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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화

오토가 이오타 왕국군을 사열하고, 지휘하는 걸 본 엘리스는 솔직히 놀랐다.

15,000명.

적다면 적은 병력이다.

그러나 건장한 체격에 군기가 바짝 들어 있는 기사들.

그리고 병사들이 일제히 한 쪽 무릎을 꿇고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치는 모습이란, 정말이지 멋이 있었다.

‘이런 강해 보이는 군대를 지휘하다니… 당신 보통 사람이 아니었군요.’

엘리스는 오토를 다시 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납치와 협박을 일삼는, 얼굴만 잘생긴 범죄자인 줄 알았건만….

“저기….”

엘리스가 오토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마그리트 왕국의 수도로 가야죠.”

“수도를… 공격하실 생각이신가요?”

“함락시킬 생각인데요?”

“네에?”

엘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불가능해요.”

“왜요?”

“당신의 군대가 강하다는 건 인정해요. 그건 병사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어요. 행군 속도도 빠르고요.”

과연 헬무트의 딸.

엘리스는 어려서부터 사나운 유목민들과 맞서 싸우던 군인들을 보고 자라 와서 그런지, 한눈에 이오타 왕국군이 강한 군대임을 알아보았다.

“보는 눈은 있으시네요.”

오토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 군이 강한 걸 알아볼 줄은 몰랐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엘리스가 단호히 말했다.

“아무리 강한 군대라 할지라도, 이 정도 숫자로 마그리트 왕국의 수도를 함락시키는 건 불가능합니다. 터무니없는 작전이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그걸 몰라서 묻는 건가요?”

“몰라서 묻는 거 맞는데요?”

“…….”

“말씀해보시죠. 왜 터무니없는 작전이라고 말했는지.”

“상식적으로!”

엘리스의 입에서 살짝 성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작 15,000명으로 수도를 함락시키는 게 가능하다고 보시는 건가요? 방어도 아니고 공격이잖아요! 몇 배는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해도 모자랄 판에! 너무 무모해요! 다 죽어요! 당신은 많은 피해를 입고 후퇴해야 할 거에요!”

“네~”

오토가 대답했다.

“지극히 원론적이고 교과서적인 말씀, 잘 들었습니다.”

“뭐라고요?”

“끝인가요?”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제가 기사가 아니라고, 군인이 아니라서 무시하시는….”

“충분해요.”

오토가 화가 난 엘리스의 말을 끊었다.

“지금 마그리트 왕국의 수도는 텅텅 비어 있거든요. 국왕의 머릿속처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가보면 아실 겁니다.”

“좋아요, 어디 두고 보겠어요.”

“얼마든지~”

오토는 씩씩대는 엘리스에게 놀리듯 말하고는, 뜬금없는 발언을 했다.

“혹시 체스 좋아하시나요?”

“갑자기 체스는 왜요?”

“지금 상황이 마치 체스 같아서?”

“그건 또 무슨 말이죠?”

“그것도 두고 보면 알 겁니다. 후후후.”

엘리스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오토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뱃속에 능구렁이가 수천 마리쯤은 들어있는 사람 같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오토의 속을 알 수 있는 방법 따윈 없었다.

그저 지켜볼 뿐….

엘리스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오직 시간뿐이었다.

* * *

처음 공성전이 시작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만 해도, 마그리트 국왕의 기분은 매우 좋았다.

“끌끌끌! 헬무트 그놈은 꼭 생포하라고 전하라! 그래야 과인이 직접 놈을 참수할 것이 아니더냐? 끌끌!”

하지만 공성전이 시작된 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삼일이 지나자 마그리트 국왕의 기분은 달라졌다.

“뭣이? 이런 무능한 놈들 같으니! 5만 대군으로 고작 몇 천 명이 지키는 요새 하나를 함락을 못 시켜? 그게 말이 되느냐! 10배가 넘는 병력으로 어떻게 요새 하나 점령을 못해!”

헬무트의 요새는 마그리트 국왕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을 때.

“이런 빌어먹을! 아직도 함락을 못 시켰어?”

공성전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났음에도 요새를 함락하지 못하자 마그리트 국왕은 그제야 현실을 깨달았다.

‘발데마르 가문이 괜히 250년 동안이나 저 미개한 유목민들로부터 우리 왕국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게 아니었구나….’

