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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7화

“곱게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미안한데 그런 큰 자비를 베풀어줄 생각은 없는데.”

오토가 느긋한 어조로 바실리를 향해 말하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바실리의 저 낯짝을 보고 있노라면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담배라도 태우지 않으면 도무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랄 걸 바라야지. 니 새끼는 양심이란 게 없냐?”

“…….”

“너 하나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백만 명 가까이 돼. 수천만 명이 가족을 잃었고. 그런 주제에 뭐가 어쩌고저째? 죽여 줘? 하하.”

오토는 기도 안 찬다는 듯 웃고는, 바실리에게 말했다.

“네놈은 내가 책임지고 장수하게 해줄게. 아프면 고쳐줄 거고, 미쳐버리면 다시 제정신으로 만들어 줄 거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오토에게는 ‘그 탕약’과 정신질환의 만병통치약이라 할 수 있는 다이애닌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늙어 죽을 때까지, 평생을 손가락질 당하며 살게 될 거다. 뒈지면 북부제국 역사상 가장 무능한 황제로서 역사에 길이 남겠지. 네 이름은 수치와 무능의 상징이 되어 영원히 기억될 거다.”

“그, 그건……!”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인다는 말, 잘 알지? 승자답게 역사를 써주지. 재평가의 여지 따위 없게, 아주 철두철미하게 네놈의 무능을 기록해주마.”

“……아.”

바실리는 오토의 말에 그만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상상하기도 싫었다.

살아생전 모든 이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치욕스러운 삶을 사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후대에도 길이길이 욕을 먹게 생겼다.

정말 무서운 건 역사에 이름이 남는 것.

당장의 치욕이야 죽어버리면 그만이라지만, 역사에 이름이 남는다는 것은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쯤 되면 태어난 것 자체를 후회해야 하는 지경이었다.

“저, 절대 네놈의 의도에 놀아나진 않으리라!”

바실리는 그렇게 소리치더니, 기습적으로 자신의 곁에 있던 기사의 검을 빼앗으려 했다.

“어딜!”

기사가 바실리를 제지하려던 순간.

“놔두세요.”

“예?”

“그냥 놔두라 말했습니다.”

“예, 전하.”

오토는 바실리의 돌발행동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어디 한번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이…….

“내 죽어서 조롱당할지언정, 살아생전 네놈의 손아귀에서는 놀아나지 않을 것이다!”

바실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검으로 스스로의 목을 그었다.

푸화아아아악!

시뻘건 피가 뿜어져 나오며 바실리가 무너졌다.

“응. 넌 죽고 싶어도 못 죽어.”

오토가 쓰러진 바실리를 향해 냉랭한 미소를 짓고는, 기사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살리세요.”

“예, 전하.”

그러자 기사들이 바실리의 목을 황급히 붕대로 감고는, 입에 깔때기를 꽂은 뒤 ‘그 탕약’을 들이부었다.

콸콸콸콸콸!

거무죽죽하고 걸쭉한 탕약이 깔때기를 통해 바실리의 목구멍 안으로 쏟아졌다.

“컥! 커헉! 컥컥컥! 그, 그만! 커헉!”

바실리는 기사들에 의해 제압당한 채 한동안 몸부림을 치더니, 이내 곧 벌떡 일어났다.

“우웨에에에에에에에엑! 우웨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바실리는 역겨움에 좀처럼 구토를 멈추지 못하다가, 문득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이건.”

“내가 말했지.”

오토가 그것 보라는 듯 바실리에게 말했다.

“넌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고.”

“……!”

“내 허락이 없이는, 넌 못 죽어.”

“아아, 아아아아.”

바실리가 절망감에 몸서리쳤다.

분명 검으로 목을 그었는데, 그 정체모를 역겨운 액체를 강제로 먹고 나니 죽기는커녕 평소보다 더 힘이 넘쳤다.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다는 걸 깨닫고 나니 앞으로의 삶이 어찌나 절망스러운지, 상상만 해도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제, 제발…… 제발 그냥 죽여 다오…… 제바알…….”

“말했을 텐데. 누구 좋으라고.”

“제바아알…….”

“100살까지는 살려둘 테니까 걱정 마라.”

“으악! 으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바실리는 오토의 말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괴성을 내지르다가, 돌연 픽 쓰러져 기절해 버렸다.

그간 쌓인 정신적 고통과 절망이 중첩되면서 그만 정신을 잃고 만 것이다.

“깨우세요.”

“예, 전하.”

잔인하게도, 오토는 기절한 바실리에게 강제로 다이애닌을 먹여 그를 일깨웠다.

