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3화
오토는 옥좌에 앉지 않았다.
왜?
그런 짓을 했다간 오히려 반발심을 살 테니까.
지금의 오토는 어디까지나 연합군 총사령관이어야 했지, 아라드 제국의 황좌를 노리는 간웅이 되어서는 곤란했기 때문이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 네 이노오오옴!”
황제가 오토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네놈이 어찌 짐에게 이럴 수 있느냐! 대제국 아라드의 수도 코린트를 이렇듯 유린하고 짐을 욕보이고도 네놈이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물론 나는 무사할 것이다.”
오토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놈의 뒤치다꺼리나 하다가 뒈질 순 없으니까.”
“뭐라? 뒤치다꺼리?”
황제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그로서는 오토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딱히 뒤치다꺼리라고 할 만한 것들을 시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짐이 네놈에게 언제 뒤치다꺼리를 시켰느냐?”
“무능.”
“……!”
“대제국 아라드의 황제로서, 네놈은 무능하다.”
오토가 경멸 어린 눈빛으로 황제를 노려보았다.
“제국의 황제에게 무능은 곧 죄악이란 걸 모르는 건 아닐 테지.”
“뭐, 뭐라?”
“네놈은 북부제국의 침공 징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저 강대한 북부제국의 위협으로부터 이 대륙을 지켜내기는커녕, 저 잘날 옥좌에 앉아 향락과 유흥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지.”
“……!”
“내가 먼저 징후를 알아채고 대비하지 않았다면, 네놈이 오늘날까지 그 비대한 몸집을 옥좌에 비빌 수나 있었을까?”
“그, 그건.”
“그래, 거기까지는 이해한다 치자. 전쟁이 끝나자마자 나와 잘츠부르크 가문을 의심하고, 연합군을 쓸어버리려고 했지. 내가 트리톤을 바치지 않았다면, 네놈은 그러고도 남았을 거다. 안 그런가?”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황제가 항변했다.
“황제로서 어떻게 연합군과 같은 세력을 두고 볼 수 있다는 말이냐! 내버려 두었다간 전쟁이 벌어지고 본국이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네놈 형제들을 내버려 뒀나?”
“……!”
“그래, 살려둘 순 있다고 치자. 황제라 해서 골육상잔의 비극을 자처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다만.”
오토가 그야말로 섬뜩한 눈빛으로 황제를 쏘아보았다.
“최소한 형제들에게 주었던 영토와 통치권은 회수했어야지.”
“…….”
“제국은 이미 분열되었다. 네놈의 그 무능함과 우유부단함 때문에.”
황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기분이야 나빴지만, 오토의 말에 틀린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분열에서 시작된 전쟁이 대륙 전체로 번져나갈 것이다. 아니, 이미 전쟁은 시작됐다. 알고 있겠지. 여러 국가들과 세력들이 네놈의 동생들에게 붙기 시작했다는 걸.”
“…….”
“대륙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동안 네놈이 대체 뭘 했나? 대제국의 황제로서 한 게 뭐냐는 말이다.”
역시 황제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현재 로웨나, 테르테미안, 파라곤이 통제를 벗어나 주변 세력들을 규합해 대놓고 내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오토의 말마따나,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대륙 전체가 전쟁터가 되어버릴 게 분명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더는 네놈의 무능과 우유부단함을 좌시할 수 없었을 뿐이다. 또한, 지긋지긋한 뒤치다꺼리 또한 그만할 생각이다. 네놈의 무능 때문에 왜 대륙 전체가 고통 받아야 하나? 왜 내가 소중한 내 장병들을 희생해가면서까지 네놈의 무능을 수습해야 하는 건가?”
“그건…….”
“여생이라도 편안하게 보내고 싶다면, 얌전히 협조해.”
오토는 그 말을 남기고는, 기사들을 돌아보며 명령했다.
“황제를 감금하고, 24시간 감시하라. 철통 같이 경계하고, 수상쩍은 행동이나 특이사항이 있을 시 즉시 보고해야할 것이며, 누구와의 접촉도 허락하지 않겠다.”
“예, 전하.”
“또한.”
오토가 덧붙였다.
“황제로서 대우는 해주되, 생활함에 있어 검소함을 유지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식사는 평범한 백성들이 먹는 것과 똑같이 준비해서 주도록.”
