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은 피제로.
오토 드 스쿠데리아의 심복 중의 심복.
천하에 다시없을 간신배.
오토의 타락과 이오타 영지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희대의 역적.
이 비열한 인간은 온갖 아첨과 사탕발림으로 오토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며, 뒤로는 막대한 양의 재산을 축적했다.
최근에는 그간 모은 재산 대부분을 국외로 빼돌리는 한편 적국인 소룬 영지와 내통하고 있는 놈이었다.
왜?
망하기 직전인 이오타 영지를 소룬 영지에게 팔아먹으려고.
마지막까지 단물을 쪽쪽 빨아먹고야 말겠단 심산이었다.
‘아 저 새끼.’
피제로를 본 오토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피제로는 온갖 짜증과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캐릭터였다.
뭔가를 하려고 하면?
[알림: 피제로가 당신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알림: 피제로가 당신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알림: 피제로가 당신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위와 같은 메시지와 함께 행동이 취소된다.
이유는 간단했다.
영지 내에서 피제로의 입지가 워낙에 크고, 오토에 대한 지배력이 높아서다.
물론 피제로가 반대가 강제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건 아니었다.
플레이어는 피제로의 의견을 거스를 수 있다.
단,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온갖 훼방을 놓지. 의견을 3번 거스르면 날 암살하려고 할 테고.’
피제로를 섣불리 제거하려고 들면?
그대로 게임 오버.
피제로가 죽는 순간 그가 심어놓은 간첩들이 영지민들을 부추기고, 반란이 일어난다.
소룬 영지의 군대도 이때다 싶어 쳐들어온다.
그러니 플레이어의 입장에선 아주 성가시고 까다로운 존재일 수밖에.
“아니, 영주님. 식량을 푸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피제로가 옥좌로 다가와 말했다.
“저들이 굶주리는 이유는 게으르고 무능하기 때문인데, 어찌 영주님께서 책임지시려 하십니까? 백성들이란 무릇 배은망덕한 존재들입니다. 은혜를 베풀어도 그게 은혜인 줄도 모르고 더 많은 식량을 요구할 것입니다.”
뒤이어 익숙한 알림창이 떠올랐다.
[알림: 피제로가 당신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무수히 많이 겪어본 오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로의 반대를 딱 잘라 반대했다.
“결정은 변하지 않아.”
“예…?”
“나는 영주로서 굶주린 영지민들에게 식량을 나눠줄 거다.”
“아니, 영주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개돼지들에게….”
“그만.”
오토가 피제로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말하지 마. 영주로서의 명령이다.”
“여, 영주님?”
“오늘 아침 회의는 이걸로 끝낸다. 이상.”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옥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카미유.”
오토가 카미유를 돌아보았다.
“따라와. 할 얘기가 있다.”
“예, 영주님.”
그러자 알림창이 떠올랐다.
[알림: 피제로의 의견을 무시하셨습니다!]
[알림: 피제로의 심기를 거슬렀습니다!]
[알림: 피제로의 기분이 나빠집니다!]
알림창은 무시하고 카미유와 함께 어전을 떠났다.
‘제까짓 게 기분이 나빠져 봤자지.’
오토는 피제로를 전혀 껄끄러워하지 않았다.
왜?
피제로를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 * *
“이… 이이…!”
피제로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부들부들 떨었다.
“이보게, 피제로. 진정하게.”
“자네 괜찮나?”
“분노를 가라앉히시지요.”
간신배들이 피제로의 곁으로 몰려들어 한 마디씩을 떠들어댔다.
“당혹스러우시겠습니다.”
“당호옥…?”
피제로가 눈을 부라렸다.
“이게 당혹스러울 일이오? 그냥 어이가 없어서 그러오! 어이가!”
피제로가 목소리를 높이자 간신배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갑자기 식량을 배급하겠다니! 우리에게 상의도 없이! 이게 말이나 되오? 하! 저 미ㅊ….”
피제로는 흥분해서 말이 막 튀어나오려는 것을 애써 억눌렀다.
아무리 피제로라도 지켜보는 눈과 귀가 이렇듯 많은 곳에서 영주를 대놓고 욕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저 빌어먹을 새끼가 뭘 잘못 처먹어도 단단히 잘못 처먹었구나. 감히 내 의견을 무시하다니. 그래, 어디 두고 보자.’
피제로는 이를 악물고는 씩씩대며 어전을 빠져나갔다.
자신의 꼭두각시라고 생각했던 오토가 통제를 벗어났으니, 그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 * *
‘우선 카미유부터 내 편으로 만들어야지.’
카미유는 오토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또한, 쓸 만한 인재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영웅 유닛으로 성장할 잠재력을 지닌 캐릭터이기도 했다.
그간 오토가 싸지른 똥을 치우느라 성장이 멈춰 있을 뿐.
“무슨 생각이십니까.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카미유는 영주의 집무실에 도착하자 오토에게 물었다.
“이유라….”
오토가 쓴웃음을 지으며 그 말을 곱씹었다.
“살기 위해서?”
“예?”
“이대로라면 내 목이… 으악!”
오토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와장창!
앉자마자 의자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기 때문이다.
<지지리도 못난 놈> 저주의 효과 중 하나인 <날벼락>이 원인이었다.
“으… 이건 몰랐네. 으으으!”
오토가 투덜거리며 엉덩이를 움켜쥐고 신음했다.