“이, 이건.”

바실리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단번에 깨달았다.

다이애닌을 복용한 덕분에 정신이 평소보다 더 멀쩡해서, 금방 상황을 파악했던 것이다.

부작용(?)은 또 있었다.

정신을 맑게 해주는 다이애닌의 효과가 발휘되면서, 그간 겪은 일들이 더욱 생생하게 떠올라 정신적 고통이 몇 배는 더 크게 와 닿았다.

문제는 보통 이런 경우 사람이 미쳐버리기 마련인데, 다이애닌의 효과 때문에 미치지도 않았다는 것.

덕분에 바실리는 미치지도 못한 채 맨정신으로 그 정신적 고통을 모두 감당해야만 했다.

“으으…… 으으으으…… 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

결국, 바실리는 죽지도 못하고 미치지도 못한 채 고통에 찬 괴성을 내지르며 발만 동동 굴렀다.

그것은 정말이지 지독한 형벌이었다.

육체적인 고문보다 더한,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한 폭력이었다.

하지만 오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암, 그래야지. 어딜 곱게 죽으려고.”

오토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잘 감시하세요. 절대 죽게 놔둬선 안 됩니다.”

“예, 전하.”

오토가 바실리를 살려둔 이유는 또 있었다.

‘그래야 북부제국의 본토를 손쉽게 장악할 테니까.’

비록 포로로 붙잡혔지만, 바실리는 엄연히 북부제국의 황제.

그가 가진 정통성은 그 어떤 황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바실리를 앞세운다면, 북부제국의 본토를 장악해나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만큼 혈통은 중요해서, 정치적으로 써먹을 때 이보다 더 좋은 수단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 * *

바실리에 대한 재판 아닌 재판이 끝난 후.

휘청!

오토는 어전을 나서자마자 그만 쓰러질 뻔했다.

“전하!”

카미유가 오토를 붙잡아주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더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을 게 분명했다.

“크으윽.”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

오토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 그대로, 오토의 상태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오토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최소한 몇 달 정도는 푹 쉬며 요양해도 모자랄 판국이었다.

마신 라미레스와의 전투 당시 어마어마한 마력을 사용했고, 심지어 대학살의 서에 있는 영혼에너지를 모조리 써버렸으며, 성좌들의 황제의 힘을 빌려 쓴 덕분에 너덜너덜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애초에 업무를 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건 엘리제 역시 마찬가지라서, 그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몸져누운 상태였다.

오토와 엘리제 모두 마신 라미레스와의 전투로 인한 후유증이 어마어마해서, 한동안은 휴식을 필요로 하는 상태였던 것이다.

“이제 좀 쉬십시오.”

카미유가 오토에게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할 만큼 하셨습니다.”

“나도 알아.”

“알면 쉬셔야지, 왜 자꾸 그렇게 무리를…….”

“아직 위협이 남았잖아.”

“……?”

“황자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니까. 빠르게 병력의 재정비를 마치고, 혹시나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해야 돼.”

북부제국의 본토는 천천히 점령하면 그만이었지만, 대륙의 경우에는 아니었다.

‘지금부터는 나조차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

오토는 그게 가장 불안했다.

‘미리 약을 쳐 놓긴 했지만, 북부제국의 침공을 저지한 이상 로웨나와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지금 오토가 제일 경계하는 건 로웨나, 테르테미안, 그리고 파라곤의 돌발행동이었다.

북부제국의 침공을 저지함으로써, 이오타 왕국과 잘츠부르크 가문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대륙의 서부와 북부를 완벽히 장악한 상태나 다름없었다.

이는 로웨나, 테르테미안, 그리고 파라곤뿐 아니라 아라드 제국의 황제마저도 위협을 느끼고도 남을 만한 전력.

누구 하나라도 오토의 통제를 벗어나 돌발행동을 취한다면, 아라드 제국의 분열은 물론 전쟁의 불씨가 전 대륙으로 번져나갈 게 분명했다.

또한…….

‘난 어떤 방식으로든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거기에 대비해야 돼.’

오토는 북부제국의 침공을 저지하고, 마신 라미레스를 쓰러뜨림으로써 예정된 미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카이로스가 경고에 따르면, 그것은 우주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이었기에 분명히 어떠한 반작용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지금으로서는 그 반작용이 어떻게 일어날지 예측조차 못했지만…….

“카미유.”

“예, 전하.”

“나 좀 쉴 테니까, 북부제국군의 잔존 병력들을 정리하고 연합군의 재정비를 부탁해.”

