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이오타 왕국군이 아르곤 대제의 세력까지 흡수하고, 다른 반란군 지도자들의 항복까지 받아내자 로우레딘 왕국의 왕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결사항전해서 끝까지 싸우느냐.
아니면 항복하느냐.
어느 쪽이든 희망은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어느 쪽이든 선택을 해야 하기는 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이까.”
로우레딘 왕국의 국왕 해밀턴이 대소신료들에게 물었다.
“이대로 우리 왕조가 끝나는 것이오? 경들에게는 정말 아무런 방법이 없냐는 말이오?”
신하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 빨리 항복하는 게 여러모로 신상에 이로웠다.
버텨 봤자 피해만 늘어날 뿐, 패배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었으므로.
그러나 감히 항복을 논하기엔 섣불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
“이런 불충한!!!”
국왕 해밀턴의 입에서 불호령이 터져 나왔다.
“아무도 결사항전을 하자는 말을 않다니! 네놈들이 그러고도 이 나라의 귀족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과인의 입에서 항복하자는 말이 튀어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해밀턴 국왕의 분노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말은 어찌하면 좋겠냐고 물었지만, 그가 원하는 답변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결사항전.
어차피 끝날 왕조, 마지막 불꽃이라도 불태우고 싶은 게 해밀턴 국왕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하들이 선뜻 결사항전의 의지를 내비치지 않자 분노가 터져 나왔던 것이고.
“네놈들의 자리만 보전할 수 있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이 말이냐? 누굴 모시던 상관이 없느냐? 네놈들의 충성심은 다 어디로 간 것이냐는 말이다!”
국왕의 호된 질책에 신하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런 말도 못했다.
‘x발. 지가 나가서 싸우는 것도 아니면서.’
‘어차피 진 거 깔끔하게 항복하면 되지. 구질구질하게 버티네.’
‘그럴 날도 머지 않으셨소, 국왕.’
하지만 속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법.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당연히 결사항전해서 끝까지 싸울 것이옵니다!”
신하들은 속마음을 철저히 감추고, 해밀턴 국왕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주었다.
어차피 피는 젊은이들이 흘릴 텐데, 귀족들의 입장에선 국왕이 어떤 선택을 하든 딱히 상관없었다.
수도가 함락되면 가장 먼저 도망쳐서 항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전군! 전투준비를 갖추고! 수도를 방어하라!”
국왕은 아예 검까지 빼들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드러내었다.
대세가 이미 기울었음에도, 끝까지 자존심만은 지키려는 것이다.
* * *
그날 밤.
귀족들은 비밀리에 수도 어딘가에 자리한 살롱(Salon)에 모여 밀담을 나눴다.
“이건 미친 짓이오!”
“이미 망한 나라에 결사항전은 얼어 죽을!”
“이러다 우리까지 다 죽는 거 아니오?”
귀족들은 끝까지 싸우겠다는 국왕의 결정이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전에서 목이 뎅겅 날아가기 싫어서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척했을 뿐, 전쟁에 찬성하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로우레딘 왕국은 선대로부터 이어져 온 폭정 때문에 이미 몇 년 전부터 망조가 단단히 든 상태.
충신들은 진즉에 목이 떨어져 나갔고, 남은 귀족들마저도 애국심을 잃고 자기 배만 불리기에 급급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오타 왕국을 상대로 최후의 저항을 밀어붙이니, 귀족들의 입장에선 반발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말씀 좀 해 보십시오!”
“왜 아까부터 말을 아끼고 계십니까? 이러다 우리 다 죽습니다!”
귀족들이 한 사람을 향해 입을 모았다.
토르문트 백작.
로우레딘 왕국의 실세 중의 실세.
현재 로우레딘 왕국의 귀족들을 이끄는 건 사실상 토르문트 백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던 것이다.
“…….”
하지만 토르문트 백작은 입을 꽉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이 나라도 이제 끝이구나.’
토르문트 백작의 속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탐관오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로우레딘 왕국에 충성하는 애국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대를 이어온 왕실의 폭정과 현 국왕의 어리석은 모습에, 토르문트 백작은 이미 희망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리고 오늘.
