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4화
수십 가닥의 쇠사슬에는 마치 송곳니와 같은 날카로운 칼날이 돋아나 있었고, 그만큼이나 예리한 플라즈마 에너지가 번뜩였다.
촤아아아아아아아!
쇠사슬들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촉수처럼 오토와 엘리제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막을 수 있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오토와 엘리제는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날아든 쇠사슬들을 모조리 쳐냈다.
아니, 쳐냈다고 생각했다.
촤아아아아아아아!
그런데 눈 하나 깜빡하는 사이에 쇠사슬들이 어느새 코앞까지 닿아 있었다.
현실 조작.
라미레스가 이 공간을 지배해 시간의 흐름과 상황을 편집한 것이다.
“……!”
“……!”
놀란 오토와 엘리제의 얼굴이 당혹감이 떠오르는 사이.
촤락!
촤라라락!
날카로운 쇠사슬이 오토와 엘리제를 무참히 찢어발겼다.
“크아아아악!”
“악!”
영체로 이루어진 갑옷을 입어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일은 없었지만, 두 사람이 입은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주르르르르르르륵!
쇠사슬이 영체로 이루어진 갑옷을 찢고 들어오면서, 몸 곳곳이 찢어져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우웅!
상처는 곧장 회복되었다.
그러나 흘린 피까지 보충되는 건 아니었으므로, 컨디션이 급속도로 나빠지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힘껏 발악해 보아라.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한들 결국 제자리걸음일 테니.”
라미레스가 오연한 눈빛으로 오토와 엘리제를 향해 말했다.
“결국, 네놈들은 그저 미개한 벌레일 뿐이다.”
라미레스가 다시금 기형검을 휘둘렀다.
마치 채찍처럼 휘두른 기형검에서 재차 쇠사슬들이 뿜어져 나와 오토와 엘리제를 노렸다.
우웅!
엘리제의 검 아드리안이 진동을 일으켰다.
촤아아아!
엘리제가 휘두른 검으로부터 마치 그물과도 같은 오러 파이어가 뿜어져 나와 하늘을 뒤덮었다.
천라(天羅)의 검이 쇠사슬들과 뒤엉키며 불꽃을 피워 올리고, 폭발을 일으켰다.
고오오오!
오토의 무형검이 천라의 검에 휘감긴 쇠사슬들을 잘라내었다.
텅, 터엉!
잘린 쇠사슬들이 땅에 떨어지던 순간.
펑펑! 펑펑펑! 펑! 펑! 펑펑펑! 펑펑펑! 펑! 펑! 펑! 펑펑펑! 펑! 펑!
쇠사슬들이 머금고 있던 플라즈마 에너지가 폭발을 일으켰다.
마치 수백여 개의 수류탄이 동시에 터진 것과 같은 효과.
“크으으으으윽!”
“크흑!”
오토와 엘리제는 그 폭발에 휘말려 버렸다.
“죽어라.”
그러는 사이 라미레스가 자신의 기형검으로 연신 대지를 내리찍어 충격파를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충격파가 오토와 엘리제를 덮쳤다.
“……!”
“……!”
오토와 엘리제는 이번에는 저항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
마신 라미레스는 공간을 지배하며 시간의 흐름마저 쥐락펴락하는 존재.
그런 그의 무력 앞에 실력은 큰 의미가 없었다.
불가사의한 권능.
그리고 압도적인 강함.
드래곤들과도 일전을 벌이던 외계종족의 군주들 중 하나답게, 마신 라미레스의 전투력은 오토와 엘리제를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오히려 여유가 있어 보였다.
털썩, 털썩!
충격파에 의해 나가떨어진 오토와 엘리제는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조금 전 폭발과 충격파에 휘말리면서 내부가 진탕되어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 * *
한편, 연합군은 마물들과 싸우며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쿠란과 아드리아나 부부가 용의 숨결을 내뿜어 마물들의 숫자가 10분의 1로 줄어들었음에도, 전투는 쉽지 않았다.
마물들이 워낙에 강력했고, 연합군 또한 북부제국군과의 전투로 지쳐 있었기에 힘겨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연합군은 차츰차츰 마물들을 토벌해 나갔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차 승기를 굳혀 갔다.
“……후우.”
카미유는 겨우 숨을 돌렸다.
최전방에서 정신없이 마물들을 베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전투의 승기를 잡은 상황이었다.
