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쒜엑!
하사신이 휘두른 단검이 은빛 궤적을 그리며 오토의 목을 노렸다.
“풉.”
오토는 그런 하사신의 공격이 우스웠다.
엘리제나 카이로스에 비하면 하사신의 공격은 너무나도 가소로워서, 위협이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애초에 하사신이 모래 속에 숨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대비하고 있기도 했고.
퍼억!
오토가 파라솔을 휘둘러 하사신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컥!”
쓰러진 하사신.
“어딜.”
오토가 황급히 하사신의 아가리를 움켜쥐고, 독약을 깨물지 못하도록 입에 모래를 있는 대로 쑤셔 넣었다.
“컥! 커헉!”
졸지에 모래를 한 사발이나 들이켜게 된 하사신이 캑캑대며 괴로워했다.
“…….”
“…….”
“…….”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오토의 악랄함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모래 속에 숨어 있던 하사신들을 살살 약 올리면서 심장을 쫄깃하게 만든 것도 보통이 아닌데, 살아 있는 사람에게 모래를 먹일 줄이야….
“새끼.”
오토가 피식 코웃음을 치며 하사신을 비웃었다.
“어딜 뒈지려고. 죽으려면 정보는 주고 뒈져야지.”
“수고하셨습니다.”
카미유가 고생한 오토에게 시원한 물과 차가운 물수건을 건네주었다.
“오? 요즘 서비스가 좋네?”
“그러니까 제발 그만 좀 갈구십시오.”
카미유가 지쳤다는 듯이 쉰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번부터 자꾸….”
“흥.”
오토가 콧방귀를 뀌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까 이렇게 갑자기 잘해 주는 거겠지.”
“…그건 또 뭔 소립니까.”
“원래 밖에서 바람피우고 들어온 남편들이 집에 들어가면 평소보다 잘해준다잖아. 죄책감 들어서.”
“…….”
“나 몰래 뭐 했어? 엉? 살라딘 왕자랑 충성으로 뒹굴었지? 그렇지?”
카미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어나라.”
“꾸웩!”
대신 캑캑대던 하사신에게 다가가 엉덩이를 뻥! 하고 걷어차 화풀이를 했다.
카미유의 성격상 차마 대놓고 패진 못하고, 그렇다고 평소처럼 하극상을 저지르자니 보는 눈이 많고.
그러다 보니 괜히 애꿎은(?) 하사신에게 소심하게 화풀이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 *
오토 일행이 살라딘과 함께 사막을 건너 수도 알살람으로 향하고 있을 무렵.
칼리프 왕국의 술탄―국왕―이자 살라딘의 아버지 압둘 2세는 보고를 받고 엄청나게 분노했다.
“감히!!!”
그야말로 서릿발 같은, 군주의 분노가 한껏 서린 외침.
“누리스탄족 놈들이 잘랄라바드를 초토화시키고도 모자라서… 빌어먹을 시켜 하사신들이 내 아들까지 죽이려 해? 감히!”
그 살벌한 외침에 신하들은 감히 나서지 못하고, 몸을 바짝 낮춘 채 두려움에 떨었다.
현재 칼리프 왕국에서 술탄인 압둘 2세의 권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그간 몇 대에 걸쳐 강화해 온 왕권이 극에 달한 시기인지라, 압둘 2세의 권위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에 가까웠다.
오죽 왕권이 강했느냐 하면, 국교인 아난을 모시는 교단조차 감히 제동을 걸지 못할 정도.
그런 압둘 2세가 극대노했으니, 신하들이 몸을 낮추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자칫 눈 밖에 나 불호령이라도 떨어진다면, 그 길로 실각함은 물론 재수 없으면 목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군대를 준비시켜라.”
압둘 2세가 명령했다.
“우선 누리스탄족 놈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말고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고, 그들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라. 놈들이 잘랄라바드에 저지른 짓을 백배 천배로 갚아주어라. 알겠는가!”
“예, 술탄.”
“또한, 최전방 방어선을 강화해 이스마일족 놈들이 장악한 지역을 더욱 압박해 전쟁을 준비하라. 내 수년 내로 이스마일족 놈들을 우리 칼리프 왕국에서 멸종시켜 버릴 터이니.”
