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뒤틀린 황야는 벌써 몇백 년째 비가 오지 않아 사막화가 이루어진 지역으로서, 온갖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위험지역이었다.
게다가 지정학적으로도 별다른 가치가 없는 곳인지라,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버려진 땅이기도 했다.
바루나의 물기둥은 그런 뒤틀린 황야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아무도 지키는 사람 없이 그저 덩그러니 쓰러져 있었다.
그래서 바루나의 물기둥을 얻으려면 뒤틀린 황야에 사는 몬스터들을 좀 처치하고, 그냥 가져오면 되었다.
며칠 전.
오토는 마검사들과 이오타 왕국군으로 하여금 바루나의 물기둥을 가져오게끔 했다.
몬스터들이 좀 귀찮고, 운반이 다소 어려울 뿐인지라 굳이 직접 나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건 뭐 하는 기둥입니까?”
카미유가 오토에게 물었다.
“기후를 조절해 줘.”
“예?”
“기후를 조절해 준다니까?”
바루나의 물기둥은 화합의 성서와 같은 등급의 성물이었다.
[바루나의 물기둥]
풍요여!
영원하라!
- 위대한 주술사
설명 : 고대 도시국가의 성물. 고대의 주술이 걸린 신비한 기둥으로서, 그 가치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건축물이다.
분류 : 성물
등급 : ★★★★★ (5성급)
효과 : 소유자의 의지대로 기후를 조절해 주고, 눈·비·폭염·가뭄 등의 기후적인 자연재해를 막아 줍니다.
“이 기둥이 있으면 비를 조절할 수 있거든.”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어?”
“…….”
“봤냐고?”
“…….”
“봤냐고 물었잖아!”
“보통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시ㅈ….”
“그건 적들한테만 그런 거잖아!!!”
오토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무슨 거짓말쟁이인 줄 알아!!!”
오토는 한동안 씩씩대며 성을 내고는, 카미유에게 말했다.
“두고 봐. 진짠지 아닌지. 내가 확인시켜 줄 테니까.”
“믿지 않는다고는 안 했습니다만.”
“두고 보라고!”
오토는 빽!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한편, 칼마르의 명령을 받고 뒤틀린 황야로 파견됐던 기사들은 그 어떠한 유물도 발견하지 못했다.
뒤틀린 황야에는 옛 고대 유적지의 잔해들, 그러니까 무너진 돌 더미나 건축물들이 남아 있기는 했다.
그러나 물결모양의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기둥, 그러니까 바루나의 물기둥을 찾을 수는 없었다.
“철수한다.”
“예.”
결국, 체로키 왕국의 기사단은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고 귀환해야만 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바루나의 물기둥은 이미 오토의 명령을 받은 이오타 왕국군이 가져가고, 흔적마저도 깔끔하게 지워 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전하, 뒤틀린 황야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사옵니다.”
“알겠소.”
복귀한 기사들로부터 보고를 받은 칼마르의 심기는 매우 불편했다.
‘어쩌면 그 설리번이란 자는 이오타 왕국이 보낸 간첩일지도 모른다.’
칼마르는 설리번을 의심했다.
뜬금없이 대홍수가 날 거라는 둥.
뒤틀린 황야에서 고대 도시국가의 유물을 찾아야 한다는 둥.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만약 바루나의 물기둥을 찾았다면 이야기가 달랐을 테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자 의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이것 역시 이오타 놈들의 농간인가?’
앞서 두 번에 걸친 큰 전투에서 전략이 아닌 계략에 의해 처참한 패배를 당했던 칼마르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로우레딘 왕국에서는 거짓 항복에 의해 패하고, 국경 요새에서는 유인책에 걸려 패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는 폭우로 인한 대홍수가 날 것이다?
뭔가 수상쩍은 게 사실이었다.
체로키 왕국이 전쟁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끔 만드는, 일종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당장 설리번이라는 자를 잡아들이도록.”