카미유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저 멀리 오토와 엘리제가 마신 라미레스와 싸우고 있는 현장을 바라보았다.
콰아아아앙!
우우웅!
콰아아아아아아아!
그곳에서는 정말이지 치열한, 저런 싸움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과연 저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빨리 끝내고 달려가겠습니다, 전하.’
카미유는 얼른 마물들을 처치하고, 오토를 도와줄 생각밖에 없었다.
아직은 몸을 빼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제 갓 승기를 잡았으니, 더욱 마물들을 몰아붙여야 했다.
“트리톤들은 아군 보호에 최선을 다하라! 기사들은 아군 장병들과 함께 싸워라!”
카미유는 오토를 대신해 연합군을 지휘하면서, 마물들과의 싸움을 계속해 나갔다.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싸움들을 이어나갔다.
오직 이 세계를, 일상의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서.
* * *
쓰러졌던 오토와 엘리제는 곧장 몸을 일으켜 마신 라미레스에 대항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라미레스의 그 압도적인 강함 앞에서, 오토와 엘리제조차 버티는 게 고작.
승리를 바라는 것은 요원해 보였다.
그렇게 점차 가슴 속 깊은 곳에 절망감이 싹트던 그때.
“……이제부터 내 모든 것을 걸겠다.”
엘리제의 검이 돌연 고요하게 변했다.
이윽고 시간의 흐름이 정지한 듯 공기가 고요해졌다.
미친 듯 요동치던 하늘도 잠잠해지고, 끊임없이 뒤집어지던 대지의 비명도 멎어 들었다.
엘리제의 의지가, 우주의 법칙으로부터 부여받은 그 힘이 비로소 발휘되고 있었다.
“……이건.”
마신 라미레스는 이 공간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이 약해지는 걸 느끼고 얼굴을 굳혔다.
파앙!
마침내 모든 힘을 개방한 엘리제가 마신 라미레스를 향해 쇄도했다.
촤아아아아아!
“크아악!”
라미레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라미레스 또한 만만치는 않았다.
“감히!!!”
라미레스가 반격하고.
콰아아아아아아앙!
엘리제가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 추가적인 공세를 막아냈다.
그렇게 엘리제와 라미레스 간에 피 튀기는 혈투가 벌어졌다.
“크, 크윽!”
오토는 그 싸움에 끼어들지 못했다.
“커헉!”
엘리제와 라미레스가 충돌할 때마다 뿜어지는 충격파에도 속이 진탕되며 정신이 어지러웠다.
영체로 이루어진 갑옷을 입었음에도…….
‘이대로라면 공멸이다.’
오토는 라미레스와 엘리제가 서로 호각을 이루며 막상막하의 결투를 펼치는 걸 보고, 이 대결의 결말이 본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을 막기 위해 뼈를 깎는 수련을 거듭해왔건만, 이제는 끼어드는 것조차 불가능할 줄이야…….
괜히 엘리제와 라미레스가 서로 공멸하는 결과가 나온 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이렇게 무력한가. 결국 엘리제를 지키지 못하는 건가?’
깊은 무력감과 통탄스러움이 밀려들었다.
이대로라면 엘리제와 라미레스가 서로 공멸할 테고, 오토는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하게 되는 셈이었다.
물론 세계를 지켜냄으로써 무수히 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릴 수는 있겠지만, 엘리제가 죽는다면 정작 오토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럴 수…… 없다.”
오토가 으득, 이를 악물었다.
“이게 정해진 운명이라면…… 나 또한 이 세계의 법칙에서 벗어난 자…….”
오토가 대학살의 서를 펼쳤다.
촤라라라락!
대학살의 서의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가며 특정 장이 펼쳐졌다.
쓰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은 뒷일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선 저 마신 라미레스를 처단해 엘리제부터 살리는 게 우선이었다.
오토에게는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나 목숨보다 엘리제가 더욱 소중했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는 오직 자신의 생존만을 생각하던 사람은 이제 없었다.
어느덧 오토는 이 세계를 위해,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상대가 마신이라면…….”
오토가 에메랄드빛으로 물든 눈을 빛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보다 더한 힘으로 처단하리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학살의 서로부터 눈부신 섬광이 번뜩였다.
* * *
대학살의 서를 통해 또다시 허공법계에 접속한 오토는, 절대자들의 전당을 찾았다.
