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4화
아침이 되었다.
엘리제는 곤히 잠들어 있는 오토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오토는 피곤했는지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고 마치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피곤할 만하지.’
엘리제는 오토가 왜 깨어나지 못하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오토는 피곤할 만했다.
지난밤.
그들은 밤새도록 사랑을 나눴으니까.
‘사랑을 나눈다는 게 이렇게 좋은 것이었을 줄은…….’
엘리제는 지난밤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도대체 몇 번이나 절정에 이르렀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온몸이 간질간질 파르르 떨리는 걸 보면, 지난밤 느낀 쾌감과 전율의 여운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게 분명했다.
“……음냐음냐.”
오토가 뒤척이며 눈을 떴다.
“……!”
엘리제는 황급히 다시 누워 자는 척했다.
막상 오토가 깨어나니 부끄러워서 도저히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으음.”
오토가 아기처럼 엘리제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엘리제는 미소를 지으며 그런 오토를 품에 꼭 안아 주며 조금 더 잠을 청했다.
그렇게 오토와 엘리제는 거의 점심때가 다 될 때까지 늦잠을 잔 후에야 침대를 벗어났다.
“…….”
“…….”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그건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잘 잤어?”
“……으응.”
“씻으러 가자.”
오토가 엘리제의 손을 잡아끌었…….
철푸덕!
오토가 볼썽사납게 나자빠졌다.
“괜찮은가!”
엘리제가 황급히 오토를 부축해 일으켰다.
“이, 이게 왜 이러지?”
“……?”
“자꾸 다리에 힘이…… 으윽!”
후들후들……!!!
오토의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너무 무리하다보니 하체 근육에 경련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하체운동에 좀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다.”
“하, 하체운동?!”
“그렇게 후들거리면 나중에 아기는 어떻게 갖나.”
“…….”
“몸에 좋은 것 좀 많이 챙겨주마.”
오토는 억울했다.
‘이게 하체운동이랑 무슨 상관이야!’
오토의 근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다만 어젯밤이 너무 격렬했을 뿐이었다.
* * *
한편, 오토와 엘리제가 폐관수련을 진행한 수련장 앞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오늘이 둘의 폐관수련이 끝나는 날이었기에, 꽤 많은 사람들이 마중을 나왔던 것이다.
“아니, 뺀질이는 도대체 언제 나오는 것이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카이로스의 물음에 카미유가 대답했다.
“늦는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쿤타치 가문의 가주 콘라드와 북부대공 지안카를로 역시도 오토와 엘리제를 마중 나와 있었다.
문제는 오토와 엘리제가 오후 늦게까지 나올 기미가 없었다는 것.
수군수군!
오죽했으면 마중 나왔던 사람들이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하고 걱정했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저녁이 다 되었을 무렵.
끼이익, 수련장 문이 열리고 오토와 엘리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카미유가 가장 먼저 오토에게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를 뵙습니다.”
오토의 신하들 역시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왕의 귀환을 맞이했다.
‘뭘 이렇게 많이 마중을 나왔어?’
오토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엘리제를 기다리고 있는 게 당황스러웠다.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행복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 기다려 주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인생을 잘못 살지 않았단 생각이 들었기에.
“고생했다.”
“그래, 성취는 좀 있었느냐.”
콘라드와 지안카를로가 다가와 말했다.
“할아버님을 뵙습니다.”
“할아버님을 뵙습니다.”
오토와 엘리제가 콘라드와 지안카를로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예, 많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너희가 폐관수련을 끝마친 걸 기념해 연회를 준비했다.”
“할아버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날 밤.
잘츠부르크 가문에서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뺀질이 이 자식아.”
카이로스가 아내 아리엘과 함께 다가왔다.
“어?”
오토는 아리엘의 품에 카이로스를 똑 닮은 아기가 안겨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으헤헤헤! 짐이 황녀를 보았노라!”
