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뭐, 좋아. 안 될 건 없지.’
카이로스는 과거 철퇴 한 자루로 대륙의 3분의 1을 지배했던 절대강자.
그런 사람이 아군이 되어준다면, 오토로서도 나쁠 게 하나도 없었다.
단, 통제가 가능하다면.
카이로스 같은 강자가 미쳐 날뛰기 시작하면, 제아무리 오토라도 감당하기 힘들게 분명했다.
카이로스로 인해 생긴 변수가 계획을 망쳐놓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내 명령에 따라야 돼. 그럼 육체를 구해줄게.’
- 뭣이? 짐이 네깟 놈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는 말이냐?
‘걔는 내 거야.’
오토가 단호히 말했다.
‘내가 이용해 먹을 호구라고. 근데 니가 중간에 개판을 쳐서 일이 틀어지면 어떡할 건데? 그럼 나까지 피 본다고. 걔 만만한 애 아냐. 잘못 건드렸다간 내가 잡아먹혀.’
- 으음…!
‘얌전히 기다리고 있겠다고 약속해. 그럼 내가 복수할 판을 깔아주지. 니가 옛날에 아르곤 대제한테 당했던 걸 똑같이 되갚아줄 판을.’
- 정말 약속할 수 있느냐? 기다리면 복수할 판을 마련해줄 것이냐?
‘약속은 지켜.’
- 좋다.
카이로스가 오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네놈의 통제에 따르마.
‘정말이지?’
- 복수할 자리를 마련해준다는데 그 정도도 못 참겠느냐?
‘오케이. 그럼 기다려. 육체를 구해줄 테니까.’
- 알겠다.
오토는 귀찮음 때문이라도 카이로스에게 육체를 구해주고 싶었다.
카이로스에게 육체가 생기면, 술 먹게 해달라며 떼쓰고 징징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닌가?
‘근데 육체는 어떻게 구해줘?’
- 아무한테나 철퇴를 쥐여주면 된다. 그 뒤엔 짐이 알아서 하겠다. 엄한 사람 잡을 순 없으니, 중범죄를 저지른 사형수나 포로로 붙잡은 놈들이 적합하겠지.
‘그건 그러네. 그래도 기왕이면 좀 강한 육체가 필요하지 않아?’
- 상관없다. 육체는 강화시키면 그만이다. 한 번 가봤던 길을 또 가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느냐? 짐은 어떤 육체를 갖게 되든 전성기 시절의 무력을 빠르게 회복할 자신이 있느니라.
‘그으래에~?’
오토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큭… 큭큭큭….”
오토가 웃기 시작했다.
“…또 뭡니까.”
카미유는 오토가 혼자 키득거리는 걸 보고 불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또 무슨 악랄한 음모를 꾸미는 겁니까?”
“악랄한 음모라니? 누가 보면 내가 엄청 교활하고 비열한 인간인 줄 알겠다?”
“그럼 아닙니까?”
“뭐? 신경 꺼! 남이사, 웃든 말든!”
오토는 카미유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는 다시 카이로스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아무 육체나 상관없다 이거지?’
- 그렇다!
‘그게 여자면?’
- ……!
‘아니면 할머니라면?’
- 여, 여자라니! 짐은 사나이 중의 사나이다! 여자의 육체가 웬 말이란 말이냐!
‘어? 지금 그게 남녀 차별이야? 여자는 육체적으로 약하다고 비하하는 거야?’
-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짐이 활동하던 당시에도 뛰어난 여성 강자들이 많았거늘!
‘근데?’
- 짐의 정체성은 사나이다! 그러니 여자의 육체는 거부하겠다!
‘재밌을 거 같은데….’
- 네놈이 감히….
‘아예 할머니로 해버릴까? 흐흐흐!’
- 다, 닥쳐라!
오토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카이로스를 놀려대며 시간을 때웠다.
카이로스가 당황해서 쩔쩔매는 게 꽤나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 농담이라도 그따위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농담 아닌데?
카이로스의 영혼이 여자의 육체에 깃든다라….
꽤 재밌을 것 같은데?
* * *
오토는 이오타 왕국으로 복귀하자마자 와지르 대공을 만나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허어? 네 녀석이 쿤타치 가문의 혈통이었다? 콘라드 그 친구의 외손자였고?”
와지르는 오토의 이야기를 듣고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국제적으로 인맥이 두터운 와지르는, 오토의 외할아버지인 콘라드와도 꽤나 친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찌할 생각이냐?”
