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질퍽, 질퍽, 질퍽.
뒤틀린 황야에서는 괴수들이 실시간으로 태어나고 있었다.
갯벌로 변해 버린 땅을 뚫고 기어 나오는 모습이란, 정말이지 기괴했다.
보글보글!
갯벌 곳곳에 뚫린 공기구멍들이 마치 뜨거운 물처럼 펄펄 끓기도 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거야.”
오토는 뒤틀린 황야에서 태어나고 있는 괴수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머릿수를 감히 가늠하지 못했다.
땅속에 얼마나 많은 괴수들이 숨어 있는 건지 파악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어쩌면 수억 마리쯤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만약 정말로 수억 마리가 있다면.
그 수억 마리가 이오타 왕국으로 계속해서 쳐들어온다면.
오싹!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게임 영지 전쟁에도 구현되지 않은 일이라서, 오토로서는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예상을 완벽하게 비껴나간 변수인지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일단 보자.’
오토는 투시 권능을 끌어올려서, 뒤틀린 황야의 땅속에 뭐가 있는지 한번 알아보기로 했다.
투시는 두꺼운 벽도 훤히 꿰뚫어보는 권능.
거기에 더해 오토의 레벨이 많이 오르면서, 투스 능력은 더욱 강해져 있었다.
뒤틀린 황야의 땅 밑에 얼마나 많은 괴수들이 숨어 있는지, 상황이 어떤지 정도는 충분히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으으!
오토의 두 눈이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보인다.’
이윽고 뒤틀린 황야의 땅 밑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미, 미친!’
오토는 경악했다.
땅 밑에 족히 수백만 개는 되어 보이는 알들이 꿈틀꿈틀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뱀?’
오토는 알들 밑에 뭔가 거대하고 기다란 생명체가 똬리를 튼 채 잠들어 있는 것도 보았다.
꿈틀꿈틀!
그 생명체 역시 깨어나려는지, 조금씩 움직이며 생체활동을 일깨우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저 거대한 생명체도 땅을 뚫고 나와서, 무언가 커다란 재앙을 불러일으킬 것만 같았다.
문제는 지금 상황에서는 알들과 거대한 생명체가 깨어나는 것을 막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
“일단 복귀하죠.”
“예, 전하.”
우선 오토는 요새로 복귀하기로 했다.
뒤틀린 황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냈으니, 요새로 돌아가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해 보려는 것이다.
* * *
요새에서는 다시 전투가 한창이었다.
“전투 준비!”
“준비!”
이오타 왕국군은 몰려드는 괴수들에 맞서 각자의 무기를 움켜쥐고 다가올 전투를 준비했다.
오토가 성벽에 걸었던 마법이 풀리면서, 괴수들이 다시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요새로 복귀한 오토는 사태의 실마리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했다.
‘뭔가 단서가 있을 거다. 생각을 해 보자, 생각을. 이유 없는 일은 없어. 어떠한 사건에는 반드시 그 원인과 배경이 있어. 분명 어디엔가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다.’
오토는 스스로의 지론에 따라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던 중.
‘잠깐. 이 변수는 바루나의 물기둥을 옮겨 오면서 벌어진 거잖아?’
뭔가가 떠올랐다.
‘바루나의 물기둥이 사라지니까 뒤틀린 황야에 비가 왔고, 갯벌로 변한 거잖아. 그래서 이 사태가 벌어진 건가?’
바로 그때.
“전하, 설리번 남작이 전하를 뵙고자 찾아왔사옵니다.”
“설리번 남작이요?”
오토는 설리번이 찾아왔다는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설리번은 지금 수도에 있어야 했다.
오토가 아카데미의 교수 자리를 줘서, 앞으로 그곳에서 수업을 진행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요새까지 찾아왔다?
뭔가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전하를 뵙습니다!”
설리번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오토에게 무릎을 꿇었다.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 이리 달려왔사옵니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사태의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
“전하! 바루나의 물기둥을 다시 본래 자리에 가져다 놓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근거가 뭡니까?”