압둘 2세의 선언은 그간 잠잠―상대적으로―했던 칼리프 왕국의 내전에 다시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다.
하지만 압둘 2세의 생각은 달랐다.
‘오냐. 내 이번 기회에 감히 우리 왕조에 충성하지 않는 부족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통일왕조를 건설하리라.’
현재 왕가[王家]인 파미르족은 지난 몇 대에 걸쳐 왕권을 강화하며, 힘을 길러오고 있었다.
그간 무역항들을 개방하고, 마정석을 적극적으로 수출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압둘 2세의 입장에서는 화가 나는 것도 화가 나는 것이었지만, 울고 싶은데 뺨을 맞은 격이기도 했다.
지난 몇 년 동안은 왕조에 충성하지 않는 부족들을 공격할 구실이 마땅치 않던 차, 누리스탄족들이 잘랄라바드를 공격해 주는 바람에 명분을 제공한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누리스탄족들의 지역만 공격할 것이 아니다. 이참에 하나피족과 구자르족들도 공격해, 모조리 씨를 말려버릴 것이다. 그래야 저 북부의 이스마일족 놈들까지 정벌할 수 있을 것이다.”
“예, 술탄.”
그렇게 칼리프 왕국은 압둘 2세의 명령에 따라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왕가인 파미르족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세력을 자랑하는 이스마일족은, 칼리프 왕국의 북부 산악지대 <알라무트>를 장악하고 거의 100년이 넘도록 저항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 자리한 요새인 <마시아프> 성[城].
“드디어 때가 왔구나.”
이스마일족의 우두머리이자 하사신들의 수장 라시드는, 잘랄라바드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전해 듣고 크게 기뻐했다.
“압둘 2세는 절대 이번 사건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군대를 일으켜 전쟁을 벌일 것이고, 다른 부족들을 쓸어버리려 할 것이야.”
라시드는 압둘 2세의 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올해로 80세를 넘은 그를 칼리프인들이 산상노인[山上老人]이라 부르며 두려워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라시드는 산악지대에 들어앉아 칼리프 왕국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내려다보는 교활한 지략가.
괜히 칼리프 왕국군이 이스마일족의 근거지 알라무트 정벌에 성공하지 못하고 대치 중인 게 아니었던 것이다.
“들어라.”
라시드가 허연 수염을 쓸어내리더니, 부족의 장로들에게 명령했다.
“멍청한 누리스탄 놈들이 사고를 쳐준 덕분에, 예기치 않은 큰 행운이 찾아왔다. 압둘 2세는 이번 사건을 기회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그 칼끝은 파미르 왕조에 적대적인 부족들에게로 먼저 향할 것이다. 그러니 들어라. 우리 이스마일족은… 압둘 2세를 돕는다.”
그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이 무슨?’
이스마일족의 장로들은 라시드의 말을 듣고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술탄인 압둘 2세를 돕다니?
100년이 넘도록 파미르 왕조와 대치중인 이스마일족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저희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산상노인이시여, 가르침을 내려주소서.”
부족의 장로들이 라시드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그의 의중을 물었다.
고령으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진 게 아닌 이상에야 교활하고 냉혹한 전략가인 라시드가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압둘 2세는 자신감이 대단할 것이다. 그간 무역업으로 군자금을 많이 모았으니, 군사력에 자신이 있겠지. 하지만 다른 부족들 역시 밀무역으로 군자금을 많이 확보했고, 알게 모르게 힘을 키워 온 상황이다.”
라시드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이 내린 판단에 대한 근거를 장로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압둘 2세가 다른 부족들을 제압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라면, 다른 부족들이 우리 이스마일족을 따르겠는가?”
그 순간.
“……!”
“……!”
“……!”
소스라치게 놀란 장로들이 휘둥그레 뜬 눈으로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압둘 2세가 전쟁 초기에 큰 승리를 여러 차례 거둘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다른 부족들은 우리 이스마일족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그럼 자연스레 우리 이스마일족이 저항세력의 구심점이 될 것이고, 영향력이 커질 것이다. 또한.”
라시드가 덧붙였다.
“압둘 2세가 연전연승을 거두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원한을 사겠는가? 우리 칼리프인들은 당하면 당할수록 더 강해지는 전투민족이 아니던가? 나 라시드는 압둘 2세가 전쟁 초기부터 업보를 충분히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것이다. 여러 부족들의 반감과 증오심이 더욱 커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자 장로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며, 라시드를 칭송하기 시작했다.
