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이렇듯 늦은 시간에 불쑥 찾아와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토르문트 백작님.”
덥수룩한 수염.
얼굴에 난 커다란 상처.
그는…….
‘어?’
오토는 토르문트를 찾아온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신창(神槍) 바야바?’
바야바.
창술의 달인.
그는 체로키 왕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로, 국왕인 칼마르의 최측근이었다.
‘칼마르가 움직이기 시작했구나.’
오토는 바야바가 토르문트를 찾아온 이유를 단번에 알아챘다.
‘역시 왕위에 오르자마자 우리 이오타부터 견제하려는 거다.’
대화 내용 역시 오토의 예상대로 전개되었다.
“남들의 눈을 피해야기에 이렇듯 야심한 밤에 찾아온 것을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허허. 신창께서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토르문트가 물었다.
“예, 토르문트 백작님. 저는 이번에 왕위에 오르신 칼마르 국왕 전하의 밀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칼마르 국왕 전하의 밀서라….”
“일단 보시지요.”
바야바가 밀서를 내밀고, 토르문트가 봉인을 뜯고 내용을 살펴보았다.
“음.”
토르문트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 적국과 내통하라는 것입니까? 체로키 왕국에 나라를 팔아먹으라는 뜻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바야바가 토르문트를 달랬다.
“아시다시피 현재 로우레딘 왕국에 희망은 없지 않습니까? 이대로라면 곧 이오타 왕국에 수도가 함락당할 것입니다.”
“크흠.”
“당장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 세력들도 제대로 토벌하지 못한 마당에, 어찌 이오타 왕국을 막겠습니까?”
“…….”
“그럴 바에는 차라리 본국에 항복하시는 편이 낫습니다.”
“무엇이 더 낫단 말입니까?”
“칼마르 전하께서는.”
바야바가 미소를 지었다.
“로우레딘 왕국의 자치권을 인정해 주실 생각이십니다.”
“……!”
“물론 속국의 형태가 될 테지만, 나라가 완전히 망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허어.”
토르문트는 엄청난 제안에 혀를 내둘렀다.
지금 상황에서 로우레딘 왕국을 멸망시키지 않고 속국으로 만든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자비를 베푸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토르문트 백작께서는 귀족들을 규합해 본국에 친화적인 세력을 만들어 주시고, 국경을 지키는 군 지휘관들을 설득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우리 군이 손쉽게 국경을 넘을 수 있을 테고, 그 뒤엔 아무것도 신경 쓰실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 다음은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우리 군이 로우레딘 왕국군을 대신해 이 땅에서 이오타 왕국군을 영원히 몰아낼 것입니다.”
그 역시 달콤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로우레딘 왕국의 국토는 이오타 왕국군과 체로키 왕국군의 전쟁터가 되어 버리겠지만.
“이미 우리 군이 전투준비태세를 갖추고 옛 슬레인 왕국의 국경을 공략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 그런!”
“지금은 본국에 항복하시어 왕조를 유지하시는 것이 현명하신 판단이 될 것입니다.”
“아니.”
토르문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이런 중대한 사안을 국왕 전하가 아닌 어찌 내게 찾아와 말한단 말이오?”
“토르문트 백작님.”
바야바가 웃었다.
“현 국왕은 어느 나라에도 항복할 인물이 아니라는 거,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항복을 제안할 만한 사람은 귀족들의 구심점이 되는 토르문트 백작님뿐입니다.”
“허허.”
토르문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체로키 왕국도 로우레딘 왕국의 정세와 주요 인사들의 성향에 대한 정보 수집을 끝마쳤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야바가 덧붙였다.
“만약 이 제안을 받아들여 주신다면, 칼마르 전하께서는 토르문트 백작님에게 대공의 작위를 약속하셨습니다.”
“대, 대공!”
“이만하면 토르문트 백작님께서도 충분히 만족하실 만한 제안이라 생각됩니다. 부디 심사숙고하시어, 현명한 결정을 내려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한편, 대화를 엿듣고 있던 오토는 애간장이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체로키 왕국의 제안이 너무나도 달콤해서, 이대로 토르문트가 홀딱 넘어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거 일이 꼬이는 거 아냐?’
오토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도 토르문트와 바야바의 대화는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토르문트 백작이 확답을 주지는 않았단 거였다.
“이틀 정도만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바야바는 토르문트 백작을 독촉하지 않았다.
“허나 결정이 너무 늦으면 저희도 곤란합니다. 이오타 왕국군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도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토르문트 백작은 거기까지 대화하고, 바야바를 돌려보냈다.
‘이걸 안 물어?’
오토는 토르문트 백작이 선뜻 제안을 수락하지 않은 것에 놀랐다.
저 정도 달콤한 제안이라면, 지금 당장 오토를 배신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 * *
다음 날 아침.
“전하, 기침하셨습니까.”
토르문트 백작이 오토를 찾았다.
오토는 밤새 엿들은 대화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토르문트가 온 것을 보고 바짝 긴장했다.
‘이대로 배신당하는 거 아냐?’
지금 토르문트가 마음을 바꿔 먹는다면, 오토와 카미유는 꽤 위험한 상황에 처할 게 분명했다.
물론 근처에 마검사 100명이 대기하고 있긴 했지만.
“전하.”
토르문트가 오토에게 말했다.
“간밤에 체로키 왕국의 기사 바야바가 찾아왔었습니다.”
“예?”
오토는 놀란 ‘척’을 한 게 아니었다.
그건 정말로 놀란 거였다.
