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며칠 전.
이오타 왕국군은 발틴 왕국군보다 한 발짝 앞서 출정했다.
전쟁을 예상하고 움직였던 만큼, 이오타 왕국이 발틴 왕국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행군하던 중.
‘잠깐.’
카미유는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이 길은 체르고리 요새로 가는 길이 아니다.’
카미유는 이오타 왕국군이 엉뚱한 방향으로 행군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자마자 즉시 오토에게 다가가 물었다.
“전하, 명령이 잘못 하달되었습니다.”
“누구야.”
오토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대답했다.
“어떤 놈이 내 명령을 잘못 하달했어? 카미유야?”
“…남 탓부터 하시는 겁니까.”
“나야 정확하게 명령을 내렸으니까.”
“명령을 잘못 하달한 건 전하셨습니다.”
“내가?”
“우리 군의 이동 경로가 잘못됐습니다.”
카미유가 지도를 펼쳐서 오토에게 보여 주었다.
“지금 이대로 행군하면 체르고리 요새가 아니라 카슈미르 산맥으로 가게 됩니다. 정확히는….”
“루체른으로 가게 된다고?”
카슈미르산 기슭에 자리한 소도시 루체른.
옛날엔 로샨 왕국의 영토였지만, 지금은 이오타 왕국의 영토가 된 지 오래였다.
오토가 아무칸, 드워프들, 그리고 쿠란을 만났던 바로 그곳이었다.
“예, 이대로 행군하면 루체른으로 가게 됩니다.”
“잘 가고 있네.”
“예…?”
“우리 루체른으로 가는 거 맞아.”
“거긴 왜 가시는 겁니까? 우리 군은 체르고리 요새로….”
카미유가 눈살을 찌푸렸다.
“거긴 방어하러 가는 곳이잖아. 우리 임무는 방어가 아냐. 공격이지.”
“공격을… 합니까? 우리가?”
“응.”
“설마.”
카미유가 혹시나 싶어 물었다.
“카슈미르산을 넘어서 발틴 왕국을 공격하시려는 겁니까?”
“응.”
“안 됩니다.”
카미유가 딱 잘라 반대했다.
“카슈미르산은 해발 5,000미터가 넘는 고산입니다. 게다가 길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 군이 제아무리 교육훈련이 잘되어 있다 한들 카슈미르산을 넘어서 발틴 왕국을 공격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렇지.”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군이 아니라 어떤 군대라도 무리지, 그건. 공격은 개뿔. 산을 넘다가 다 죽을걸?”
“그걸 아시면서 이렇게 무리한 작전을 펼치시겠다는 겁니까?”
“아니까 하는 거야.”
“……?”
“우리 군이 카슈미르산을 못 넘는다는 건 우리도 알고, 발틴 왕국도 알아. 그게 상식이니까. 근데, 만약 카슈미르산을 넘을 수 있다면? 넘어가서 발틴 왕국을 친다면? 그럼 어떨까?”
“가능하기만 하다면.”
카미유가 대답했다.
“발틴 왕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지?”
“그래서 방법이 있다는 겁니까?”
“응.”
“뭡니까? 그 방법이란 게.”
“그게 그러니까.”
오토가 카미유의 귓가에 속삭였다.
속닥속닥!
오토의 이야기가 끝난 후.
“…맙소사.”
카미유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방법이 있을 줄이야.
“어? 저기 온다.”
오토가 초록색으로 물든 눈으로 저 멀리 지평선 너머를 가리켰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거대한 말에 올라탄 하브르 초원의 유목민 기병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 * *
이오타 왕국군은 카슈미르산을 넘은 게 아니라 산을 ‘통과’ 한 거였다.
그렇다고 해서 해발 5,000미터짜리 산에 터널을 뚫은 공사를 진행한 건 아니었다.
아무리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이라지만, 산에 터널을 뚫는 건 하루 이틀 걸리는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카슈미르산 같은 고산(高山)을 뚫어내 터널을 짓는다는 건 못해도 10년은 족히 걸릴 대공사일 터.
그렇다고 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비결은 간단했다.
오토는 붉은 모루 부족이 뚫어놓은 갱도를 이용했다.