“예, 전하.”
오토의 명령이 떨어지자 기사들이 황제를 끌고 어전을 나섰다.
“…….”
황제는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이오타 왕국의 기사들에 의해 별궁에 유폐되었다.
“순순히 협조하겠습니까?”
“딱 한 달만 가둬두면 자발적으로 협조할 걸?”
“고문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아니?”
오토가 카미유의 물음에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저 머저리한테는 소박한 생활이 곧 고문이나 다름없어.”
“예?”
“오랜 세월 유흥, 향락, 사치에 빠져 살았잖아. 각종 쾌락에 대한 기대치가 매우 높아져 있겠지. 그런 인간이 한순간에 평범한 백성들처럼 먹고, 입고, 자게 됐는데 안 미치고 배겨?”
“아!”
“그러고 보니 이것도 고문이라면 고문이네. 꼭 육체적 고통을 가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동의합니다.”
고문이란 어떤 형태로는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꼭 사지를 비틀고 뼈를 부러뜨리고 코에 수프를 들이붓는 것만이 다가 아니었던 것이다.
#
황제가 끌려 나간 후.
“카미유.”
“예, 여기 있습니다.”
“수도 치안 유지를 위한 병력만 남기고 재정비 해. 하루 이틀 뒤에 즉시 진격할 테니까.”
“다음 상대는 누구입니까.”
“로웨나.”
오토가 답했다.
“황위 계승 서열 1위. 이젠 그녀가 죽어줄 차례야.”
“그럼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내버려 두면 테르테미안은 알아서 자멸할 거야.”
“……!”
“지금쯤 내가 언제 오나 눈알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테지. 후훗.”
오토는 발을 동동 구르는 테르테미안의 모습이 눈에 선해서, 자기도 모르게 킥킥 웃고 말았다.
“설마.”
카미유가 오토의 의도를 이해하고는 혀를 내둘렀다.
“테르테미안이 로웨나와 파라곤에게 잡아먹히도록 놔두실 생각이십니까?”
“왜 아니겠어?”
오토가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는 듯 대꾸했다.
“우린 셋을 다 제거해야 돼. 그중 하나를 자기들끼리 없애주겠다는데, 우리가 굳이 피를 흘릴 필요가 있을까?”
“맙소사.”
“내버려 두면 테르테미안은 알아서 말라죽어. 그럼 남은 세력은 로웨나나 파라곤에게 붙겠지.”
“로웨나를 제거하면…….”
“남은 모든 세력들이 파라곤에게 붙을 거야. 여전히 황제에게 충성하는 지방 귀족들도.”
“그럼 전투가 커지지 않겠습니까? 여러 세력의 군주들이 파라곤을 황제로 추대하고 연합군과 맞서 싸우려 든다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겁니다.”
“상관없어.”
오토가 딱 잘라 말했다.
“우린 첫 번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거고, 파라곤은 결국 항복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카미유는 더는 오토에게 묻지 않았다.
오토가 이렇듯 승리를 호언장담한다면, 반드시 그 근거가 있을 터.
의심의 여지?
그런 건 없었다.
승리는 기정사실이었다.
전략은 완성됐다.
전술 또한 오토의 지휘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렇다면, 카미유를 포함해 연합군에 소속된 모든 이들의 임무는 잘 싸우는 것이 전부였다.
“얼마 안 남았어. 로웨나를 제거하고 파라곤과의 일전을 끝내면…… 아마 우리 생에 두 번 다시 대규모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기껏해야 몬스터 토벌이나 도적들을 상대로 하는 소규모 전투가 고작이겠지.”
“듣던 중 반가운 말씀입니다.”
카미유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검은 되도록 쓰이지 않아야 합니다. 좋은 세상이라면, 검을 쓸 필요가 없어야겠지요.”
“기사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거야?”
오토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밥줄 끊기는 거 아닌가?”
“그런다고 기사란 직종이 사라지겠습니까?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준비해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말은 잘해요.”
“검이 필요 없는 세상이면 또 어떻습니까. 먹고 살 길이야 어떻게든 생기겠지요.”
“퍽이나.”
오토는 카미유가 기사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지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떤 직업을 상상하든 기사 말고는 딱히 어울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하만 하겠습니까?”