토르문트 백작은 자신이 사랑하던 조국 로우레딘을 역사의 뒤안길로 떠나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매우 착잡한 상태였다.
“여러분들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토르문트 백작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로우레딘 왕국의 신하들로서, 마땅히 적들과 맞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만약 침략자들이 명분도 없이 이 땅을 침공해 온 것이었다면, 저는 목숨을 걸고 싸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와 함께 장렬히 최후를 맞이했겠지요. 하지만.”
토르문트 백작의 눈이 빛났다.
“이미 이 나라에는 꿈도 희망도 없습니다. 더는 이 왕조를 위해 우리가, 우리 젊은이들이 피를 흘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이상 이 왕조에 충성을 바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왕조가 바뀌더라도 우리와 우리 백성들은 고스란히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사실상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왕은 싸우기를 원하지만, 토르문트 백작과 신하들은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백성들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우선 오늘은 모두 돌아가십시오. 하루 이틀 내로 다시 회의를 소집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일을 벌일 수는 없었으므로, 토르문트 백작은 약간의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아무리 귀족들이 힘이 강하다고 한들 반란을 일으키고, 국왕을 체포하고, 나아가 폐위까지 시키는 일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한 며칠 정도는 철저한 준비와 계획을 거쳐 단숨에 해치워야 하는 게 반란이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국왕의 친위세력에게 역으로 당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후우.”
토르문트 백작은 귀족들이 돌아가자 홀로 살롱에 남아 술잔을 기울였다.
착잡한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어, 홀로 술이라도 마시고 싶었던 것이다.
* * *
“잠깐 앉아도 되겠습니까?”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토르문트 백작은, 낯선 청년이 말을 걸어오자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은 로우레딘 왕국의 핵심 귀족들만 이용하는 살롱으로서, 존재 자체가 비밀인 장소.
간판도 없었으며,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토르문트 백작의 가문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금발의 미청년은 어떻게 알고 이 살롱을 찾아왔단 말인가?
“앉게.”
토르문트 백작은 금발의 미청년이 심상치 않은 인물임을 깨닫고, 흔쾌히 자리를 권했다.
황홀하다고까지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잘생긴 미남자가 이런 은밀한 살롱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분명히 심상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 잔 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
토르문트 백작이 금발의 미청년에게 위스키를 따라주었다.
“음.”
금발의 미청년.
오토는 위스키의 향을 음미하고는, 토르문트 백작에게 말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토르문트 백작님.”
“자네는 누군가.”
“오토 드 스쿠데리아라고 합니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라면… 앗!”
토르문트 백작은 오토의 정체를 깨닫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지금 로우레딘 왕국을 침공해 온 나라의 국왕이 이렇듯 눈앞에 모습을 드러낼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 그대가 정말 이오타 왕국의 국왕이오?”
“그렇습니다.”
오토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여긴 어찌 알고 오시었소?”
“그게 중요한 건 아닐 겁니다.”
오토가 토르문트 백작의 잔에 위스키를 따라주며 말했다.
“그럼 뭐가 중요하오?”
“지금 생각하는 일을 실행에 옮기는 게 중요하겠지요.”
“생각하는 일이라….”
“지원하겠습니다.”
“……!”
“쿤타치 가문 출신의 마검사 100명을 드리겠습니다. 그 정도 병력이면 무난하게 생각하시는 일을 실행에 옮기실 수 있을 겁니다.”
“쿠, 쿤타치 가문의 마검사 100명을?!”
“그렇습니다.”
오토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백작께선 생각하시는 일을 무난하게 현실로 이뤄내실 수 있을 겁니다.”
“허허.”
토르문트 백작은 너무나도 놀라 그저 헛웃음을 지었다.
적국의 왕이 이렇듯 직접 발걸음을 한 것만 해도 놀라운데, 자신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을 줄이야.
“하시겠습니까?”
“예, 전하.”
