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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0화

한순간에 녹아내린 영겁의 호수는 탐욕스럽게 북부제국군을 집어삼켰다.

촤아아!

첨벙첨벙!

풍더엉!

“크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어푸! 어푸어푸!”

호수에 빠진 북부제국군들은 처음에는 몸부림치다가, 이내 곧 잠잠해졌다.

영겁의 호수의 수온(水溫)은 영혼마저 얼려버릴 정도로 차가운 것.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온도가 낮은 것이 아니었다.

영겁의 호수는 고대의 마법에 의해 이루어진 곳인지라, 물 또한 그저 차갑기만 한 물과는 그 궤가 달랐던 것이다.

“…….”

“…….”

“…….”

그런 이유로, 영겁의 호수에 빠진 북부제국군 장병들은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아 심장마비나 저체온증으로 인해 동사(凍死)하고 말았다.

트리톤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적게는 수십 톤에서 많게는 수백 톤의 무게를 가진 트리톤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영겁의 호수 밑바닥까지 가라앉아 버렸다.

1,500기나 되는 트리톤들 중 1,000기가량이 눈 깜짝할 사이에 침수되어 수장당한 것이다.

그렇듯 최전방에서 야만부족들을 뒤쫓던 북부제국군 20만 대군 중 5만은 허무하게 증발해 버렸다.

“마, 맙소사!”

“이건 재앙이야!”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살아남은 북부제국군들은 그 광경을 보고 완전히 공포에 지배당해 버렸다.

수만 명이 눈앞에서 수장되는 걸 지켜본다는 건 어지간한 담력으로도 쉽지 않은 일.

게다가 아직 살아남은 이들 또한 그렇게 될 거라는 공포감에 사로잡혀서 도저히 전투를 지속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

북부제국군의 총사령관 이고르 공작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그저 탄식했다.

덜덜덜!

그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조차 영겁의 호수에 빠져 죽을 뻔한 걸 겨우 빠져나온 상태라 저체온증으로 인해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북부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인지라 살아나올 수 있었던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생존은커녕 다른 장병들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호수에 집어삼켜졌을 터.

“후, 후퇴하라.”

이고르 공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저, 전 병력! 신속하게 후퇴하라! 후퇴하라!”

지금 이고르 공작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은 그것뿐이었다.

부지불식간에 1,000기가 넘는 트리톤을 잃었고, 수만 명의 병력마저 잃어버렸다.

물론 더 싸울 수도 있겠지만, 이미 사기가 꺾일 대로 꺾인 군대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멀쩡한 곳도 언제 무너지고 녹아내릴지 모르는데, 계속 추격한다는 건 미친 짓이었다.

일단은 후퇴해서 재정비하는 것만이 북부제국군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것이다.

“후퇴! 후퇴하라!”

“이 개자식들아! 빨리 후퇴해!”

“으아아아악!”

그렇게 북부제국군은 정신없이 내달리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보게! 오토 국왕!”

라그나르가 오토를 독촉했다.

“뭐 하는가! 어서 저들을 쫓아야지!”

“가게 두죠.”

“아니, 이런 절호의 기회를 왜 놓친단 말인가! 놈들의 씨를 완전히 말려 버릴 기회인데!”

라그나르는 오토가 자비를 베푸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상황이 그랬다.

수만이 아니라 북부제국군 전체를 궤멸시킬 수도 있는데, 이런 절호의 기회를 그냥 날려 버리는 오토의 판단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끝장을…….”

“그냥 가게 두면 됩니다.”

오토가 조용한 목소리로 라그나르를 타일렀다.

“가게는 두지만,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습니다.”

“으음?”

“더는 죽이고 싶지 않을 뿐.”

그렇게 말하는 오토의 입가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다.

수만 명을 수장시키고도 웃을 수 있다면, 그건 이미 피를 갈망하는 전쟁광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오토는 아니었다.

아무리 전쟁이라지만, 이만한 대학살극을 벌이고도 웃는다는 건 오토의 성격상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오토는 야망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었으니까.