붉은 모루 부족 드워프들은 수백 년 동안 카슈미르산에 각종 광물과 암석을 채굴해왔고, 그 과정에서 뚫은 갱도는 산맥 너머 발틴 왕국의 영토에까지 뻗어 있었다.
즉, 이오타 왕국군은 힘들여 뱀의 길을 뚫어낼 필요가 없었다.
드워프들이 미리 뚫어놓은 갱도를 이용해 우회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 또한 게이머 김도진이 오토 드 스쿠데리아를 수백, 수천 번 플레이하며 발견해낸 공략법 중 하나였다.
‘나도 어지간히 미치긴 했네. 이 갱도를 샅샅이 뒤져볼 생각을 다 하고.’
오토는 갱도를 통과하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연구를 했는지, 스스로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긴. 그쯤 연구했으면 내가 오토 드 스쿠데리아고, 오토 드 스쿠데리아가 나인 거지. 그래서 이 세계에 빙의하게 된 걸지도.’
오토는 그런 얼빠진 생각을 하면서, 갱도를 통해 카슈미르산을 통과했다.
척! 척! 척! 척!
이오타 왕국군을 이끌고.
* * *
드워프들의 갱도를 통해 카슈미르산을 통과한 이오타 왕국군은, 즉시 토오롱 요새로 진격했다.
진격에 어려움은 없었다.
발틴 왕국은 이오타 왕국군이 토오롱 요새 코앞까지 진격해 왔을 때까지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왜?
이오타 왕국군의 침투 경로는 발틴 왕국의 정찰 자산이 거의 없는 오지(奧地)였으니까.
“전군, 진격하라.”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토의 명령에 이오타 왕국군이 일제히 토오롱 요새를 향해 내달렸다.
“적, 적이다!”
“쏴라!”
“적들이 나타났다!”
토오롱 요새에 주둔해 있던 발틴 왕국군은, 이오타 왕국군의 기습에 크게 당황했다.
뒤이어 벌어진 공성전.
스윽.
오토가 나섰다.
“후우.”
오토는 크게 심호흡하고는, 아공간 인벤토리를 열어 대학살의 서를 꺼냈다.
스으으으으으!
대학살의 서로부터 공허의 암흑 에너지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음성 증폭.’
원하는 바를 생각했다.
촤라라라라라라!
책장이 저절로 넘어갔다.
“मम वजनं वर्.”।
“अहं क्षुधार्तःअ.”स्मि।
오토가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펼쳐진 책에서 공허 에너지가 흘러나와 오토의 목을 휘감았다.
“적들을.”
오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섬멸하라.”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힘이 넘친다!”
“우린 무적이다!”
“우어어어어어어어어어!”
이오타 왕국군의 전투력이 급상승했다.
화아아악!
심지어, 이오타 왕국군 병사들의 몸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기까지 했다.
대학살의 서의 힘을 이용해 아군 버프 스킬인 야만용사의 함성을 증폭시킨 것이다.
굳이 고함을 지를 필요 없이.
“일어나라.”
오토가 쓰러진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회, 회복된다!”
“난 쓰러지지 않는다!”
“전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
부상당했던 병사들이 빠른 속도로 회복하더니, 벌떡 일어나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토는 언령(言霊)으로 전투를 지휘해 나갔다.
무적황제의 권능 중 하나인 야만용사의 함성.
그중 아군을 강화시켜 주는 용맹의 함성.
그리고 아군을 회복시켜 주는 불굴의 함성.
이 두 가지 권능을 대학살의 서로 증폭시켜 사용한 것이다!
* * *
오토가 이오타 왕국군을 이끌고 토오롱 요새를 공격하는 사이.
두두두두두두두두두!
아무칸이 이끄는 기병대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달리며 발틴 왕국의 국토를 가로질렀다.
그리고는 발틴 왕국의 전략적 요충지들을 차례차례 초토화시키는 순회공연을 펼쳤다.
발틴 왕국은 아무칸과 기병대에 의해 철저히 농락당하고, 짓밟혔다.
그도 그럴 것이, 발틴 왕국은 이오타 왕국군이 쳐들어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회로의 존재를 몰랐기에, 무방비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을 수밖에.
덕분에 아무칸과 기병대는 발틴 왕국의 국토를 내 집 안방처럼 휘저으며, 불과 며칠 사이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발틴 왕국의 국왕 체흐 4세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뭐라! 이오타 왕국군의 기병대가 본국의 영토에서 활개치고 다닌단 말인가!”