“으응……?”
“황위에 오르시면 국정운영을 하시느라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실 거 아닙니까? 실직자가 된다 한들 제국의 황제보다야 나은 팔자라고 생각합니다만.”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
“예……?”
“아냐, 아무것도.”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
한편, 테르테미안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서쪽에서는 로웨나.
동쪽에서는 파라곤.
형제들에게 둘러싸인 채 버티려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전면전을 아예 포기한 채 성 안에 틀어박힌 지 어언 한 달 여.
이대로 있다가는 성 안에서 말라 죽을 판국이었다.
문제는 지원군이 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
“빌어먹을! 형님 폐하께서는 무얼 하신단 말인가! 오토 드 스쿠데리아 국왕은 또 뭘 하고!”
황제의 군대든 오토의 연합군이든 지금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형제들에게 둘러싸여 죽게 생겼는데, 누구의 도움을 받는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황제나 오토나 감감무소식이긴 마찬가지라, 테르테미안은 그저 오매불망 기다리며 하루하루 피를 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뭐라!”
테르테미안은 보고를 받자마자 자신의 옥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동안 시퍼렇게 질려 있던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화색이 돌았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가 드디어……!!!”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오토가 이끄는 연합군이 수도 코린트를 점령하고 황제를 체포하는데 성공했다고 했다.
또한, 오토가 보내온 전령이 곧 연합군이 남하해서 로웨나군의 후방을 칠 계획이라고도 했다.
넉넉잡아 1주일만 버티면 연합군이 5,000기가 넘는 트리톤을 앞세워 로웨나군을 쳐부수고 합류해줄 예정이란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지원군이, 함께 대업을 이루기로 했던 정치적 파트너인 오토가 드디어 대군을 이끌고 출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이 사실을 아군 장병들과 동맹들에게 널리 알려라! 오토 드 스쿠데리아 국왕이 연합군이 트리톤들을 앞세워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란 말이다!”
“예! 대공 전하!”
테르테미안은 지원군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군 진영에 널리 알림으로써 사기를 끌어올리고자 했다.
안 그래도 희망이 없어 하나 둘 탈영병까지 나오는 마당에, 그렇게라도 해야 장병들이 버틸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테르테미안의 판단은 옳았고, 분명한 효과가 있었다.
“곧 지원군이 온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 국왕이 연합군을 이끌고 오고 있다!”
“며칠만 버티면 된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 국왕이 온다!”
오토의 이름값은 테르테미안 진영에서도 충분히 통했다.
아니, 차고 넘칠 만큼 효과적이었다.
오토가 불패의 지휘관이자 승리의 상징이라는 것은 이미 전 대륙이 널리 퍼진 사실.
오토가 대군을 이끌고 도와주러 온다니, 테르테미안 진영에 속한 장병들은 벌써부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지경이었다.
트리톤이라는 무시무시한 전략 병기가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 전쟁의 판도를 어떻게 뒤바꿀 수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기도 했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
“연합군은 언제 온단 말이냐! 벌써 일주일이 지났는데!”
테르테미안은 온다던 오토와 연합군이 코빼기도 비추지 않자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직접 오지는 않더라도 로웨나군의 후방을 쳤다던가 하는 소식이라도 들려왔어야 정상인데,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곧 로웨나군에 대한 공격이 시작될 예정이라 하옵니다! 조금만 기다려달란 연락이 왔사옵니다!”
“그런가?”
“예! 대공 전하! 곧 공격이 시작되면, 로웨나군이 스스로 물러설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음. 조금만 더 기다려보도록 하겠다.”
테르테미안은 이번에도 믿었다.
그러나 그 후로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났음에도 로웨나군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거세게 공격해왔고, 파라곤 역시 소극적이긴 했지만 계속해서 테르테미안의 병력을 갉아먹었다.
“대, 대공 전하! 곧 성벽이 무너질 것이옵니다! 어서 피하셔야 하옵니다!”
“아아…… 아아아……!!!”
테르테미안은 그제야 진실을 깨닫고 탄식에 탄식을 거듭했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 네놈이 나를 속였구나…… 네놈이 나를 가지고 놀았어……!!!”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성벽마저 무너진다면, 테르테미안에게는 더는 미래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