“…….”
카미유는 그런 오토의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어서 입을 꽉 다물어버렸다.
“어디까지 말했더라?”
“이대로라면….”
“내 목이 날아갈 테니까.”
오토가 난처하다는 듯 웃으며 카미유의 말을 받았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왜긴.”
오토가 대답했다.
“곧 반란이 일어나거나 영지가 파산할 테니까. 그게 아니면 소룬 영지에서 쳐들어오거나. 그것도 아니면 서쪽 숲에서 몬스터 떼들이 나타나 우리 영지를 쓸어버리겠지. 최악의 경우 암살당할 수도 있고.”
“그걸 아시는 분이….”
“잘잘못은 나중에.”
“…….”
“그냥 이제라도 정신을 차렸다고 해두자.”
“이미 늦었습니다만.”
카미유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셨으면 지금 당장 짐을 싸서 야반도주하십시오. 엎질러진 물입니다. 우리 이오타는 이미 망했습니다. 이제 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형.”
오토가 한 마디를 툭 내던지고.
“……!”
카미유가 충격을 받고 서릿발처럼 얼어붙었다.
형.
어린 시절 오토 드 스쿠데리아는 카미유를 그렇게 불렀다.
카미유에게는 그리운 호칭이었다.
* * *
오토와 카미유의 나이 차이는 불과 네 살밖에 나지 않았다.
선대 영주는 어머니를 잃은 데다 외동아들이기까지 한 오토가 외로울 것을 염려해 카미유를 붙여주었다.
그래서 오토와 카미유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며 마치 친형제처럼 지냈다.
‘형!’
‘도, 도련님! 저에게 형이라고 부르시면 안 됩니다!’
‘싫어! 형이라고 부를래!’
‘절대로 안 될 일입니다! 도련님께서 저를 그렇게 부르시면 크게 경을 칠 것입니다!’
‘그럼 우리 둘이 있을 때만 그렇게 부를래! 그것도 안 돼?’
‘그, 그건….’
‘형! 혀엉!’
‘으응.’
‘헤헤! 형이 생겼다! 헤헤헤!’
그러나 오토는 성장하면서 점차 삐뚤어져 갔다.
뛰어난 검술 재능과 총명함을 지닌 카미유를 질투했던 것이다.
그리고 영주가 된 이후 본격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하면서, 둘의 사이는 영영 멀어지고 말았다.
때문에, 어린 시절 그 좋았던 기억들은 오직 카미유만 그리워하는 추억이 된 지 오래였다.
“갑자기 왜 저를 그렇게 부르시는 겁니까.”
“도와줘. 형의 도움이 필요해.”
오토가 카미유에게 부탁했다.
“상황이 어렵다는 거, 나도 알아. 그간 내가 얼마나 끔찍한 짓들을 저질렀는지도.”
오토는 그렇게 말하면서 솔직히 좀 억울했다.
‘젠장. 내가 그런 거냐. 오토 새끼가 그런 거지.’
온갖 패악질을 저지른 건 게임 속 캐릭터인 오토 드 스쿠데리아지, 게이머 김도진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마지막 기회를 줘. 그간 내가 저질렀던 짓들을 만회할 기회.”
“하지만….”
“부탁이야, 형.”
형이란 호칭은 카미유를 아군으로 만들 수 있는 명령어 중 하나였다.
어린 시절 오토와의 추억을 그 누구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카미유였기에, 그 호칭에 동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 번만 믿어주면, 두 번 다시는 실망시키는 일 없도록 할게.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될 기회를 줘.”
오토가 카미유를 아군으로 만들 두 번째 명령어를 입력했다.
선대 영주.
이오타 영지 역사상 가장 훌륭했던 영주라고 평가받는 자.
카미유에게도 아버지 같은 존재.
“아버지의 유언을 잊은 건 아니지?”
선대 영주는 임종 직전 카미유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오토를 곁에서 잘 보살펴주어라… 내 이렇게… 부탁하마. 카미유… 내 아들아… 동생을… 잘 부탁… 한다.
…라고.
부르르!
카미유가 몸을 떨었다.
‘됐어.’
오토는 그런 카미유의 모습을 보고 명령어들이 잘 먹혀들어 갔다는 걸 확신했다.
<형>과 <아버지>는 카미유를 아군으로 만들어주는 명령어들이었다.
이걸 어떻게 알았냐고?
<오토의 일기>라는 아이템이 있다.
오토의 침실에 자리한 책장 맨 마지막 칸에 처박혀 있다.
플레이어는 일기장을 통해 두 사람의 과거를 알 수 있고, 카미유를 아군으로 만드는 명령어들을 습득할 수 있다.
물론 이 공략법을 아는 사람은 오직 김도진뿐이었다.
그 누가 맵 구석구석을 뒤져가며 책장에 꽂힌 책까지 다 읽어보겠는가?
지난 3년 동안 오토라는 캐릭터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얻은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기사 카미유.”
카미유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영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그러자 알림창이 떠올랐다.
[알림: 카미유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알림: 당신에 대한 카미유의 호감도 상태가 <경멸>에서 <동정>으로 바뀌었습니다!]
호감도는 차차 올리면 된다.
<경멸>만 아니라면 카미유가 플레이어를 배신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형, 해야 할 일이 있어.”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피제로를….”
오토가 말했다.
“제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