바야바가 찾아왔단 사실은 알고 있었기에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토르문트가 바야바가 찾아왔다는 걸 사실대로 이실직고한 건 분명히 놀란 만한 일이었다.
“바야바라면… 체로키 왕국의 기사 아닙니까? 창술의 달인이라는?”
오토가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는, 토르문트에게 물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그가 왜 찾아왔습니까?”
“제게 체로키 왕국으로의 항복을 권유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음.”
“솔직히 저에게는 꽤나 달콤한 제안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토르문트는 어젯밤 바야바와 나눈 대화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오토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오토가 물었다.
“토르문트 백작님께는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었을 텐데요. 굳이 제게 말해 주실 이유도 없고.”
“저는.”
토르문트가 대답했다.
“적어도 이 땅이 전쟁터가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
“만약 체로키 왕국에 항복한다면, 이 땅은 이오타 왕국과 체로키 왕국의 전쟁터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전하께 항복한다면, 적어도 이 땅이 전쟁터가 되지는 않겠지요.”
토르문트의 말은 옳았다.
이미 이오타 왕국군은 로우레딘 왕국에 들어와 정복 활동을 벌이는 중이고.
반대로, 체로키 왕국은 국경지대의 험난한 지형과 로우레딘 왕국군 때문에 섣불리 침공해 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체로키 왕국에 항복하고 국경을 열어 준다면, 로우레딘 왕국이 쑥대밭이 되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이미 우리 백성들은 오랜 시간 굶주림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조를 유지하고 제 부귀영화를 위해 이 땅을 전쟁터로 만들 순 없습니다.”
“아!”
오토는 토르문트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백성들을 위해 그 달콤한 제안을 거절할 줄이야.
비록 왕조를 배신할지언정, 이 땅을 배신하지는 않겠단 강한 의지가 없인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다.
“게다가 전하께선 위험을 무릅쓰시고, 직접 발걸음 해 주심으로써 제게 신뢰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 전하께 어찌 등을 돌리겠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오토는 토르문트를 직접 찾아오길 정말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믿어 주신 만큼,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예, 전하. 저 역시 전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오토는 퍼뜩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거 잘만 하면 대박이겠는데?’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려 보니, 이건 어쩌면 절호의 기회 같았다.
“체로키 왕국에 먼저 항복하실 수 있겠습니까?”
“예?”
토르문트 백작은 오토의 뚱딴지 같인 소리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끔뻑이다가, 이내 곧 말뜻을 이해하고는 이마를 탁! 치며 감탄했다.
“서, 설마!”
“예.”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체로키 왕국은 잠재적인 적국입니다. 예로부터 호시탐탐 로우레딘 왕국을 침공해 올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실제로 침공해 온 적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 그렇사옵니다.”
“이참에 싹을 잘라 버리죠. 백작님께서 잘만 해 주신다면, 체로키 왕국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는 게 가능합니다.”
“아!”
토르문트 백작은 오토가 즉석에서 제안한 계략에 크게 감탄했다.
‘체로키 왕국군을 유인해서 섬멸하실 생각이시구나!’
그대로만 된다면, 체로키 왕국군의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해 보시겠습니까?”
오토가 토르문트 백작에게 물었다.
“예, 전하.”
토르문트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臣)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 * *
체로키 왕국은 토르문트에게 밀사를 보내 로우레딘 왕국을 흔드는 한편, 본격적으로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이니만큼, 이오타 왕국의 본토와 로우레딘 왕국을 동시에 공격하는 양동작전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체로키 왕국군은 기습적으로 옛 슬레인 왕국의 국경을 공격, 로우레딘 왕국을 공격하고 있는 이오타 왕국군을 돌아오도록 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렇게 되면 로우레딘 왕국의 영토 안에서 벌어지는 전쟁도 유리하게 수행할 수 있는 거란 계산이 깔린 움직임이었다.
척! 척! 척! 척!
그렇게 체로키 왕국군은 옛 슬레인 왕국의 국경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해나갔다.
그리고 이 소식은 곧바로 국경사령관인 헬무트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역시 전하의 말씀이 옳았구나!”
헬무트는 국경수비를 단단히 하라던 오토의 당부를 떠올리며,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오토의 당부를 잊지 않고 정찰병들을 3배 이상 늘렸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체로키 왕국군이 국경 근처에 도달할 때까지 까맣게 모를 뻔하지 않았던가?
“전군, 전투준비태세를 갖추고 적들의 공격에 대비하라.”
“예, 사령관님!”
헬무트는 즉시 체로키 왕국군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무칸 장군.”
“예, 사령관님.”
헬무트는 따로 아무칸을 불러들여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기병대를 이끌고 체로키 왕국의 후방을 교란할 준비를 하시오.”
“맡겨만 주십시오!”
이오타 왕국군의 기병대는 하브르 초원의 유목민 전사들과 타타르 품종의 명마들로 구성된,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엄청난 기동성과 전투력을 보유한 집단.
여느 강대국에 견주어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오히려 더 뛰어난 부대가 바로 아무칸이 이끄는 기병대였다.
그런 만큼 체로키 왕국의 후방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적진 한복판으로 파고드는 위험부담이 있기에, 결코 쉽진 않겠지만.
두두두두두두두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칸과 유목민 전사들은 단 한 마디의 불평·불만 없이 출동했다.
워낙에 사납고 호전적인 민족들이었기에, 위험을 즐겼으면 즐겼지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헬무트가 전쟁을 준비하는 사이.
척! 척! 척! 척!
체로키 왕국군은 거침없이 국경을 넘어 이오타 왕국으로 진격했다.
‘그’ 헬무트가 버티고 선 요새를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