“예! 전하! 벌써 2개 영지가 초토화되었다고 하옵니다!”
“이, 이런 빌어먹을! 어떻게 놈들이 본국의 영토로 들어올 수 있었단 말인가!”
“아무래도 우회로가 있을 것 같다는 게 중론이옵니다! 전하! 어서 기병대를 토벌하셔야 하옵니다! 피해가 엄청나옵니다!”
“이런 젠장! 당장 군을 이끌고 놈들을 토벌하라! 어서!”
체흐 4세의 명령에 따라서, 발틴 왕국군은 아무칸과 기병대를 쫓아다니게 되었다.
토오롱 요새가 함락당한 줄도 모른 채….
* * *
“국왕 전하! 만세!”
“만세!”
“이오타 왕국! 만세!”
“만세!”
오토는 이오타 왕국군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토오롱 요새에 입성했다.
그러나….
휘청!
오토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만 주저앉을 뻔했다.
‘미치겠네.’
대학살의 서를 사용한 대가는 매우 컸다.
단순히 야만용사의 함성을 증폭시켜서 사용했을 뿐인데, 마나가 고갈되어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천근만근 기진맥진하게 직전이었다.
손발도 덜덜 떨리고, 다리도 후들거렸다.
어질어질!
심지어 극심한 현기증으로 인해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까지 했다.
대학살의 서를 사용한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생명력, 체력, 마나, 정신력 등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대학살의 서는, 함부로 사용했다간 타락하기도 전에 소유자를 말려 죽일 수도 있는 마물이었던 것이다.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지.’
오토는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에 차마 주저앉을 수 없어서, 이를 악물고 버티고 섰다.
아직은 쉴 수 없었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번 전쟁의 핵심은 시간.
정해진 시간 안에 약속된 작전들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다.
‘지금쯤 아무칸이 적진을 휘젓고 있겠지. 발틴 왕국군을 데리고 다니면서. 하지만 오래 끌진 못할 거다.’
아무리 아무칸과 하브르 초원의 기병들이라 하더라도, 적진 한복판에 오래 있으면 결국 궤멸당하고 말 터.
‘빠르게 여길 정리하고 진격해야 한다. 안 그러면 아무칸이 위험해. 지금 아무칸이 적들의 주의를 끌어줄 때가 최적기이기도 하고.’
시간은 금.
지금 이 순간.
1분 1초가 황금처럼 느껴졌다.
“카미유.”
“예, 전하.”
“얼른 여길 정리하고, 다시 진격할 채비를 갖춰. 오늘 밤 다시 진격할 거다. 그때까지 병사들은 충분히 쉬게 하고.”
강행군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시간이 가장 중요했으므로, 병사들이 조금 힘들어하더라도 밀어붙여야 했다.
이러려고 평소에 그 강도 높은 교육훈련과 체력단련을 해 온 게 아니던가?
“병력은 얼마나 남깁니까?”
카미유가 오토에게 물었다.
“최소한만. 여기 병력을 많이 남겨 두면 곤란해. 알잖아. 우리 군의 최대 단점은 머릿수 부족이라는 거.”
“그럼 후방이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카미유가 염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다가 체르고리 요새를 공격하던 발틴 왕국군이 돌아오기라도 하면….”
“여길 다시 빼앗길지도 모르지. 어디 뒤통수 간지러워서 마음 놓고 발틴 왕국으로 진격이나 하겠어?”
“그런데도 최소한의 병력만 남깁니까?”
“응.”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틴 왕국군이 돌아올 일은 없어. 왜냐면, 뱀의 길을 폭파시킬 거거든.”
“그럼 체르고리 요새를 공격하고 있는 발틴 왕국군은….”
“오도 가도 못하고 푼힐 요새에 고립돼 버리는 거지, 뭐.”
오토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카심을 돌아보았다.
“카심.”
“예! 여기 있습니다!”
“귁! 귁귁귁!”
“마검사들을 이끌고 뱀의 길을 파괴하세요.”
“예!”
그렇게 오토는 체르고리 요새를 공격하고 있는 발틴 왕국군을 오도 가도 못하게 고립시켜 버린 뒤 군대를 이끌고 발틴 왕국을 향해 진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