토르문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토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미 결심을 한 이상 오토를 주군으로 모시기로 작정한 것이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나중에.”
오토가 고개를 저었다.
“충성 맹세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정식으로 받겠습니다.”
“…….”
“토르문트 백작.”
“예, 전하.”
“그대가 애국자인 걸 압니다.”
“……!”
“단지 현 국왕의 무능함에 실망했을 뿐.”
오토가 다 안다는 듯 토르문트를 위로해 주었다.
“만약 현 국왕이 유능한 인물이었다면, 그대 역시 결사항전을 각오하고 격렬하게 저항했을 겁니다.”
“저, 전하.”
“그대가 반란을 결심한 건 이미 망해 버린 왕조의 자존심을 세우겠답시고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울컥.
순간 토르문트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눈물을 쏟을 뻔했다.
해밀턴 국왕조차 알아주지 않은 마음을 적국의 왕이 알아주다니….
“잘 아시겠지만, 왕조가 사라진다 한들 이 땅의 백성들까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전하….”
“항복을 후회하는 일 없게 하겠습니다.”
“크흑.”
결국, 토르문트는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망국(亡國) 최후의 충신으로서, 피눈물을 흘리며 반란을 일으켜야 하는 사람의 속내는 그만큼 복잡했던 것이다.
* * *
오토는 토르문트의 저택으로 초대되었다.
사실 그건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만약 토르문트가 마음을 바꿔 먹는다면 오토는 꼼짝없이 인질이 될 테고, 그러면 이오타 왕국은 군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토가 굳이 로우레딘 왕국까지 와 토르문트를 직접 만난 이유는 그의 마음을 얻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쯤이면 체로키 왕국의 왕위 계승 작업이 끝나고 칼마르가 국왕이 됐을 거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우리부터 견제하려 들겠지.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도 매우 높고.’
칼마르는 게임 영지전쟁의 주인공 캐릭터인 100인의 군주 중 하나.
게다가 꽤 국력이 강한 나라의 국왕인지라, 상대하기가 쉽지 않은 인물이었다.
오토는 그런 칼마르가 이오타 왕국의 세력 확장을 내버려둘 리 없다고 판단했고, 어쩌면 로우레딘 왕국에 사람을 보내 귀족들을 포섭하려 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만약 칼마르가 토르문트에게 접근해 그의 마음을 산다면?
최악의 경우 로우레딘 왕국이 체로키 왕국에 항복해 버리는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칼리프 왕국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테지만, 시간이 예상보다 늦어지는 바람에 그런 변수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토는 로우레딘 왕국 귀족들의 구심점인 토르문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직접 움직였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토르문트는 오토를 극진히 대접했고, 더불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새벽이 되었다.
“전하, 시간이 늦었습니다. 어서 주무시지요.”
“그럴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오토는 토르문트의 저택에서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되었고, 편안한 잠자리에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혹시 모르니까.’
오토는 잠들기 직전 멀리 떨어져 있는 토르문트가 뭘 하고 있는지 슬쩍 훔쳐보았다.
칼립소의 권능인 투시 능력을 이용해 멀리 있는 토르문트를 지켜보았던 것이다.
레벨이 많이 올라서 그런지 투시 능력의 위력이 엄청나게 강해져서, 벽 몇 개 정도 꿰뚫어 보는 건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마나가 엄청나게 많이 소모되긴 했지만.
그러던 중.
‘어?’
오토는 토르문트가 급하게 옷을 다시 입고 어디론가 향하는 걸 발견하고, 살짝 놀랐다.
뭔가 일이 터지지 않은 이상 이 새벽에 급하게 옷을 입고 나갈 리 없지 않겠는가?
“잠깐 있어 봐.”
오토는 카미유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다.
토르문트가 딱히 감시를 붙이지 않아서, 몰래 침실을 빠져나오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오토에게는 투시 능력이 있었기에, 몰래 움직이는 건 일도 아니기도 했고.
‘누굴 만나서 뭐라고 얘기하는지 들어나 보자.’
오토는 토르문트가 있는 방 천장 위로 숨어들어가서,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