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오토는 시녀장 올리브가 쿠란의 밥을 다 먹여 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자, 착하지. 아.”
“아.”
올리브는 죽을 다 떠먹여 준 뒤에 알사탕까지 하나 물려주고는, 오토를 돌아보았다.
“왔나.”
“아, 예.”
“그간 바쁜 것 같더니 많이 강해진 것 같군.”
북부 야만부족 출신인 올리브는 어마어마한 덩치를 지닌 여장부였으므로, 그 박력이 가히 어마어마했다.
움찔!
오토는 그 부리부리한 눈빛을 감히 마주치지 못하고, 슬쩍 시선을 피해버렸다.
올리브의 눈매는 마치 삼국지에서 묘사된 장비의 고리눈과 같아서, 마주 보고 있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 어르신의 상태는 어떤가요?”
“썩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예?”
“오락가락하시긴 하지만 그래도 하루 중에 2~3시간 정도는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고 계신다.”
그, 그거 심한 거 아닌가요?
하지만 매를 벌 필요는 없었으므로, 오토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가끔 자기가 드래곤이라고 우기는 걸 보면 심각하긴 하더군.”
“하하… 하하하….”
“아무튼, 어르신을 뵈러 온 것이면 내가 자리를 피해 주도록 하지. 어차피 밥도 먹여 드렸으니.”
올리브는 그렇게 말하고는 성큼성큼 큼지막한 발걸음으로 사라져버렸다.
‘피지컬은 여장부인데 일 처리는 엄청 섬세하고 꼼꼼하단 말야. 괜히 아라드 제국 시녀장 출신이 아니지. 역시 사람은 외모랑 능력이랑은 별개야.’
물론 <관상은 과학>이란 말도 있지만….
“어르신 좀 괜찮으세요? 저 왔습니다.”
“뉘슈?”
“…….”
“끄응! 배가 고프구먼! 배가 고파! 밥 줘! 왜 밥 안 줘!”
조금 전에 드셨잖아요….
입 안에 알사탕 물고 배고프다고 하지 마요….
오토는 쿠란이 꼬장을 부리기 시작하자 어질어질했지만, 그래도 잘 어르고 달랬다.
“어르신, 방금 식사 하셨잖아요. 알사탕도 물고 계시고요.”
“이이잉?”
“여기 보세요. 배가 이렇게 볼록하잖아요.”
오토는 아주 능숙하게 쿠란을 대했다.
과거 할머니가 치매를 앓으신 적이 있었기에, 치매 환자를 대하는 게 그리 낯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이나 쿠란의 꼬장을 받아주었을 무렵.
“음? 오토 아니냐? 여긴 웬일이냐?”
쿠란이 정신을 차렸다.
“예, 어르신. 오랜만에 문안 인사도 그리고, 여쭤볼 것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왔습니다.”
“끌끌끌! 이런 기특한 녀석!”
“요즘 좀 어떠세요?”
“정신이 자꾸 오락가락하니 좋은지 나쁜지도 잘 모르겠구나. 끄응.”
“그래도 정정하셔서 다행입니다. 크게 아프신 데 없으면 됐죠. 몸까지 아프시면 더 큰일이니까요.”
“요놈 보게? 끌끌끌!”
쿠란은 오토가 자신을 걱정해 주자 어지간히도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치매에 걸려 누가 돌봐줄 사람도 없는 쿠란으로서는 오토가 자식 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나저나 물어볼 게 뭐냐? 뭐든 대답해 주마.”
“예, 어르신. 그 다름이 아니라… 인간들의 고대문헌에 따르면 드래곤은 지혜롭고 위대한 종족이라서 영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용안 말이냐?”
“맞아요. 그거.”
“물론이지. 우리 드래곤들은 영혼의 본질을 아주 정확하게 볼 수 있단다.”
“그럼 혹시… 저도 봐주실 수 있을까요?”
오토는 그렇게 말하면서 생각했다.
‘무슨 관상 봐 달라는 것 같네.’
평소 사주팔자·주역 같은 것에 관심 많은 나이 지극한 어르신이 어디 보자… 하고 안경을 고쳐 쓰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야 어렵지 않지. 그래, 내 어디 한번 봐 주마.”