“오오!”
“과연 산상노인이시옵니다!”
부족 장로들은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그야말로 교활하고 무서운 전략.
“이 땅은 제국의 무덤. 파미르 왕조는 결국 무너질 것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우리 칼리프에 쳐들어왔던 강대국들처럼 말이다.”
라시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하사신들에게 명령했다.
“우리 하사신들과 첩자들로 하여금 압둘 2세의 군대에게 정보를 제공케 하라. 압둘 2세가 미처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고 교묘하게 정보를 제공해서, 다른 부족들이 개전 초기부터 고전하게끔 하라.”
“명령 받들어 모시겠사옵니다.”
“후우.”
라시드가 흰 수염을 쓸어내리며, 곰방대를 쭉 빨아들였다.
뿜어져 나온 뿌연 담배 연기가 라시드의 얼굴과 어우러져, 한층 더 음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살라딘… 압둘 2세의 아들놈만 없애 버릴 수 있다면 나의 전략이 완성될 터인데….”
라시드가 혼잣말했다.
“놈을 처리하는 데 더는 하사신들을 투입할 리 없을 테지… 이렇게 된 이상 압둘 2세가 살라딘 놈을 알아서 처리해 줄 터이니… 끌끌끌.”
술탄인 압둘 2세가 아들이자 왕세자인 살라딘을 알아서 처리해 준다?
장로들은 라시드가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지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산상노인 라시드가 그렇게 중얼거렸다면, 반드시 근거가 있을 것이었으므로….
* * *
오토는 사로잡은 하사신을 완벽하게 제압한 후 심문에 나섰다.
어쩌면 쓸 만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름은.”
“…….”
“다시 묻는다. 이름은.”
“…….”
“어휴.”
오토는 하사신이 입을 꽉 다문 채 침묵을 지키자 답답함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 쉽게 쉽게 가면 될 거 가지고 사람을 답답하게 하네. 묵비권 행사하면 다 되는 줄 알아? 그래, 계속 입 닫고 있어라. 다 아는 수가 있으니까.”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카이로스가 탄 가마가 자리한 행렬 끄트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이로스는 잘랄라바드를 떠나자마자 가마 속에 콕 박혀서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왕년에 고생은 해 볼 만큼 해 봐서 더 고생하기 싫다나?
“윽!”
오토는 가마에 도착하자마자 코를 찌르는 술 냄새에 인상을 팍! 구겼다.
촤르륵!
천을 걷어 젖히자마자 독한 알코올 향이 훅! 하고 오토를 덮쳤다.
“…뭐냐?”
해골물.
아니 해골술을 들이켜던 카이로스가 반쯤 풀린 눈으로 오토를 바라보았다.
칼리프 왕국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술을 마시는 게 금지되어 있다 보니, 눈치가 보여 마차 안에 짱박혀 퍼먹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인간도 눈치란 걸 보긴 보나 보네. 큭.’
오토는 속으로 피식 웃고는, 카이로스에게 말했다.
“그만 퍼마시고 기어 나와서 그 심안인가 뭔가 하는 것 좀 해 봐.”
“음?”
“정보를 캐낼 만한 놈을 하나 잡았거든. 그러니까 잠깐 나와 봐.”
“이 뺀질이 놈이! 감히 짐을 오라 가라 하다니!”
“너 자꾸 그러면 하렘 안 데려간다?”
“하, 하렘…?”
“술탄이 날 대충 대접하겠냐? 엄청 잘해 줄 텐데? 하렘으로 불러서 대접해 줄걸?”
“헉!”
카이로스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이 세계에서 말하는 <하렘>이란 술탄을 위한 여가시설로서, 이 세상의 모든 쾌락이 그 안에 존재한다고 전해지는 신비한 장소였다.
대륙인들의 야릇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너도 하렘에는 가 본 적 없지? 알살람까지 점령했던 건 아니니까.”
“그, 그렇다.”
“기어 나올래, 아니면 계속 거기 짱박혀서 술이나 퍼마ㅅ….”
“가자! 하렘으로!”
카이로스가 가마를 박차고 튀어나왔다.
오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