물론 마음이 약해져 더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거나, 슬퍼하는 건 결코 아니었다.

또다시 이러한 상황과 마주한다면, 오토는 얼마든지 전쟁을 수행해낼 수 있었다.

그저 싫을 뿐이었다.

이렇듯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게.

펄럭!

오토가 다시 대학살의 서를 펼치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수장되었던 북부제국군들의 시체와 트리톤들이 수면 아래에서 솟구쳐 올랐다.

쩍!

쩌억!

이윽고 영겁의 호수가 다시 얼어붙었다.

오토에 의해 강제로 되돌려졌던 시간이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수 미터에 달하는 빙판이 된 것이다.

“카미유.”

“예, 여기 있습니다.”

“트리톤들은 노획하고, 북부제국군의 시신은 잘 수습해서 돌려보낼 준비를 해.”

“명을 받들겠습니다.”

오토는 전사한 북부제국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만은 지켜주기로 했다.

* * *

북부제국군의 시신을 수습하고 트리톤들을 노획하는 사이.

“신호탄을.”

“알겠습니다.”

오토의 명령에 마검사가 하늘 높이 신호탄을 쏘아 올랐다.

오토는 말했다.

가게는 두지만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다고.

그렇다는 말은, 북부제국군의 후퇴가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뜻이었다.

같은 시각.

피유우우우우우웅!

펑! 퍼엉!

신호탄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며 반짝이던 순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평야에서 좌측으로 약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

“알겠다, 뺀질아.”

카이로스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이오타 왕국군과 영혼기사들, 그리고 오크 전사들이 엄중한 군기를 유지한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개중에는 신성 아즈란 성국의 성기사들까지 상당수 섞여 있었다.

“전군, 작전 지역으로 이동한다.”

카이로스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이오타 왕국군을 중심으로 한 군대가 북부제국군의 후방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라드 제국군 역시 마찬가지.

“작전 지역으로 이동하라!”

이오타 왕국군과는 정반대의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라드 제국군도 엘리제의 명령에 따라 북부제국군의 후방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로서 오토의 전략은 완성되었다.

오토가 영겁의 호수에서 북부제국군의 본대를 후퇴하도록 만드는 동안 이오타 왕국군이 좌측으로 돌아가고, 아라드 제국군이 우측으로 돌아감으로써 무려 세 방향에서 포위하는 구도가 연출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북부제국군에게는 그야말로 대재앙이 되었다.

“초, 총사령관 각하!”

이고르 공작은 정신없이 후퇴하는 던 중 보고를 받았다.

“좌측과 우측에서 대규모 병력들이 덮쳐 오고 있습니다.”

“뭐, 뭐라?”

“보소서!”

“이, 이 무슨……!”

이고르 공작은 그만 기절할 뻔했다.

좌측.

두두두두두두!

명마 중의 명마인 타타르 품종의 전마(戰馬)를 탄 이오타 왕국의 기병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쿵쾅쿵쾅쿵쾅!

파지지지지직!

그리고 거대한 멧돼지를 탄 오크 전사들도 함께였다.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는 것.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북부제국 놈들을 쓸어버리자!”

오른쪽에서는 무수히 많은 아라드 제국군이 성난 파도처럼 덮쳐오고 있었다.

“아…… 아아…….”

이고르 공작은 어떠한 명령도 내리지 못했다.

답이 없었다.

혼비백산해서 후퇴하던 군대가 기습을 당했다?

그것도 포위로?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트리톤들이 있었기에 최소한의 저항은 할 수 있을 테지만, 그렇다 한들 전투에서 승리하는 건 단언컨대 불가능했다.

“트리톤 기수들은 총사령관 각하를 엄포하라!”

“신속히 퇴각한다!”

“최대한 맞서 싸우면서 이동하라!”

그나마 유능한 장교들 몇몇이 북부제국군 장병들을 독려하며, 이고르 공작과 함께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 역시 불가능했다.

불행히도, 이 전장에는 강자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크하하하하하하하하!”