쿠란이 눈을 빛내며 오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
순간 오토는 무언가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에 당황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영혼이 창에 꿰뚫린 것 같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매우 묘한 느낌이었다.
“음.”
쿠란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네 녀석….”
“예?”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구나?”
그 순간.
“……!”
오토는 너무나도 놀라서 헉! 소리도 내지 못했다.
드래곤은 영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던 고대문헌이 진짜였을 줄이야!
* * *
“정지, 정지, 정지! 누구냐! 움직이면 공격하겠다!”
“이곳은 왕궁 앞이다!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한편, 왕궁 입구를 지키던 초병들은 웬 거지꼴을 한 남자의 접근을 가로막았다.
“이곳은 국왕 전하께서 계신 왕궁이다. 그러니 돌아가라.”
기사가 거지꼴을 한 남자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행색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무나도 걸레짝이라서, 그저 떠돌아다니는 부랑자가 길을 잘못 들어 왕궁 앞까지 흘러들어 온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초병들과 기사들의 판단은 틀린 것이었다.
“나 공군참모총장 카심이다.”
“음?”
“나 카심이라고! 공군참모총장! 당장 길 안 터? 어?”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이거 안 보여?”
부랑자.
아니, 카심이 완전히 넝마조각이 된 겉옷을 슥 걷어서 안에 입은 옷에 달려 있는 계급장을 보여 주었다.
“헉? 추, 충성! 근무 중 이상 무!”
“전하께 임무 복귀 신고하러 가야 하니까 길 터! 이 자식들아! 니들은 공군참모총장도 못 알아보냐? 어? 내가 이래 봬도 계급이 준장인데!”
“죄, 죄송합니다!”
그제야 카심을 알아본 기사가 차렷 자세로 군기 바짝 든 목소리를 내었다.
‘그 꼴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알아봐! 이거 완전 부조리잖아!’
기사는 억울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괜히 계급이 깡패겠는가?
어찌 됐든 못 알아본 건 사실이니, 카심이 꼬장을 부리기 시작하면 그저 당해야만 하는 입장인데….
“이런 젠장! 명색이 공군참모총장인데 이런 수모나 겪다니! 으이구! 내 팔자야!”
카심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왕궁 입구를 지나쳐 자신의 개인 집무실로 향했다.
어쨌든 복귀에 성공했으니, 오토에게 복귀 신고를 해야 할 터.
이런 몰골로는 감히 국왕을 만날 수가 없었다.
씻고, 이발도 좀 하고, 면도도 하고, 군복도 갈아입는 등 개인정비를 통해 깔끔하고 단정한 외모부터 갖추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게 집무실로 향하던 도중.
“아니, 도대체 어디 갔다 오시는 겁니까?”
지난 작전에 참여했던 쿤타치 가문의 마검사 하나가 용케도 카심을 알아보고는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몰골은 왜 그런 겁니까?”
“뭐 인마?”
“아니, 현장 변수가 발생해서 작전에서 빠지셨잖습니까. 한동안 안 보이셔서 다들 전하께서 비밀작전이라도 부여하신 줄 알았습니다만?”
그 마검사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하필 광산으로 팔려 가는 바람에 작전에서 완전히 제외되어 버린 카심은, 다음 날 이오타 왕국으로 복귀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황릉 작전이 완전히 끝나고도 벌써 열흘이나 지난 이 시점에 거지꼴을 하고 나타났으니, 마검사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쿤타치 가문 출신의 마검사이자 이오타 왕국의 공군참모총장이 탈영할 리도 없었기에, 오토가 따로 임무라도 주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는 것 역시 매우 합리적인 생각이기도 했다.
“…묻지 마라.”
카심은 아무도 자신을 걱정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서러웠지만, 그걸 티낼 수도 없었다.
작전이라도 나간 줄 알고 별걱정 안 한 걸 가지고 서운한 티를 내봤자 카심만 이상한 사람이 될 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훌쩍.
카심은 눈가에 맺힌 습기를 슥 닦고는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죽을 고비란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어렵사리 살아 돌아왔건만, 그걸 알아챈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어디 유명한 점술가라도 찾아가서 점이라도 좀 봐야지. 아이고, 내 팔자야.’
