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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이런 젠장!”

화장실을 뛰쳐나간 카이로스는 함께 술자리를 하던 카심, 펭이, 칼드웰 그리고 마검사들에게 소리쳤다.

“이놈들아! 다 남자다! 남자란 말이다! 여긴 꽃밭이 아니다! 고추밭이란 말이다!”

그러자 펭이에게 포도를 먹여 주던 카심이 그게 뭐가 문제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멍청한 놈아! 여기 있는 여자들은 사실 다 남자다! 시커먼 사내놈들이란 말이다! 꽃밭이 아니었어! 고추밭이었단 말이다!”

“설마 모르셨습니까?”

“…으응?”

“저희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만.”

카심이 주변을 슥 둘러보며 대답했다.

끄덕끄덕!

술자리를 함께하던 사람들 모두 이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 무슨?”

카이로스는 다들 하렘의 진실에 대해서 알고 있자 당황했다.

“그, 그럼 짐만 몰랐다는 말이냐? 짐만 고추밭인 줄 모르고 즐기고 있었다는 것이야! 카심 네 이놈! 어서 대답하지 못할까!”

“저희는 전하께서 알려 주셔서 알았습니다.”

“뭣이?”

“그래서 마음 편하게 술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지요. 하하하.”

카심이 수더분하게 웃었다.

“사실 저도 여성 접대부들이 나오는 유흥업소 같은 곳은 딱 질색입니다. 그런 문화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이…!!!”

“아시다시피 본국의 공무원들은 여성 접대부들이 나오는 업소에는 얼씬도 하지 못합니다. 그럼 바로 파면이지요. 어르신도 아시다시피, 전하께서 유흥에 대해서 아주 엄격하시지 않습니까?”

카심의 얼굴에 오토에 대한 존경심이 떠올랐다.

“그래서 저는 전하를 존경합니다. 그런 잘못된 문화를… 꾸웨에에엑!”

눈치 없이 오토를 칭송하던 카심은, 카이로스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고 말았다.

“이 자식들이! 감히 뺀질이 놈과 짜고 짐을 놀려?”

카이로스가 몽둥이를 꺼내 들었다.

“어, 어르신!”

“그런 게 아닙니다! 저희는 몰랐습니다!”

“저희는 어르신도 알고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오타 왕국의 수뇌부들은 최선을 다해 카이로스에게 해명했지만, 이미 꼭지가 돌아버린 그를 막는 건 불가능했다.

쒸익쒸익!

혼자만 속아 넘어갔단 생각을 하니 도저히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냐! 오늘 짐이 왜 식인황제라고 불렸는지 아주 똑똑히 가르쳐주마!”

카이로스가 이오타 왕국의 수뇌부들을 향해 덤벼들고.

“으아아아아악!”

“사, 살려 주십시오! 어르신!”

“튀어!”

이오타 왕국의 수뇌부들은 마치 바퀴벌레들처럼 사방팔방으로 도망쳤다.

카이로스가 꼬장을 부리기 시작한 이상 붙잡혔다간 먼지 나게 얻어터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 * *

몇 분 전.

“대륙에 퍼져 있는 하렘에 대한 소문은 사실 몇백 년 전 이야기거든요. 상식적으로 왕궁 한복판에 매음굴이나 다름없는 유흥시설이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오토는 엘리제에게 하렘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풀어놓으며 최선을 다해 <해명> 했다.

“그런 하렘이 있긴 했거든요? 지금 왕조 말고. 이스마일족 왕조 때 그렇게 운영됐던 적이 있었죠. 술탄이 온종일 하렘에 처박혀 유흥이나 즐기는데 그 결과가 어땠겠어요? 당연히 나라가 폭삭 망해 버렸죠. 덕분에 반란이 일어나 파미르족 왕조가 들어선 거고요.”

“그런 거였나?”

“그럼요.”

오토는 엘리제가 수긍하는 기색을 보이자 더욱 열심히 하렘의 역사에 대해 설명했다.

“지금 파미르 왕조는 당시 하렘이 일으켰던 폐단을 반면교사 삼아서, 유흥적인 요소를 완전히 없애 버렸고요. 대신 완전히 없애 버리긴 좀 아쉬웠는지, 남장여자들이라도 투입해서 구색이라도 좀 맞춰 보자는 게 지금 하렘입니다.”