그곳은 이 드넓은 우주의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신적인 존재들이 자리한 곳으로써 성좌(聖座)들의 의지가 거(居)하는 곳이었다.
오토가 그곳에 모습을 드러내자 성좌들의 시선이 확 쏠렸다.
그와 동시에 온갖 성좌들이 오토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런 성좌들은 결코 선(善)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다른 차원의 마왕, 마신, 악신 등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존재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 내가 힘을 빌려주마.
- 내 손을 잡으라.
- 세상을 파멸시킬 힘을 빌려주마.
전 우주를 통틀어 가장 사악한 성좌들이 일제히 오토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오토는 느낄 수 있었다.
그들 중 누구의 손을 잡더라도 마신 라미레스를 압도할 수 있음을.
그러나 저 사악한 성좌들의 힘을 빌렸다가는…….
‘내가 저들의 그릇이 되어 세계를 파멸시킬 거다.’
그렇게 되면 라미레스보다 더한 악마가 탄생하는 셈이었다.
라미레스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결국 성좌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한 존재.
이곳 성좌들의 전당에 자리한 사악한 존재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하찮은, 코흘리개에 불과한 수준일 터.
오토는 자신을 향해 달려든 사악한 성좌들을 외면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 네 소원을 이뤄주마.
- 감히 내 손을 잡지 않겠다는 것인가?
사악한 성좌들은 오토가 주저하자 본모습을 드러내었다.
- 크흐흐흐! 네놈을 통해 유희를 즐기리라!
- 어리석은 자여, 네 존재를 내게 바쳐라.
사악한 성좌들은 오토의 존재를 빼앗으려 했다.
“으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오토는 사악한 성좌들에게 둘러싸며 철저히 유린당했다.
저항?
불가능했다.
오토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끔찍한 쟁탈전에서 승리한 자에게 존재를 빼앗기는 것뿐.
허공법계에 접속한 것은 오판이었다.
카이로스가 괜히 강하게 경고해 온 게 아니었다.
라미레스를 처단할 힘을 얻기 전부터 대가를 치르게 생겼으니…….
“아…….”
오토는 사악한 성좌들에 의해 사지가 찢겨나가는 것 같은 느낌에 철저히 몸서리치고, 절망했다.
접속을 종료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으나, 벗어나는 건 아니었다.
이곳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특정 성좌와 계약을 맺는 것뿐…….
혹은 사악한 성좌에 의해 존재를 빼앗기거나.
‘바, 방법을…… 크윽!’
오토는 어떻게든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문득 든 생각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저항이 불가능하다면.
마치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는 새우마냥 자신의 존재를 빼앗으려는 성좌들 틈바구니에 끼어 고통받는 것밖에 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가, 가장 강한 자와…… 계약하겠다.”
오토가 힘겹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대들 중에서 가장 강한, 가장 격이 높은 존재와 계약하겠단 말이다!”
그러자 오토에게 들러붙었던 사악한 성좌들이 눈치를 보더니 서로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강제로 존재를 빼앗는 것보다 정상적인 계약을 맺는 것이 유희를 즐기기에 훨씬 더 나았으니까.
게다가 가장 강하고 격이 높은 존재와 계약하겠단 오토의 말이 그들의 자존심을 자극한 탓도 있었다.
“……후우.”
그렇게 겨우 한숨을 돌린 오토는, 사악한 성좌들의 쟁탈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척하며 곁눈질로 힐끔힐끔 성좌의 전당을 둘러보았다.
‘누구 없나?’
저들이 서로 싸우는 사이 적당한 성좌를 찾아 날름 계약을 맺고 현실로 도망친다는 게 오토의 계획.
그러나 나서지 않았던 성좌들은 오토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온갖 사악한 성좌들이 나선 이상 그들로서도 나서기가 부담스러웠던 탓이었다.
‘아, 제발.’
오토의 속이 타들어 가는 사이.
- 오호라.
이곳 성좌의 전당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자가 오토를 향해 관심을 드러내었다.
그의 존재는 컸다.
그는 모든 황제들의 황제.
전 우주의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오직 단 하나의 진정한 황제였다.
- 재미있는 놈이로군.
그가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 한낱 인간 주제에 감히 이곳 성좌의 전당에서 사기를 치다니.
그는 오토의 의도를 꿰뚫어보았지만, 그걸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