“와아.”
오토는 카이로스를 깔끔히 무시하고는, 아기를 살펴보았다.
아기는 인간인 카이로스와 엘프인 아리엘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 엘프였다.
‘무섭게 닮았네.’
아기는 아빠인 카이로스를 복제해 놓은 것처럼 닮아 있었다.
그런데 눈매만큼은 아리엘의 눈매와 똑같았다.
‘얘도 나중에 커서 한 성질 하겠네.’
오토는 카이로스와 아리엘의 딸이 부모님의 성격을 고스란히 물려받는다면, 대륙을 호령하는 여장부로 성장할 거라고 생각했다.
“전하.”
뒤이어 카미유가 자신의 아내와 함께 다가왔다.
“아.”
오토는 카미유의 아내 역시 아리엘과 마찬가지로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걸 보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내 조카야?”
“예, 딸입니다.”
“아.”
카미유의 딸 역시 카미유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전하! 전하아!”
뒤이어 카심이 드루이드 여인인 미야와 함께 나타났다.
“아, 카심 경.”
“신 카심이 전하를 뵙습니다.”
“그런데 옆에는…….”
오토는 미야의 품에 아주 작은 신생아가 안겨 있는 걸 보고 당황했다.
“하하, 조금 일찍 태어났습니다. 제 딸입니다.”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카심이 부끄럽다는 듯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 그러니까.”
오토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카심도 결혼했다고요?!”
“아직 식은 못 올렸습니다. 드루이드들의 전통 혼례에 따라서 올리긴 해야 하는데, 전하께서 계시지 않는데 신이 어찌 식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
“미처 보고 드리지 못했는데, 이제 보고 드립니다. 신 카심, 툰드리아의 왕이 되었습니다.”
“……맙소사.”
오토는 생각하기를 포기해 버렸다.
‘툰드리아를 맡겨 놨더니 왕이 돼? 그리고 애까지 생겼다고?’
하여간 기묘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오토야, 그간 고생이 많았다.”
“정말 고생했단다.”
쿠란과 아드리아나 부부 역시 용인(龍人)인 아기를 데리고 와서 오토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심지어…….
“전하를 뵙습니다. 여긴 제 아내입니다.”
“전하를 뵙습니다.”
드레이크가 다가와 만삭의 아내를 소개했다.
“흠흠. 흠흠흠. 동생 그간 수고 많았어.”
“오래간만이에요.”
케레스와 쿠사키나도 오토에게 인사했다.
쿠사키나의 배가 불룩 튀어나와 있는 걸 보면, 그렇게 말렸는데도 이미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아직 로웨나와 파혼도 이뤄지지 않았는데 사고부터 칠 줄이야…….
“다들 축하합니다.”
오토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동료들의 출산, 결혼, 임신을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들 이렇게 행복하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오토는 잔뜩 심통이 나서 입을 삐죽였다.
‘나만 아기 없어…….’
오늘따라 주변 인물들이 무척이나 부러운 오토였다.
* * *
그날 밤.
연회가 끝나고, 오토는 엘리제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다들 행복해 보여.’
오토가 행복해하는 주변 인물들의 표정을 떠올리며, 무의식적으로 쿠란의 자루를 어루만졌다.
“혹시.”
오토가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시종을 불렀다.
“예, 전하.”
“담배 있어요?”
“아, 예. 있습니다.”
“한 대만 주세요.”
오토는 아주 가끔, 1년에 한두 번 정도 담배를 피울 때가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였다.
“여기 있습니다.”
오토는 시종이 담배를 건네주자 그것을 입에 물고, 손가락을 튕겨 불을 댕겼다.
“후우.”
뿌연 담배 연기가 흩어졌다.
곧 큰 전쟁이 다가온다.
북부제국의 침공은 임박했고, 얼마 가지 않아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터.
‘많이들 죽거나 다치겠지.’