쿤타치 가문의 가주이자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마검사라 불리는 콘라드는 정말이지 오래간만에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며 무력을 뽐냈다.

그 모습이 마치 핏빛 혈검(血劍)을 휘두르는 붉은 마왕과도 같았다.

“끌끌! 어딜 감히 짐이 세운 장벽을 부수려는가!”

카이로스 역시 전장을 휘저으며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내었다.

“보아라. 이것이 잘츠부르크 가문의 검이니라.”

북부대공 지안카를로도 이번 전투에 참전해 평생을 갈고 닦아온 자신의 무력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단연코 돋보이는 건 역시나 엘리제였다.

그녀는 자신이 왜 전쟁의 여신이라 불리는지, 어째서 무적에 근접한 검의 신(神)이라 불리는지를 모두에게 확실히 각인시켰다.

촤아아―!

일검(一劍), 엘리제가 검을 휘둘렀다.

그 결과.

쿵! 쿠웅!

와르르!

엘리제의 앞을 가로막았던 십여 기의 트리톤들이 일제히 두 동강이 되어 허물어졌다.

단 한 번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북부제국의 결전병기이자 전략병기인 트리톤 십여 기가 무력화된 것이다.

“죽이고 싶지 않다, 항복하라.”

바로 그때.

쿵쾅쿵쾅쿵쾅!

한 기의 트리톤이 엘리제를 덮쳤다.

우우우웅!

그런 트리톤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그 의미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자폭.

엘리제가 대적 불가의 상대인 걸 깨닫고 스스로를 희생해 같이 죽으려는 것이다.

퍼어어어어엉―!!!

트리톤이 대폭발을 일으키려던 순간.

- ……!

자폭을 감행하려던 파일럿은 순간적으로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문제는 그게 단순히 느낌이 아니라 진짜 벌어진 일이었다는 것.

“무의미한 희생에 불과하다.”

엘리제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 순간.

촤라라!

트리톤이 수백, 수천 조각으로 갈라져 허물어졌다.

그것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

그녀의 검술은 이미 마법과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그 경계가 희미해진 상태였다.

시공간을 지배하는 검.

무신(武神)의 경지에 이른 엘리제는 자신의 주변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걸 넘어, 인위적으로 제어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엘리제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촤라라라라라라―!!!

엘리제가 하늘을 향해 검을 휘저었다.

그러자 정말이지 놀라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러로 이루어진 그물이 하늘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 그물이 북부제국군의 머리 위로 뚝! 떨어져 내리며 수천 명에 달하는 북부제국군과 수십여 기의 트리톤들이 쓰러졌다.

천라(天羅)의 검.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전장을 뒤덮는 천라지망을 만들어낸 것이다.

* * *

“……맙소사.”

뒤늦게 합류한 오토는 엘리제가 활약하는 광경을 보고 그냥 검을 내려놓았다.

“하, 항복!”

“제발 살려 주십시오!”

이미 북부제국군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하나둘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 의사를 표시하고 있었다.

엘리제가 전력을 드러낸 이상 오토가 끼어들 만한 구석이 없었던 것이다.

‘……봐준 거였구나.’

폐관수련을 거치며 어느 정도 근접했다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던 모양이었다.

전력을 드러낸 엘리제의 실력, 아니 강함은 오토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하긴.’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끝도 없이 강해지는 사람이긴 하지.’

엘리제는 무적의 숙명을 타고난 자.

애당초 그녀의 존재 이유는 이 세계의 누군가를 상대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어쩌면 오토는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창조주로부터 이 세계를 수호해야할 책임과 의무를 부여잡은 종족인 드래곤들이 거의 멸종이 이른 지금.

제3세계로부터 이 세계를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은 엘리제만이 유일했기에…….

“저, 저런 분과 결혼하시는 겁니까?”

곁에 있던 카미유가 오토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하하, 하하하.”

오토는 그 말에 그저 헛웃음을 지었다.

“평생 긴장 바짝 하고 사셔야겠습니다.”

“……아무렴.”

오토는 엘리제에게 혼나기 싫어서라도 인생 똑바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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