어째서 발데마르 가문이 <마그리트 왕국의 방패>라 불리는지 아주 뼈저리게 깨달은 마그리트 국왕.

하지만 뼈 아픈 후회는 이제부터가 시작일 뿐이었다.

“저, 전하! 큰일 났습니다! 남쪽에서 대규모 병력이 국경의 전초기지와 요새들을 쳐부수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고 하옵니다!”

“뭣이?! 그, 그게 무슨 말이냐! 남쪽에서 대규모 병력이 쳐들어오고 있다니!”

마그리트 국왕이 놀란 이유는, 남쪽 국경에는 딱히 쳐들어올 만한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이 국경이지, 마그리트 왕국의 남쪽은 이따금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하는 것 이외에 딱히 위험요소가 없는 안전지대였다.

당연히 방어도 허술할 수밖에 없는….

“척후병의 보고에 따르면, 대규모 병력은 처음 보는 깃발이었다고 하옵니다.”

“처음 보는 깃발…?”

“정보를 수집해본 결과 그들은 이오타 왕국이라는 곳의 군대라는데… 확인된 바가 전혀 없는 세력이옵니다.”

“이오타…? 그런 나라가 있었단 말이냐?”

“확인되거나 알려진 바가 전혀 없는 국가인지라… 정말 국가인지조차 의심스럽사옵니다.”

“그, 그건 그렇다고 치고! 병력 규모가 얼마나 된다더냐?”

“대략 만오천 명 정도의 규모라는 보고가 있었사옵니다.”

“마, 만오천?!”

마그리트 국왕은 이오타군이라는 정체불명의 군대의 규모가 15,000 명 정도라는 이야기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현재 마그리트 왕국의 수도는 사실상 빈집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빈집이었다.

실전에 투입 가능한 병력을 싹싹 긁어모아 헬무트 토벌에 투입한 덕분에, 수도를 방어하는 병력이 고작 2,000명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5,000명의 군대가 쳐들어온다면, 수도가 함락되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할 터.

“그놈들이 수도까지 진격해오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다고 하더냐! 대답하라! 어서!”

“척후병의 보고에 따르면 이틀이면 수도를 공격하는 게 가능할 것 같다고 하옵니다.”

“맙소사.”

국왕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다, 당장 전방에 전령을 보내라! 회군! 회군하라고! 지금 당장 헬무트를 공격하는 걸 멈추고 회군하라 이르라! 어서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국왕의 입에서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틀이면 헬무트 토벌에 나섰던 본대가 돌아오기에 터무니없이 적은 시간.

지금 당장 회군한다 하더라도 제때 도착할 가능성은 단언컨대 0이었다.

아무리 빨리 회군한다고 한들 3일은 필요했던 것이다.

* * *

“뭐라? 지금 당장 회군하라?”

마그리트 왕국군의 총사령관은 뜬금없는 명령이 떨어지자 매우 당황했다.

“지금 그게 말이 되는 명령이란 말인가! 회군이라니! 역적 헬무트를 토벌까지 얼마나 남았다고!”

현재 헬무트가 이끄는 반란군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피해도 상당했다.

게다가 지난 250년 동안 굳건하던 요새도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중이라, 하루 이틀 정도만 더 몰아붙인다면 함락은 기정사실인 상황.

그런데 갑자기 군대를 돌려 회군하라니 총사령관으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국왕 전하의 명령입니다! 당장 군대를 돌려 수도로 돌아오라 하십니다!”

“이유가 뭐냐? 전하께서 왜 갑자기 회군 명령을 내리셨단 말이야?”

“현재 정체불명의 군대가 수도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답니다!”

“정체불명의 군대…?”

“예, 총사령관 각하. 지금쯤이면 그 정체불명의 군대가 수도를 공격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

“수도가 위험합니다! 국왕 전하께서도 수도를 버리시는 걸 고민하실 정도로 상황이 급박합니다! 그러니 어서 회군하셔야 합니다!”

“젠장….”

총사령관은 너무나도 아쉬워 두 주먹을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지난 열흘 동안 속된 말로 x빠지게 싸워 겨우 승리를 거두기 직전인데,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변수 때문에 군대를 물리자니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헬무트 토벌을 마무리한답시고 수도가 쑥대밭이 되는 걸 방치할 순 없는 노릇.