“알겠습니다.”

결국, 오토는 카미유에게 총사령관 업무를 맡기고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더 무리했다간 수명마저 깎일 것 같아서, 아무리 마음이 급하다고 한들 강제로라도 휴식을 취할 수박에 없었던 것이다.

“아, 그리고.”

오토가 덧붙였다.

“내 상태가 안 좋다는 건 절대 비밀이야. 알겠지.”

“명심하겠습니다.”

오토는 혹여나 자신의 상태가 알려지면 다른 마음을 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을 염려해서, 카미유에게 당부했다.

애초에 총사령관이자 신흥강국의 국왕의 건강 상태는 철저히 기밀에 붙여야 하는 보안사항이기도 했고.

* * *

오토의 명령대로, 연합군은 빠르게 북부제국군의 잔존 병력들을 수습하고 재정비에 나섰다.

덕분에 연합군은 불과 1주일 만에 대규모 전면전을 치를 수 있을 정도로 순조롭게 재정비를 끝마칠 수 있었다.

그런 연합군의 전력은 가히 대단했다.

아라드 제국군을 빼도 무려 5,000대의 트리톤과 50만에 가까운 병력을 갖춘 대군(大軍)이었다.

오토는 연합군이 재정비를 마치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돌리고,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몸은 좀 괜찮은가.”

엘리제가 오토에게 물었다.

“난 괜찮…… 쿨럭! 쿨럭쿨럭! 커헉!”

오토는 엘리제의 물음에 대답하려다 피를 왈칵 쏟아내고 말았다.

후유증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해서, 하루 이틀 쉬어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던 것이다.

그건 엘리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마신 라미레스와의 전투에서 자신의 생명력까지 갉아먹어가며 싸웠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물론 오토만큼은 아니었지만…….

“한동안 푹 쉬어야 한다.”

엘리제가 오토를 챙겨주었다.

“여기서 더 무리하면 정말로 몸이 상하고 말 거다.”

“그, 그러게. 으윽.”

“그리고…… 정말 고맙다.”

“으응?”

“날 지켜줘서.”

엘리제가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워낙에 표현에 서툰 여자다 보니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할 때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맙긴. 당연한 건데.”

오토가 엘리제의 손을 꼬옥 쥐었다.

“내가 안 지켜주면 누가 지켜주겠어. 헤헤헤.”

“그, 그야 당연하지만…….”

“나도 고마워.”

“……?”

“살아줘서.”

오토의 말은 진심이었다.

만약 엘리제가 마신 라미레스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면, 오토는 견디지 못했을 게 분명했을 테니까.

‘정식으로 청혼할 거야. 조만간.’

오토는 곧 엘리제에게 청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단 북부제국의 침공은 저지했고, 엘리제도 살렸다.

그럼 이제 아라드 제국의 분열만 막으면 세계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어질 터.

언제 터질지 모르는 변수에 잘 대응하기만 한다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었다.

다가올 변수에 대응하는 것.

그게 오토의 다음 목표이자 이 세계에서의 마지막 목표였다.

* * *

한편, 연합군이 북부제국의 침공을 저지하자 대륙의 정세는 기이하게 흘러갔다.

우선 대륙 북부에 자리한 국가들이 다급히 회의를 소집해 국가연합을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라드 제국의 황제는 연합군이 승리했으며, 아직도 건재하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표정이 싹 굳어 버렸다.

“으으음.”

황제는 연합군의 전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깨닫고 위기감에 몸서리쳤다.

북부제국의 침공을 저지할 때는 좋았으나, 막상 전쟁이 끝나자마자 커다란 위협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본래 권력이란 그러한 것.

연합군의 군사력이 아라드 제국 전체를 위협하고도 남을 만큼 거대해졌기에, 황제는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이, 이를 어쩐다.’

황제는 혼자 끙끙 앓았다.

‘연합군이 쳐들어오면 황위를 내어줄 수밖에 없을 터인데. 허어.’

게다가 지난 수백 년 동안 북부장벽을 지키던 잘츠부르크 가문도 야만부족과 동맹을 맺은 마당이라, 황제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아무래도 짐의 동생들에게 조언을 구해야겠군. 좋든 싫든 다 같은 황가의 자손들이 아닌가?’

떠오르는 건 역시 가족밖에 없었다.

“로웨나, 테르테미안, 그리고 파라곤 대공에게 속히 입궁하라 전하라.”

“예, 폐하.”

결국, 아라드 제국의 황제는 기어코 로웨나와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을 불러들이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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