“일단은 쿤타치 가문에서 가져온 마나운용법들을 우리 군에 보급하고, 가르칠 생각입니다.”
“그다음엔?”
“차차 말씀드리죠. 어르신께서는 계속 내정에만 힘써 주세요.”
“힘쓸 것이나 있겠느냐? 할 일이 없다 못해 온종일 낚시나 하고 있느니라.”
“하하하….”
와지르는 거대한 대제국도 무리 없이 경영하는 게 가능한 SSS등급 영웅.
엄밀히 말하자면….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고 있긴 하지.’
인력 낭비라고나 할까?
와지르는 국가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 진가가 드러나기에….
‘그래도 엄청 편한 거지, 이 정도면.’
오토는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 한들 행정업무가 얼마나 할 게 많은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쉬워 보여도 은근히 신경 쓸 게 많아서, 작정하고 내정을 돌보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 있는 건 일도 아니었다.
즉, 와지르는 돈보다 귀한 시간을 벌어다 주는 매우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내정은 내가 신경 쓸 게 없으니까, 당분간 군사력을 키우는 데만 집중하자.’
오토는 그날 이후 이오타 왕국군에 쿤타치 가문의 마나운용법들을 보급했다.
보급 속도는 매우 빨랐다.
왜?
콘라드가 오토에게 붙여준 쿤타치 가문의 기사·마검사·마법사들이 교관이 되어 병사들을 직접 가르쳤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배우기 쉬운 마나운용법을 고급 인력들이 가르쳐주니, 병사들의 입문은 매우 빨랐다.
어지간히 둔한 병사들조차 1주일이면 마나의 흐름을 느끼고, 2주일이면 미약하게나마 마나를 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S등급 영웅 스푸너가 특별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어 병사들을 훈련시키기까지 했다.
그 결과.
[알림: 82레벨 달성!]
[알림: 83레벨 달성!]
[알림: 84레벨 달성!]
[알림: 85레벨 달성!]
이오타 왕국의 군사력을 향상시키려 노력하자 경험치가 들어왔고, 오토의 레벨도 자동으로 올랐다.
주인공 캐릭터들은 굳이 누군가와 싸우지 않더라도 이렇듯 <군주다운> 행동을 취했을 때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던 중.
- 애송이! 도대체 내 육체는 언제 구해줄 거냐!
“아차?”
오토는 바쁘게 살던 중 카이로스가 말을 걸어오자 깜빡했다는 듯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미안. 요즘 바빠서 까먹었어.”
- 까먹을 게 따로 있지! 짐과의 약속이 그리 가벼운 것이더냐!
“그건 아니고~ 병사들 훈련시키고 내 수련하느라 바빴다고~.”
- 이런 괘씸한 놈 같으니!
“죄송죄송. 바로 구해다 드림.”
- …….
“감옥이 어디 있더라….”
오토는 즉시 성 바로 밑에 자리한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 * *
“추, 충성! 근무 중 이상 무!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전날 과음이라도 했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던 기사는, 오토가 나타나자 화들짝 놀라 경례를 올려붙였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 아닙니다! 한데 전하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어인 일이신지….”
“흉악범들 좀 보고 싶어서요.”
“흉악범이라 하심은….”
“사형을 앞둔 사형수들 구경 좀 시켜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기사는 왜 그런 명령을 내리는지 전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명령이기에 군말 없이 사형수들이 수감된 구역으로 오토를 안내해주었다.
“보자….”
오토는 사형수들을 쭉 훑어보면서 손가락으로 그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 떤, 놈, 을, 고, 를, 까, 요, 알, 아, 맞, 춰, 보, 세, 요.”
그러자 마지막으로 지목된 사형수가 움찔! 몸을 떨었다.
“딩, 동, 댕, 동.”
…는 훼이크다!
“도, 시, 라, 솔, 파, 미, 레, 도….”
…도 훼이크고!
“코, 카, 콜, 라, 맛, 있, 다, 맛, 있, 으, 면, 또, 먹, 지, 또, 먹, 으, 면….”
…또 훼이크지롱!
- 이 미친놈아, 그만하지 못할까!!!
카이로스가 버럭 소리쳤다.
- 짐이 사용할 육체를 그따위 찍기로 결정하겠단 것이냐!!!
“아~ 왜~ 재밌잖아~ 쟤네 오늘 죽나 싶어서 벌벌 떠는 것 좀 보라고~ 그러게 뒈지는 게 두려웠으면 죄를 짓지 말았어야지~.”
