대량으로 복용시켜서 계속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게끔 해 준다면, 쿠란이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 * *
오토는 쿠란을 돌보며 치매 치료를 진행하는 한편, 카이로스를 만나 보기로 했다.
카이로스에게 줄 임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카이로스는 종교에 심취해서 경전을 만드는 한편, 포교에 힘쓰고 있었다.
그는 아르곤 대제에게 복수한 후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성직자로서 교리를 전파하면서 백성들에게 희망과 삶의 원동력을 실어 주는 데 힘쓰고 있었다.
오토가 보기에, 그런 카이로스의 모습은 참된 성직자였다.
허구한 날 술판을 벌이며 술을 엄청나게 퍼마셔 댄다는 걸 빼면, 카이로스는 그 어떠한 부귀영화도 탐하지 않았다.
오토가 마련해 준 조그마한 집에서 아리엘에게 바가지를 긁히는 한편, 소박한 생활 수준을 유지하며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과거 철퇴 한 자루로 제국을 세우고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니만큼, 카이로스는 부귀영화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아리엘 역시 그런 카이로스의 아내로서, 이오타 왕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봉사활동을 펼치는 등 취약계층을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아리엘의 성격이 제아무리 더럽다고 한들, 그녀는 누가 뭐래도 숲의 종족인 엘프였다.
기본적으로 선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돕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성향이었다.
그러다 보니 카이로스와는 의외로 죽이 잘 맞아서, 부부가 함께 빈민가에 나타나 음식을 나눠 주고 일자리를 주선하는 등 활동을 해 나가는 중이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줄 잘 서요! 음식은 많으니까! 거기! 질서 똑바로 못 잡아? 어? 뒈지고 싶어?!”
아리엘이 음식을 나눠 주다가 허드렛일을 하던 영혼기사들을 닦달했다.
“아, 알겠습니다! 마님!”
“빨리 움직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영혼기사들은 아리엘의 불호령이 떨어지자마자 삐걱삐걱 덜그럭대며 허둥지둥 움직여 맡은바 허드렛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 영혼기사들의 갑옷은 여기저기 찌그러져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아리엘에 의한 구타로 생긴 자국이 분명해 보였다.
“…조폭들이 봉사활동하는 장면 같네.”
오토는 카이로스 일당이 무료 급식소를 열어 빈민들을 구제하는 모습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 그렇게 중얼거렸다.
여자 두목인 아리엘.
그의 기둥서방 카이로스.
그리고 그 밑에 똘마니인 영혼기사들.
아무리 봐도 깡패들이 새 삶을 살겠답시고 개과천선한 모습 같아서, 보고 있노라면 절로 실소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근데.”
오토가 노숙자들에게 수프를 나눠주고 있던 카이로스에게 다가가 말했다.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냐?”
“빼, 뺀질이 왔느냐.”
“아니, 무슨 사람 몰골이.”
오토는 카이로스의 모습을 보고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오토가 아는 카이로스는 185센티미터의 장신에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은 넘어가는, 근육질의 사나이였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본 카이로스의 모습은 해골이나 다름없어서, 70킬로그램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보였다.
“뭐 병 걸렸냐?”
“그, 그게 아니라.”
카이로스가 슬쩍 눈치를 보더니 오토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루에 몇 번씩 짜이는 중이다….”
“뭘 짜여?”
“그, 그게 말이다.”
“……?”
“아리엘이 아기를 가지고 싶다고 해서.”
“……!”
“임신이 될 때까지 계속…….”
오토는 더는 카이로스의 말을 듣지 않고,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뭘 짜인다는 건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절레절레-
오토는 문득 카이로스가 불쌍해 보이면서도, 어쩌면 자신의 미래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많이 낳고 싶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알다시피 나는 오빠들이 많다. 어린 시절 오빠들과 함께한 추억들이 좋았고, 행복했다. 오빠들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힘닿는 데까지 낳고 싶다.’