칼마르는 즉시 설리번을 체포해 올 것을 명령하고, 국문(鞫問)을 열었다.
그런 뒤 설리번을 직접 심문했다.
“이오타 왕국과는 무슨 관계인가.”
“저, 전하!”
아무것도 모른 채 잡혀 온 설리번은 그 물음에 크게 당황했다.
“소인은 이오타 왕국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사옵니다!”
“지금 그걸 믿으라는 것인가?”
칼마르가 싸늘한 표정으로 설리번을 노려보았다.
“네놈은 찾아오기 전. 이오타 왕국이 폭우에 대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네놈이 찾아와 큰 폭우라 내릴 것이라 말하며 뒤틀린 황야에서 고대의 유물을 찾게끔 했다. 과연 이게 우연의 일치인가?”
“소, 소인은 그런 것까지는 잘 모릅니다! 전하! 소인은 그저 사랑하는 조국에 물난리가 날 것이 두려워 전하께 이 사실을 알린 것뿐이옵니다!”
“그런가?”
“맹세코! 전하! 저는 한평생 조국을 위해 기후를 연구해 온 학자에 불과하옵니다! 소인이 어찌 이오타 놈들의 간첩이 될 수 있….”
“닥쳐라!”
칼마르가 버럭 소리쳐 설리번의 말을 끊었다.
“네놈이 언제까지 과인을 농락할 수 있을 줄 알았는가!”
“저, 전하!”
“여봐라!”
칼마르가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저자를 철저히 심문하여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히도록 하라!”
“예, 전하!”
그렇게 설리번은 모진 고문을 동반한 아주 혹독한 심문을 받게 되었다.
대홍수에 대비하고, 바루나의 물기둥을 가져간 오토의 행동이 본의 아니게 피해자를 낳게 된 것이다.
* * *
설리번에 대한 고문과 심문은 3일 밤낮을 이어졌다.
“저, 절대… 절대 아니오… 나는 그저… 조국을 위해… 연구한 결과를… 사실대로….”
설리번은 그 모진 고문에도 끝끝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없는 죄도 만들어 낼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설리번은 끝끝내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학자로서 연구 결과를 나라에 바쳤는데! 어찌 나를 이렇게 대우한단 말인가! 심지어 나를 적국의 간첩으로 몰아가다니!’
설리번은 억울해서라도 없던 죄를 있다고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억울한 감정 덕분에, 설리번은 끝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전하, 아무래도 설리번은 이오타의 간첩이 아닌 것 같습니다.”
“과인이 죄 없는 사람을 잡았다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오라.”
기사단장은 칼마르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자 황급히 말을 돌렸다.
“어쩌면 설리번이란 자는 이오타 놈들에게 이용당한 것일지도 모르지 않사옵니까?”
“이용이라….”
“이오타 놈들이 설리번이란 자로 하여금 거짓 정보를 퍼뜨리게 공작을 펼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으음.”
“게다가 죄인이 그 모진 고문과 거듭되는 심문에도 끝끝내 말을 바꾸지 않는 것을 보면,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혔을지언정 악한 의도가 있어 보이지는 않사옵니다.”
“그럴 수도 있긴 하겠군.”
“일단은 설리번이란 자를 석방시키고, 가택연금을 시킨 뒤 지켜보심이 어떻겠사옵니까.”
기사단장이 조심스레 의견을 제시했다.
“계속 가둬 두고 고문하기도 난처한 일이온대, 그렇다고 세상에 풀어놓기엔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현혹시킬 수도 있는 자이옵니다. 그러니 우선은 겨울이 올 때까지 만이라도 가택연금을 시켜 놓고, 지켜보소서.”
“그렇게 하지.”
칼마르는 기사단장의 의견에 동의했다.
일단 가택연금을 시켜 놓으면 설리번이 올 가을 큰 비가 내릴 것이라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은 물론,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 떠들고 다니는 것도 막을 수 있을 터였다.
