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너보고 이런 짓 하라고 시켰어? 아니, 이주섭 이 멍청한 놈은 잘 부탁한다고 말까지 했는데……!”
“화내지 마요. 다들 말렸는데 제가 가겠다고 고집부려서 온 거니까.”
“화 안 내게 생겼어, 지금?”
“새삼스럽게 왜 화를 내요. 형은 밥 먹듯이 하는 짓인데. 왜, 이제 좀 그간 제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이해가 가세요?”
유원이 그렇게 말하며 리온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피를 닦아 주었다. 다친 곳 하나 없지만, 한계까지 힘을 방출하면서 온 반작용 때문에 눈, 코, 입 할 것 없이 여기저기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마 유원이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화를 낼 만한 기력도 남지 않은 채로 널브러져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당황한 탓인지 피로감도, 안도감도 느껴지질 않았다. 리온이 유원에게 소리쳤다.
“나는……!”
“알아요. 형은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요.”
리온이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보기 좋게 말해 놓고 위기에 몰려 있었던 것이 찔려서였다.
“저한테는 제 몸 하나 지킬 힘도 없죠. 게이트 밖에서는 충분하겠지만, 이 안에서 가이드는 일반인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걸 아는 놈이 왜……!”
“그래도 이러고 싶었어요. 형이니까. 형은 다른 사람들 다 구하는데, 그럼 형은 누가 구해 줘요?”
“뭐?”
“형이 세상을 구하고 싶고,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 싶은 것처럼 저도, 쿨럭, 저한테도…….”
유원이 작게 기침을 하곤 고개를 들었다. 헤어지기 전에 봤던 상처 받은 얼굴도, 자포자기한 것 같은 얼굴도 아닌 어딘가 개운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지키고 싶은 게 있으니까요. 형이 세상을 지키고 싶다면 저도 세상을 지키고 싶어요. 하지만 세상을 구한다고 해도, 그 세상에 형이 없으면, 지키고 싶은 게 없는 세상이면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내가 왜? 내가 너한테 뭐라고. 너 이런 사람 아니잖아. 그, 그냥 평소처럼 해.”
리온이 조금은 혼란스러운 상태로 말을 더듬거렸다. 화를 내지도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특별하다고 말하는 유원이, 자신이 아는 유원이 아닌 것 같았다.
“형이 형을 안 챙기니까, 나라도 챙겨야죠. 어쩌겠어요.”
“그러니까 네가 왜. 무슨 이유로 그래야 하는 건데.”
“역시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건가 봐요.”
유원이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렵지도 않은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리온이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화낼 거면 저한테만 화내요. 붙잡는 사람들 뿌리치고 온 건 저니까.”
“아, 아니. 잠깐만. 지금 무슨 말을…….”
평소의 유원답지 않은 말이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데,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는 것보다 얘가 왜 이러는 건지에 대한 충격이 더 큰 리온이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한 말이니까.”
“아니, 누가 그런 말을 그냥 해. 잠깐, 잠깐만. 너 상태가…… 어디 아파?”
당황한 채 유원을 살펴보던 리온이 무언가 이상한 것을 알아채고 유원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땀을 흘리는 것이 단순히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불길이 다 사그라진데다가 유원이 이곳에 온 지 꽤 지난 지금까지도 땀이 흥건하고,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고 있었다.
“너…….”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하고 싶은 건…….”
나오는 대로 말하던 유원이 비틀거렸다. 놀라 비틀거리는 유원을 받아 낸 리온이 뒤늦게 무언가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너, 너 이거 뭐야?”
“오다가 남아 있던 몬스터를 만나서…… 하하. 그래도 센터장님께 배운 게 있어서 다행…….”
어쩐지 이상하게 행동하더라니, 정말 제정신이 아닌 거였다.
유원의 옆구리 뒷부분이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끊기고, 유원이 리온에게 완전히 기대었다.
“이 상태로 어떻게 여기까지. 아니, 아니야. 우선 정현 씨를…… 어, 어디로 가야 하더라…….”
“뭐야. 유원이가 왜 여기에 있, 잠깐 여긴 또 왜 이래.”
주저앉아 있던 센터장이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유원과 그의 상처를 발견하곤 당황해 유원을 살폈다. 리온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정, 정현 씨한테 빨리.”
“그래. 잠깐, 그런데 혈색이 너무…… 이거 상처 치료보다 수혈이 더 급할 것 같은데. 최대한 빨리 나가서 병원으로 이동시키는 게…….”
“그럼 제가 데리고 갈게요. 남은 몬스터도 별거 아니고, 다른 부상자도 없으니까 상관없죠?”