- 틀린 말은 아니다만….
한편, 사형수들은 오토가 혼자 중얼대는 걸 듣고 정신이 혼미해져 버렸다.
‘와, 완전 싸이코 아냐?’
‘완전히 미친놈이라더니….’
‘그냥 다 죽여라! 다!’
오토가 카이로스와 대화를 나눈다는 걸 몰랐기에, 미친놈이 혼자 중얼대고 낄낄대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 짐이 직접 고를 테니 네놈은 빠져라.
“그러시던가.”
카이로스는 오토의 눈을 통해 사형수들들 찬찬히 훑어보고는, 그중 하나를 골라냈다.
- 이놈이 그나마 쓸 만해 보이는구나.
오토는 병사들로 하여금 카이로스가 가리킨 사형수를 끌어내게 한 뒤에 손에 철퇴를 쥐여주었다.
스으으!
그러자 철퇴가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더니, 카이로스의 영혼이 사형수의 육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끅… 끄으으윽… 끅….”
고통스러워하는 사형수.
‘이 세계가 이거 하나는 마음에 든다니까.’
천벌을 받아 마땅한 자가 천벌을 받는다.
오토가 온 세상에서는 그 당연한 것조차 참 어려운 일이라, 아주 속이 다 시원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후우!”
사형수.
아니, 카이로스가 긴 호흡을 토해내며 미소를 지었다.
“끝났다, 애송이.”
“오?”
“아직 좀 불편하긴 하지만 적응하면 괜찮아질….”
그때.
“크윽… 크으으으으윽!!!”
카이로스가 돌연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왜 그래?”
“크윽… 이 육체는… 짐의 영혼을… 감당해내지 못… 큭!”
“으으?”
“아무래도… 강한 육체가… 필요… 크으윽!”
뒤이어 카이로스―사형수―의 육체가 썩은 고목나무처럼 삐쩍 말라버리고 말았다.
- 이놈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짐의 영혼을 담으려면 좀 더 강한 그릇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래? 그럼 다른 거 골라 봐. 많네.”
- 알겠다.
카이로스는 그 후로도 18명이나 되는 사형수들에게 빙의를 시도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끄윽… 끄으으윽….”
“어어어… 어어어….”
“차, 차라리… 죽여… 줘어….”
빙의에 실패한 사형수들은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오토나 카이로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애초에 저 사형수들을 같은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관심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 으음… 아무래도 평범한 인간들은 짐의 고귀한 영혼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 같군.
“고귀하긴 개뿔.”
- 뭣이?!
“잡귀지, 잡귀. 사람 몸 뺏으려는.”
- 이 자식이…!!!
“나중에 다시 해보자. 쓸 만한 놈이 있겠지.”
- 어쩔 수 없군….
결국, 오토는 카이로스의 영혼을 담을 그릇을 찾지 못한 채 지하 감옥을 떠났다.
“저, 전하께서… 사형수들의 정기를… 빨아 드시다니….”
“저런 사악한 흑마법을 사용하시다니….”
덕분에 오토는 본의 아니게 오해를 사고 말았다.
제삼자의 눈으로 봤을 때는 오토가 사형수들의 생명력을 쪽쪽 빨아먹고 버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 * *
어느덧 시간은 흘러 무더운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었다.
오토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훈련장에서, 카미유와 대련했다.
챙! 채앵!
검과 검이 쉴 새 없이 맞부딪히며 치열한 공방이 오가던 도중.
“전하, 급히 보고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현재….”
쿤타치 가문의 마검사 카심이 오토에게 보고했다.
“로샨 왕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요?”
“설마 보고를 벌써 받으신 겁니까?”
카심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이 정보는 국경에서 막 올라온 매우 따끈따끈한 정보였기 때문이다.
“아뇨? 왠지 그럴 것 같았거든요.”
“예…?”
“제가 좀 촉이 좋아요. 후후.”
오토는 대충 얼버무려 대답하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반란이 일어날 때가 되긴 했지.’
이웃 나라인 로샨 왕국에서 반란이 일어나리라는 건 익히 예상하고 있던바.
그렇다면….
“카미유.”
“예, 전하.”
“오늘 대련은 여기까지 하고, 당장 짐 챙겨.”
“예…?”
“로샨 왕국으로 갈 거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이웃 나라인 로샨 왕국.
그곳이 오토의 다음 행선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