“예, 전하. 다름이 아니오라.”
설리번이 아주 오래돼 보이는 책을 꺼내 오토에게 보여 주었다.
“바루나의 물기둥은 고대인들이 대재앙을 봉인하기 위해 설치한 성물이옵니다.”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예, 전하.”
설리번이 고대문헌을 토대로, 오토에게 사건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사실 대홍수의 원인은 뒤틀린 황야에 봉인되어 있는 데우칼리온이란 고대의 괴물 때문이옵니다.”
“계속해보세요.”
“데우칼리온은 대홍수를 부르는 괴물로서, 수분이 없이는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사옵니다.”
“수분이 없이는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말이죠?”
“문헌에 따르면, 데우칼리온은 용족의 피가 흐르는 거대한 물고기이옵니다. 때문에, 수분이 없이는 활동이 불가능하옵니다.”
“그래서 비를 부르는 건가요?”
“예, 전하. 데우칼리온은 수분이 없으면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 잠에 빠져들었다가, 깨어날 때가 되면 스스로 대홍수를 일으켜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 했사옵니다. 대홍수는 그런 데우칼리온이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일으킨 재앙으로 추정되옵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이 데우칼리온을 봉인하기 위해 뒤틀린 황야에 바루나의 물기둥을 설치한 거고요?”
“바로 맞히셨사옵니다.”
“그럼 바루나의 물기둥을 다시 뒤틀린 황야에 가져다 놓으면, 데우칼리온이 깨어나는 걸 막을 수 있겠네요?”
“그렇사옵니다.”
오토는 비로소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의 추론과 설리번의 말을 들으니,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충분히 신빙성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역시 살려주길 잘했네. 사람이 좋은 일을 하면 복이 온다니까.’
사실 오토 입장에서는 설리번이 칼마르에게 죽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내버려 두었어도 딱히 문제될 게 없었다.
하지만 오토는 애꿎은 설리번이 거짓말쟁이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게 못내 마음이 걸렸었고, 체로키 왕국의 수도로 침투해 그를 구해내었다.
엄밀히 따지면, 오토가 바루나의 물기둥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과거 칼마르를 플레이하는 과정에서 설리번이 등장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런데 설리번이 이번 사태에 대한 해결 방법을 알려 주었으니, 오토 입장에선 천만다행이었다.
설리번을 구해내지 않았으면 사태를 해결할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더욱 큰 피해를 입었을 터.
“설리번 남작님.”
오토가 설리번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정말 큰일 해내셨습니다.”
“예…?”
“설리번 남작님의 연구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설리번 남작님께서는 본국의 영웅이십니다.”
“저, 저는 그저 학자로서 연구에만 집중했을 뿐입니다.”
“아닙니다.”
오토가 고개를 저었다.
“대홍수에 대해 알아내신 것도, 이번 사태에 대한 원인을 알아내신 것도. 수없이 많은 생명을 구해내신 겁니다.”
“하하… 하하하하.”
“설리번 남작님.”
“예, 전하.”
“현 시간부로 설리번 남작님의 작위를 본국의 공작으로 임명하겠습니다.”
“……!”
“또한, 설리번 남작님의 이름을 딴 새로운 아카데미를 세우고 교장 자리를 맡기겠습니다.”
“어, 어찌 그런 큰 상을 내리십니까? 전하!”
“구국의 영웅께 이 정도 포상은 당연히 드려야죠.”
오토의 말은 진심이었다.
대홍수야 그렇다 쳐도, 이번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낸 건 실로 어마어마한 공을 세운 것.
그러니 포상을 내리는 건 마땅히 해야 할 군주의 의무였다.
“더불어.”
오토가 덧붙였다.
“앞으로 향후 3대에 걸쳐 면세 혜택을 드리겠습니다.”
“헉!”
“이 정도면 설리번 남작… 아니. 설리번 공작님도 만족하시겠죠?”
“서,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설리번이 오토를 향해 넙죽 엎드려 절했다.