“어?”
“뒤처리 부탁드려요. 저 먼저 나갈게요.”
리온이 센터장의 대답도 듣기 전에 유원을 안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수혈이라는 두 글자만이 리온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심한 부상을 입거나 혼절하지만 않는다면 항상 게이트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일을 처리하고 나오던 리온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게이트를 나오게 된 것은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늘 꼼꼼하게 게이트를 닫고 나오던 리온은 지금 아직 다 처리하지 않은 몬스터나 남은 사람들 따위는 상관없을 만큼 유원의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세상 사람을 다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지금은 눈앞에 있는 ‘유원이 이대로 오랫동안 눈을 뜨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에 잊혔다.
에스퍼 강리온이 아닌, 평범한 사람 강리온이 되어 나온 첫 게이트였다.
* * *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행히 상처 자체가 그렇게 깊은 건 아니라 중요한 부위는 다치지 않았고, 빈혈 증세가 심해서 쓰러진 것뿐입니다. 수혈받고 며칠 푹 쉬면 금방 회복될 거예요.”
곧바로 달려간 병원, 리온은 생각보다 유원의 상태가 심각하지 않다는 말에 안심해 그제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유원아!”
그렇게 안심하고 게이트가 어떻게 되었나 확인해 보려 핸드폰을 집어 드는 순간, 누군가 유원의 이름을 부르며 다급히 달려왔다.
‘아는…… 사람인가?’
“걱정하지 마세요. 수술이 필요할 정도의 상처는 아니고, 피를 많이 흘려서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것뿐입니다. 아마 안에서 피로가 누적된 탓도 있을 테니 오늘 밤이나 내일 새벽쯤엔 깨어나실 것 같아요.”
“하아. 하아…… 다행이다. 다행이야. 고마워요.”
“아니에요. 세미나 끝나자마자 바로 오신 거예요?”
“저, 유원이랑…… 아는 사이세요?”
유원의 상태를 듣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중년 여성을 보며 리온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아, 강리온 에스퍼……! 이번에도 강리온 에스퍼님이 구해 주셨군요.”
게다가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 사람, 고개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유원과 꽤 닮은 구석이 있었다.
‘혹시…….’
“유원이 엄마예요. 하아…… 부산에는 올 일도 거의 없는데 동료한테 유원이가 이 병원으로 왔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동료요?”
“저도 의사거든요. 학회 참석한다고 잠깐 여기에 와 있었는데…… 이런 소식이 들려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다행이다, 다행이야…….”
유원의 어머니가 아직 잠들어 있는 그의 손을 잡고 다행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읊조렸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니라지만, 유원이 다친 것에 제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 리온은 그 모습을 보며 조금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더 잘 챙겨 줬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이만한 것도 에스퍼님이 구해 주셔서 그런 거겠죠. 그리고…… 이 애는 이미 몇 번이나 에스퍼님한테 도움을 받았는걸요.”
“그, 그렇게 치켜세워 주실 필요는 없어요. 솔직히 제가 그렇게 좋은 선배인 것도 아니고…….”
리온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유원의 어머니가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선배이기 전에 이미 생명의 은인이셨는걸요. 에스퍼님이 아니었다면……. 이 애는 에스퍼와 가이드가 뭔지도 겨우 알았을 텐데, 구해 주셔서…….”
“네?”
선배이기 전에 생명의 은인이라는 게 무슨 소리지. 무슨 말인지 가늠이 가질 않는 말에 리온이 바보 같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머, 모르고 계셨나요? 하긴, 애가 그렇게 살갑지를 못해서…… 그래도 그런 얘기는 좀 하지.”
유원의 어머니가 조금 놀랐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잠시 아들의 손을 다독거리던 그녀가 말했다.
“워낙 많은 사람을 구하셨으니 기억 못 하시려나요. 예전에, 저희 애가 중학생일 때 구해 주신 적이 있어요. 그때도 옆구리를 다쳤었는데.”
“……네?”
놀란 리온이 이곳이 병원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큰 소리를 냈다. 금세 입을 다물긴 했지만,
“하, 하지만 그 애는 되게 작고…… 안경도 쓰고…….”
“졸업하고 바로 시력 교정 수술을 받아서……. 키는 고등학생 때 몰아 컸어요. 못 알아보시는 것도 당연해요. 몇 년 만에 만난 사람들은 다 놀라시더라고요.”
그 애가 유원이었다고? 리온이 당황해 유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머니와 리온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턱이 없는 유원은 그대로 대답 없이 그대로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