카심은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한탄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처음이었다.
오토가 사실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온 것이라는 걸 알아챈 존재는.
어쩌면 이 세계로 오게 된 비밀.
그리고 이 세계가 진짜 현실인지, 아니면 정말로 게임 속 세상인 것인지.
그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던 질문에 대한 해답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제가….”
오토가 떨리는 목소리로 쿠란에게 물었다.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고요?”
“지금 보니 그렇구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래. 본래 다른 세계에 존재하던 영혼이 이 세계의 육체에 빙의했구나.”
“헉!”
“어쩐지 네 녀석을 처음 봤을 때부터 이질적이란 느낌이 들더라니,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하지만 쿠란은 딱히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토는 그게 이상해서, 쿠란에게 다시 물었다.
“놀랍지 않으세요?”
“뭐가 말이냐?”
“제가 본래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빙의한 사람이라는 게?”
“흔하지는 않지만 드물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 별생각은 안 든다만?”
“네에?”
“오토야.”
쿠란이 미소를 지으며, 마치 어린 손자를 타이르듯 오토에게 말했다.
“이 드넓은 우주에 사람 사는 곳이 네 녀석이 온 세계밖에 없을 것 같으냐?”
“그건….”
“이 우주에는 말이다.”
쿠란의 입에서 오직 드래곤들만이 알고 있던 비밀이 흘러나왔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행성이 존재한단다. 그리고 그 무수히 많은 행성들에는 여러 생명체들이 살고 있단다.”
“그, 그렇군요.”
“그중에는 지금 우리가 만나 인연을 맺고 대화를 나누는 이 행성이 있을 테고, 네 녀석이 온 행성도 있겠지.”
“아…!”
“생각해 보거라.”
쿠란이 오토에게 질문을 던졌다.
“오토 네 녀석이 네가 살던 행성에서 이 행성으로 오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그, 그건 모르죠? 우주에 주소가 있는 것도 아닐 테고요. 게다가 엄청 멀지 않을까요? 빛의 속도로 달려와도 수억 년이 걸릴지도?”
“그렇지?”
쿠란이 그것 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럼 네 녀석의 열심히 날아오는 게 쉽겠느냐, 아니면 영혼만 쏙 이동하는 게 쉽겠느냐?”
“그거야… 헉?”
“육체는 우리에게 있어 생명체로서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소중한 그릇이지. 하나 육체로 인해 우리에게는 한계가 생기는 거란다. 생로병사의 굴레. 삶과 죽음의 법칙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하겠습니다.”
“행성과 행성. 그러니까 각기 다른 세계를 오고 가는 것은 육체보다 영혼이 훨씬 자유롭다. 우주가 워낙에 넓으니, 물리적으로 서로 다른 세계를 오가려면 엄청나게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니까.”
“그렇겠네요.”
“그래서 생명체가 다른 행성으로 이동하는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는단다. 물리적으로 이동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지. 하지만 영혼만 쏙 이동하는 경우는 흔하지는 않지만 드물게 벌어지곤 한단다.”
솔직히 오토는 쿠란의 말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 없었다.
우주, 행성과 행성 간의 이동, 시간, 영혼 등등등….
너무 고차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라 인간의 사고방식으로는 쿠란의 말을 이해한다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오토는 다른 질문들을 제쳐두고라도, 딱 한 가지만 먼저 물어보기로 했다.
“그럼… 이 세계는 현실이 맞는 건가요? 게임 속 세상에 아니라?”
“게임? 무슨 게임?”
“그게 그러니까….”
오토가 쿠란에게 지구에 대한 이야기와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래, 그렇구나.”
쿠란이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녀석의 말이 무엇인지 알겠다. 네 녀석 입장에서는 굉장히 당황스러웠을 테지. 이해한다.”
“여기가 게임 속 세상이 아니라 진짜 현실이라는 말씀이신 건가요?”
“그야 당연히….”
쿠란이 오토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자기? 왜 또 칭얼거려?”
“……?”
“저번에 먹었던 미노타우로스 먹고 싶어서 그래? 오빠가 또 잡아다 줄까?”
오토가 말없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