작위도 올려주고.
아카데미 교장 자리고 주고.
거기에 더해 면세 혜택까지 준다?
이는 오토가 설리번을 진정 영웅으로 인정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 위험한 곳까지 황급히 달려오시느라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아, 아닙니다.”
“포상은 사태가 해결된 후 정식 행사를 열어 진행하겠습니다.”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귀한 분이십니다. 수도까지 목숨을 걸고, 안전하게 모시도록 하세요. 본국의 공작님이십니다. 털끝 하나라도 다치시는 일도 없어야 할 겁니다.”
“예, 전하.”
오토는 설리번이 무사히 수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상의 경호를 해 주었다.
‘그래, 무력이 다가 아니지. 이런 학자들의 역할도 커.’
오토는 이번 일을 통해 인재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설리번과 같은 학자들은 전쟁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을지언정, 각자의 분야에서 이 세상에 이바지하는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세상 모든 사건·사고들을 힘으로만 해결하는 건 불가능하다.
때로는 설리번처럼 아무런 힘없는 사람이 세상을 구할 때도 있는 법이었던 것이다.
당장 와지르 대공만 해도 무력으로는 별 볼 일 없었지만, 특유의 외교력과 정치력으로 다른 나라들을 복속시키는 데 엄청난 공을 세우지 않았던가?
‘일단 수도로 가자.’
오토는 즉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리번의 공으로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낸 이상, 바루나의 물기둥을 다시 뒤틀린 황야에 가져다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 * *
관건은 왕궁 한복판에 설치한 바루나의 물기둥을 최대한 빨리 본래 있던 자리인 뒤틀린 황야로 가져다 놓는 거였다.
하지만 그 거대한 기둥을 뒤틀린 황야로 가져다 놓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뒤틀린 황야에서는 괴수들이 끊임없이 태어나고 있어서, 그 주변으로는 접근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상홍이었다.
처음 바루나의 물기둥을 가져왔을 때처럼 수레를 이용해 육로로 옮기는 것은 단언컨대 불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물이 다 빠져 버린지라 함대를 운용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오토는 바루나의 물기둥을 매우 빠르게 옮기는 게 가능했다.
육로가 막히고, 수로가 막혔다?
그럼 하늘길을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카심은 이번에도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출발!”
“귁! 귁귁귁!”
카심은 와이번 무리를 이끌고 수도로 날아갔다.
그런 뒤 밧줄로 와이번 무리와 바루나의 물기둥을 엮어서, 뒤틀린 황야로 운반했다.
덕분에 오토는 괴수들의 습격을 받지 않고, 바루나의 물기둥을 뒤틀린 황야까지 매우 안전하고 빠르게 옮겨 놓는 데 성공했다.
공중 병력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어마어마한 장점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역시 복덩이라니까?’
오토는 와이번 무리를 지휘하는 카심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어쩜 이리 예쁜 짓만 골라서 하는지.
어느덧 카심은 이오타 왕국에는 없어서는 안 될 빛과 소금 같은 존재로 성장해 있었다.
“전하! 거의 다 왔습니다!”
“귁! 귁귁귁!”
카심과 펭이가 저 멀리 뒤틀린 황야를 가리키며 소리칠 때였다.
우르릉!
콰앙!
갑자기 마른하늘에 시커먼 먹구름이 드리우는가 싶더니 천둥·번개가 몰아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갑자기 거센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갑작스러운 날씨의 변화 덕분에, 오토 일행의 비행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비바람이 너무 거세고 벼락이 쉴 새 없이 내리치는 바람에, 와이번 무리들조차도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철퍼덕!
철퍽, 철퍽!
요새로 향하던 괴수들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열심히 갯벌을 파내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를 꺼내 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발악한다 이건가?’
오토는 날씨가 급변하고, 괴수들의 움직임이 달라진 이유를 눈치챘다.
이제 막 깨어나려던 데우칼리온이 바루나의 물기둥의 존재를 느끼고, 그 전에 생체활동을 시작하려는 게 분명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