꼭 주변 인물들만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가족을 잃게 될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걸 생각하면, 오토의 가슴 속은 마치 무거운 돌덩어리를 매단 것처럼 무겁기만 했다.
‘내 손에 많은 이들의 행복이, 운명이 달렸다.’
오토는 이 거대한 전쟁을 지휘하는 자.
그런 만큼 부담감이 큰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번 전쟁에 참여하는 수십만 명의 목숨이 오토의 손에 달려 있을뿐더러, 그들의 가족까지 생각한다면 그 이상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웃고 싶어도 웃음이 잘 나지 않았고, 마냥 연회를 즐길 수가 없었다.
그 무게감을 알기에…….
“여기 있었나.”
“아.”
오토는 엘리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황급히 담배를 비벼 끄려 했다.
“괜찮으니 마저 피워라.”
엘리제는 오토가 담배를 피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오토가 상시 흡연자도 아니었고, 무거운 마음을 달래고자 딱 한 대 정도를 피운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 찾았다.”
“하하.”
“여전히 마음이 무겁나.”
“무겁지.”
오토가 희게 웃었다.
“힘들다는 건 아니고. 단지…….”
“책임감 때문이라는 거, 안다.”
“책임감이라…….”
“나 역시 야만부족과 싸울 때는 그런 기분이었다. 내 손에 아군 장병들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 늘 마음이 무거웠다.”
역시나 엘리제는 오토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있었다.
“잘 해낼 거다.”
엘리제가 오토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잘 준비하지 않았나.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거 아닌가.”
“그건 맞지.”
“그래, 그럼 된 거다.”
엘리제가 미소를 지으며 슬며시 오토의 손을 잡아 주었다.
“아무도 죽지 않을 거다.”
“……!”
“너도, 나도.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건 당연하지.”
오토가 엘리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젠 내가 자기를 지켜줄 거야.”
오토의 그 말에 엘리제의 가슴이 쿵쾅쿵쾅 두방망이질을 쳤다.
그녀는 살면서 그 누구에게도 보호받아본 적이 없었고, 감히 그녀를 지켜주겠다는 사람 또한 없었다.
하지만 오토는 달랐다.
오토는 엘리제를 지켜주겠다 말했다.
그 말이 엘리제를 설레게 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사람. 세상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으면서도 혼자 힘들어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
만약 오토가 힘겨워하면서 무너지고,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면 엘리제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오토는 아니었다.
오토는 결코 나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강인했다.
어떻게든 북부제국의 침공과 세계대전을 저지하고, 주변 인물들을 지켜내겠다는 굳은 의지를 품은 남자였다.
겉으로 보이는 가벼움 속에 강인함은 품은, 전형적인 외유내강이었던 것이다.
“피곤하다. 이제 그만 자러 가자.”
엘리제가 오토를 잡아끌었다.
“으응?”
“혼자 자기 싫다. 가자, 내 방으로.”
“어어? 어어어?”
그렇게 오토는 엘리제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 * *
다음 날 아침.
“으어어어어어…….”
오토는 마치 좀비처럼 터벅터벅 지휘부에 출근했다.
‘차, 착즙 당했어.’
간밤에 엘리제와 뜨거운 밤을 보낸 것까지는 정말 좋았는데, 체력소모가 가히 어마어마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고, 처음 한 번이 어렵다더니 일단 물꼬가 트이고 나니 벌써부터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몸에 좋은 거라도 챙겨 먹어야지. 이러다가 며칠 못 가서 미라가 될지도 몰라.’
오토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하.”
카미유가 다급히 다가와 말했다.
“북부제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
“늦어도 한 달 안에 해군기지를 떠나 흑해를 건너올 것 같답니다.”
“아.”
오토의 표정이 돌연 진지해졌다.
때가 왔다.
올 것이 오고 있다.
“지금 즉시.”
오토가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군에 전투준비태세를 발령하고, 지휘부를 소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