“전 병력… 수도로… 회군한다.”

결국 총사령관의 입에서 회군 명령이 내려졌다.

한편, 마그리트 왕국군이 물러나기 시작하자 반란군은 오히려 혼란에 빠졌다.

“저, 적들이 물러간다!”

“갑자기…?”

반란군은 며칠 전부터 승리를 아예 기대하지도 않은 채 정말 죽을 각오로 싸웠다.

애초에 승산이 없는 전투였기에,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가고 죽자는 심정으로 악착같이 싸웠던 것이다.

그런데 승기를 거의 잡아가던 마그리트 왕국군이 뜬금없이 물러나더니, 이내 곧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얼떨떨해하고 어리둥절해하는 건 건 당연한 반응.

논리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마그리트 왕국군의 갑작스러운 철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단 하나.

성벽 위에 주저앉듯 기대어 앉은 채 숨을 헐떡이던 사람.

오직 헬무트만이 마그리트 왕국군의 갑작스러운 철수를 이해했다.

‘버티고 버티시다 보면 마그리트 왕국군이 알아서 물러날 겁니다. 그게 언제쯤이냐면… 대략 다 죽기 직전? 요새가 함락되기 직전쯤? 딱 그때쯤이 되겠죠. 지옥주라고 생각하시고 버티세요. 그리고 마그리트 왕국군이 갑자기 물러나거든, 그땐 이겼다고 생각하세요. 정말 이긴 거니까.’

헬무트는 오토가 해 주었던 말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그대의 말처럼… 되었구려. 적들이… 물러났으니… 승리는 우리의 것이오… 그대가 그렇게 말했으니… 이 전투는… 정말로 우리가 이긴 것이오.”

헬무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냈다.

체력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

크고 작은 부상들을 입은 터라 헬무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생명이 위독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당장 기절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만신창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무트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이가 다 빠지고, 끝이 부러진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소리쳤다.

“이겼다… 우리가… 우리가 이겼노라! 우리가 이겼단 말이다!”

헬무트가 승리를 선언했다.

“우, 우리가 이겼다고?”

“정말로… 이긴 거 맞습니까?”

헬무트의 병사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승리 선언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그건 잠시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적들이 먼저 물러갔고, 전투는 끝났다.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되고, 이제 쉴 수 있다.

쉬어도 된다.

그렇다면….

“이겼다, 이겼어!”

“우리가… 이겼다…!”

병사들의 입에서 하나둘 승리를 자각하는 반응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역사서에 길이길이 남을 승리.

위대한 승리였다.

* * *

“전하! 적들이 수도를 포위해오고 있습니다!”

“뭐라?”

마그리트 국왕은 보고를 받고 그만 까무러칠 뻔했다.

보고에 따르면 이오타군이라는 정체불명의 군대가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는 이틀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정체불명의 군대는 예상보다 더 빨랐다.

도대체 행군 속도가 얼마나 빠른 것인지, 무려 하루를 단축해버린 것이다.

헬무트를 토벌하던 본대가 돌아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건만….

“전하! 어서 피하셔야 하옵니다!”

“피, 피해? 수도를 버리고 도망치란 말인가?”

“놈들의 속도가 엄청나옵니다! 한나절 후에는 공격이 시작될 것이옵니다! 지금 피하시지 않으시면 적들의 손에 변을 당하실지도 모르옵니다!”

“이… 이이…!!!”

마그리트 국왕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

왕으로서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다는 건 결코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도망친다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지 몰라도 민심은 잃어버리게 될 터.

사태가 어찌어찌 잘 마무리된다고 한들 왕권이 약해지리라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최악의 경우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나서, 성난 백성들에 의해 목이 잘려 머리통이 대롱대롱 매달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신하도 그것을 알았기에, 어떻게든 국왕을 설득하려 했다.

“전하, 결정을 내리시기 어려우신  줄은 알고 있사옵니다만 지금은 옥체를 보중하시는 것이….”

호다닥!

국왕이 놀란 바퀴벌레마냥 헐레벌떡 뛰어가기 시작했다.

“예….”

신하는 처음부터 설득 따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깨닫고 중얼거렸다.

“옥체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잘 보중하십니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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