안 그래도 민심이 좋지 못한데, 생사람까지 잡았단 소문이 돌면 칼마르의 입장에선 매우 난감해질 테니까.
“그리하되, 그자가 이오타 놈들과 내통하는지 철저히 감시하라.”
“예, 전하.”
칼마르는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는, 어전회의를 소집했다.
“최근 이오타 왕국의 움직임은 본국을 기만해 방심을 유도하는 계략인 것으로 추정되오. 본국이 전쟁을 준비하는 대신 물난리에 대비해 국력을 소모하도록 유도하는 작전일 확률이 매우 높소. 설리번이란 자는 이오타 놈들이 심어놓은 간첩이거나, 혹은 놈들에게 이용당해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꼭두각시 같다는 게 중론이오.”
그러자 신하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며 칼마르의 의견에 동의했다.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어찌 그런 큰 물난리가 날 수 있겠사옵니까.”
“책상머리 앞에서 깃펜이나 놀리는 자가 어찌 그런 대재앙을 예견하겠사옵니까? 전하의 말씀이 백번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신하들 역시 설리번이 제시한 가설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설리번의 주장은 내일 당장 세계가 멸망한다는 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짐은.”
칼마르가 힘주어 말했다.
“올 가을 추수가 끝남과 동시에 이오타를 재침공할 예정이오. 앞선 전쟁의 패배를 반드시 설욕할 것이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신하들은 칼마르를 적극 지지해 주었다.
이오타 정벌은 후대를 위한 예방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을뿐더러,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이대로 물러날 순 없었기 때문이다.
“하오면.”
한 신하가 칼마르에게 물었다.
“수해에 대한 대비는 어찌하실 것이옵니까?”
“그것은 이오타 놈들의 농간이라 하지 않았소이까.”
칼마르가 그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는 듯 일축했다.
“다만 혹시 모르니 약간의 대비는 하겠지만, 국력을 낭비할 정도로 무리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
“예, 전하. 그리하겠사옵니다.”
그렇게 칼마르는 다가올 물난리에 대비하지 않고, 국력을 오직 군사력에만 투자하기로 다짐했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이런 빌어먹을 나라를 위해 내 평생을 바쳤단 말인가….”
가택연금에 처해진 설리번은 창밖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그의 몸은 모진 고문으로 인해 만신창이였고, 마음은 억울함에 당장에라도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 걸레짝이 되고 만 것이다.
그것으로 모자라서, 풀려난 뒤로 단 한 발자국도 밖에 나가 보지 못한 채 24시간 내내 감시당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설리번은 풀려난 뒤로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기만 했다.
사무친 억울함이 너무나도 깊어서, 그만 병을 얻은 것이다.
‘스스로 목숨이라도 끊어야 하는 것인가?’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설리번은 극단적인 선택까지 염두에 두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설리번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가 없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내 연구는 틀리지 않았다. 큰 비가 내릴 것이다. 그때가 오면, 모두가 알 것이다. 내가 옳았음을.’
설리번은 연구 결과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살고자 했다.
‘모두가 땅을 치고 후회한들 때는 이미 늦었을….’
그때.
“설리번 남작님.”
설리번은 웬 금발의 미청년이 말을 걸어오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그대는 누구요? 전하께서 이제는 침실에서도 감시하라고 명령하셨소?”
“저는.”
금발의 미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리번 남작님의 군주가 보낸 하수인 따위가 아닙니다.”
“……?”
“제 이름은 오토 드 스쿠데리아. 이오타 왕국의 국왕 되는 사람입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놀란 설리번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
“그, 그대가 정녕 이오타 왕국의 국왕이란 말씀이시오?”
“그렇습니다.”
“어찌 나를 찾아오시었소.”
설리번은 오토가 찾아온 이유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왜 이오타 왕국의 국왕이 이곳 체로키 왕국의 수도 한복판에 나타났다는 말인가?
그것도 일개 기상학자를 만나기 위해?
“모시러 왔습니다.”
오토가 설리번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