“그럼 하렘에 대한 소문들은.”

“500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랬군.”

엘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남자들만 득실대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오토는 엘리제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남자와 여자는 마나의 기운이 미세하게 다르다. 작은 차이지만.”

과연 엘리제.

무희들에게 아무리 여장을 잘 시켜 놓았다고 한들 그녀의 눈을 피해 갈 순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절대 한눈 판 거 아닙니다!”

오토가 손사래를 쳤다.

“말씀드렸다시피 카이로스 그 양반이랑 카미유 형을 골려 주려고 그랬던 거예요! 제 부하들한테는 이미 다 얘기해 놨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난 단지 네가 그런 취향이 아닌가 걱정되었을 뿐이다. 만약 정말 그런 취향이라면….”

엘리제가 다소 염려스럽다는 듯 말했다.

“절대, 절대로 아닙니다.”

오토가 딱 잘라 말했다.

“제 취향은 확고합니다.”

“정말인가?”

“맹세합니다.”

엘리제는 그제야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휴. 죽는 줄 알았네. 으으으.’

오토도 그제야 긴장을 풀고 마음을 내려놓았다.

카이로스와 카미유를 골려 주려다 저승길 문턱까지 갈 줄이야.

“약속드릴게요.”

오토가 엘리제의 손을 맞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눈팔지 않기로.”

“한때 방탕한 생활을 즐기지 않았나. 매음굴에도 자주 드나들었다고 들었는데.”

그 순간.

‘오토 이 개자식아! 너 때문에 내가 의심받잖아!!!’

오토는 속으로 이 몸의 진짜 주인을 향해 쌍욕을 퍼부어 대었다.

한편으로는 억울했다.

저지르지도 않은 일 때문에 괜한 의심을 받고, 해명까지 해야 하다니.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오토의 입에서 다소 울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는 제가 좀 미쳤었나 봐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그땐 제가 사악한 마녀의 저주에 걸려 있었거든요.”

“믿는다.”

“네?”

“좀 불안하긴 하지만. 그동안 내가 본 너는 그런 곳에 드나들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주에 걸려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믿겠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토는 울컥! 감정이 복받쳐 올라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엘리제에게 고마워했다.

“근데 왜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건.”

엘리제는 순간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설마 제가 하렘에 갈까 봐 걱정돼서 달려오신 거예요? 그 먼 거리를?”

“아, 아니다.”

“에이~ 맞는 거 같은데~”

“수, 술탄이 널 강제로 하렘에 데려가면 곤란하지 않은가!”

엘리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엘리제 님이 질투를?!’

오토는 놀라워하면서도 엘리제의 반응이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

“큭큭큭.”

“왜, 왜 웃는 건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큭큭.”

“…….”

“그래도 좋네요.”

“뭐가 좋다는 건가?”

“있어요, 그런 게.”

오토는 엘리제의 인간적인 면을 본 것 같아서,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한평생 오직 검밖에 모르던 여자.

섭리의 선택을 받은 자.

그런 숙명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인간성을 유지하기 힘들 법도 하련만….

“좀 걸을까요? 선선하니 걷기 딱 좋네요. 술도 깰 겸.”

칼리프 왕국의 수도 알살람의 밤은 매우 시원했다.

낮에는 뜨거운 볕이 내리쬐어 50까지 올라가는 일이 흔하지만, 밤에는 매우 선선한 게 알살람 기후의 특징.

공기는 맑고, 달은 밝았다.

걷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산책을 하자는 이야기인가?”

“네.”

“나쁘지 않다.”

“그럼 걷죠.”

오토는 미소를 지으며 엘리제와 함께 칼리프 왕궁을 거닐었다.

“근데 말이다.”

엘리제가 오토에게 물었다.

“손은 왜 계속 잡고 있는 건가?”

“아.”

아까 약속을 한답시고 덥석 잡았던 손을 아직 놓지 않고 있었던 모양.

“놓을까요?”

“굳이 놓지는 않아도 된다.”

“그럼.”

오토가 미소를 지었다.