‘지금부터 건강관리에 힘쓰도록.’
엘리제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나, 나도 저렇게 되는 거 아냐?!’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듣기에 엄마아빠놀이(?)는 서로 사랑해서 하게 되면 정말이지 행복한 일이었지만, 임신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라고 했다.
하물며 하나도 아니고 힘닿는 데까지 낳아 기르고 싶다는 엘리제의 말을 떠올려 보면, 도대체 얼마나 힘을 써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건 생각만 해도 무서ㅇ….’
그때.
“너 뭐야!”
아리엘이 득달같이 달려와 오토를 몰아세웠다.
“너 설마 이 인간 데려가려고 왔니?”
“예…?”
“절대 안 돼!”
“……!”
“안 그래도 씨 없는 수박 같은 인간이라 매일 매일 노력해도 임신이 안 되는데! 뺀질이 니가 데려가 버리면 아기는 언제 가져!”
“히익?!”
“절대로 안 돼? 데려가기만 해 봐? 아주?”
“아, 알겠습니다.”
오토는 아리엘의 으름장에 몸서리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카이로스와 아기를 갖고 싶은 아리엘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안 되겠다.’
오토는 괜히 얻어 맞기 싫어서, 슬그머리 내뺐다.
그렇다고 해서 카이로스에게 일을 주기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나중에 죽빵 몇 대 맞으면 되겠지, 뭐.’
오토는 그런 생각으로, 몰래 쪽지를 작성해 카이로스에게 전달되게끔 했다.
‘에르제베트 왕국을 흔들려면 카이로스가 적임자지.’
오토는 에르제베트 왕국에 소문을 퍼뜨릴 생각이었다.
국왕인 바토리가 사실은 사악한 언데드가 되었으며, 대소신료들 또한 그렇게 되었다고.
그런 소문을 퍼뜨리면 민심이 동요할 테고, 진신을 파헤치는 자들이 생겨날 것이며, 결국 왕실에 반기를 드는 자들도 반드시 생겨날 터였다.
오토는 카이로스가 에르제베트 왕국 안에서 반란을 일으켜 주길 원했다.
표현이 좀 웃기지만, 카이로스는 반란의 프로.
어느 나라에 떨궈 놔도 손쉽게 반란을 일으키고, 세력을 형성하고도 남을 만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이다.
* * *
오토는 아리엘 몰래 카이로스에게 임무를 전달한 후 왕궁으로 복귀했고, 이내 곧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번엔 또 어딜 가려고 그러십니까.”
“영업하러 가야지.”
“영업… 말씀이십니까?”
“이거.”
오토가 다이애닌 병을 슥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홍보해야 할 거 아냐. 그래야 많이 팔리지. 그리고 좀 빌리고 싶은 물건이 있어서. 그것도 빌리러 가고. 겸사겸사.”
“그래서 어디로 갑니까?”
“신성 아즈란 제국.”
“……!”
“꼭 필요한 물건이 거기 있기도 하고, 마침 다이애닌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인물도 거기 있거든.”
“설마.”
카미유가 오토의 말뜻을 이해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교황의 치매를 치료하시려는 겁니까???”
신성 아즈란 제국은 종교 지도자인 교황이 나라를 다스리는, 재정일치의 통치 구조를 가진 나라.
그런 아즈란 제국은, 최고 지도자인 교황이 치매에 걸려 있어 나라가 혼란한 상황이었다.
그런 입장에서 오토가 교황의 치매를 치료해 준다면,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는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알겠지? 왜 아즈란 제국으로 가려는지?”
“예, 전하.”
“뭐해? 준비 안 하고.”
카미유는 오토의 말에 군말 없이 자신의 여행 가방을 꺼내 들었다.
이제는 오토를 따라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는 게 익숙해져서, 언제든 출발할 수 있도록 커다란 여행 가방까지 준비해 놓았던 것이다.
안 가고 싶다고 안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