달빛은 받은 그 수려한 얼굴이 은은하게 빛났다.

“계속 잡고 있죠.”

“…좋다.”

* * *

엘리제는 이른 새벽 오토의 곁을 떠났다.

“나중에 다시 오겠다.”

“좀 더 쉬었다 가시지 않고요.”

“급하게 오느라 일정이 꼬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조는 지킬 테니까요.”

오토는 떠나는 엘리제를 다시 한번 안심시켜 주었다.

“엘리제 님은 장벽 너머에서 큰일을 하시는 분이잖아요. 속을 썩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되고요. 제가 안에서 잘해야죠.”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다.”

“조심히 가세요.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피곤하시면 중간중간 쉬었다 가시고요.”

“알겠다. 그럼, 이만 가 보겠다.”

엘리제는 그렇게 말하더니 신기루처럼 스르륵 하고 사라져 버렸다.

마치 마법처럼.

“…볼 때마다 어마어마하네. 더 강해지신 거 같은데.”

오토는 엘리제가 자취를 감추자 혀를 내두르며 놀라워했다.

‘엘리제 님 앞에서는 한없이 조신하시군.’

카미유의 눈에 비친 오토의 모습은, 마치 바깥양반을 배웅하는 정숙한 아녀자와 같았다.

‘평생 잡혀 사시겠군.’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반대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다.

약혼자·약혼녀 관계를 넘어 부부의 연을 맺는 게 우선이겠지만.

“어우. 피곤해. 이제 좀 자야지.”

오토가 이제 막 침대로 향하려는데.

벌컥!

카심과 펭이가 문을 박차고 들어와 소리쳤다.

“전하! 어서 피하십시오! 어르신이 전하를 때려죽이겠다며 쫓아오고 계십니다!”

“귁! 귁귁귁!”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쨍그랑!

카이로스가 창문을 깨고 오토의 침실에 난입했다.

“이 뺀질이 놈! 감히 짐을 놀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몽둥이찜질을 해 주마!”

카이로스가 오토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으아아아악!”

눈을 붙이려던 오토가 비명을 지르며 침대를 뛰쳐나왔다.

우당탕탕!

와르르르르르!

그렇게 하렘 사건은, 오토와 카이로스의 새벽 난투극과 함께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었다.

* * *

다음 날 오후.

“끄응.”

오토는 낑낑대며 잠에서 깨었다.

새벽에 분노한 카이로스와 한바탕 하느라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살라딘 왕세자 부부가 시종을 보내 전하께 초대를 청했습니다.”

“언젠데?”

“1시간 뒤입니다.”

“그래? 알겠어.”

“괜찮으시겠습니까? 힘드시면 저녁으로 미루시는 게.”

“아냐. 괜찮아.”

오토는 욱신욱신 쑤시는 삭신을 부여잡고, 겨우 침대를 벗어나 몸단장을 시작했다.

살라딘 왕세자 부부를 만나러 가는 길.

“본국으로 언제 복귀하실 예정이십니까?”

“글쎄.”

오토는 확답을 해 주지 못했다.

“좀 더 길어질 거 같기도 하고.”

“이미 거래는 끝나셨잖습니까.”

“그건 맞는데. 상황이 안 좋아서. 내가 뭔가 해 줘야 할 수도 있어.”

“예?”

“두고 보면 알아.”

카미유에게 말한 것처럼, 오토는 지금 상황을 아주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연회에 초대받지 못할 정도면 예상보다 미운털이 더 심하게 박혀 있다는 증거다. 예상보다 빨라. 어쩌면 변수일 수도.’

오토가 아는 살라딘의 시나리오와 실제 펼쳐지는 사건 흐름이 속도 차이가 매우 심했다.

‘만약 이게 진짜 변수라면. 칼리프 왕국의 정세는 내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럼 골치 아파져. 칼리프 왕국은 세계 최대의 마정석 생산국이자 수출국이야. 다가올 세계대전에서 칼리프 왕국의 역할을 생각해 보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라딘 부부의 궁궐 앞에 도착했는데.

“네놈이 그러고도 우리 파미르 왕조의 왕세자라 할 수 있느냐!!!”

저 안쪽에서부터 분노한 압둘 2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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