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바닥을 한번 뒤집어 보자. 지금이야 숨은 채로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겠지만, 자기들 영역이 뒤집히면 나오지 않고서야 배기겠어?”
“맞아. 그리고 사막전은 빠르게 처리할수록 좋다고. 여긴 야영할 곳도 없고, 낮엔 덥지, 밤엔 춥지…… 일주일씩이나 있을 곳이 못 돼.”
한참 동안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결과 내놓은 계획은 결국 전적으로 리온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리온이 파티 전원을 공중에 띄운 뒤, 홀로 바닥에 능력을 쏟아부어서 숨어 있는 몬스터들을 끄집어내는 것.
보스는 보통 자신의 둥지 안에 숨어 있는 케이스가 대부분이지만, 게이트 안의 수하들이 죽임당하고 나면 위험성을 감지하고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었다.
숨을 곳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이니 후자의 케이스라고 생각한 광현의 지시에 따라 리온을 제외한 사람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리온이가 바람까지 막아 줄 수는 없으니까, 눈에 모래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요. 짐도 잘 싸매고.”
“좀 흔들릴 수도 있는데, 어떻게든 피해 안 가게 해 볼 테니까 감안해 주라.”
“준비 끝났어요.”
일행들의 안전을 확인한 리온이 작게 심호흡을 했다. 너무 강하게 내리쳤다가는 공중에 떠 있는 일행들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 있으니 적당히 힘 조절을 해야 했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리온이라고 해도 자유롭게 다루지는 못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리온이 다른 능력에 비해 조금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때문에 더욱 고도의 집중이 필요했다.
팡―!
힘을 가늠한 리온이 이내 사막 지대를 향해 능력을 퍼부었다.
“언제봐도 사기 같은 능력이라니까. 역시 괜히 S급이 아니야.”
“능력 최대치로 계산하면 센터 건물도 들 수 있을 거라는 소문이 있던데, 헛소문 아닌 것 같지 않아요?”
넓은 범위를 강한 힘으로 내리친 탓에 상공 위까지 강한 모래바람이 불어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바람이 조금 진정되고 앞이 제대로 보일 때쯤, 광현의 예상대로 모래 속에 은신해 있던 몬스터들이 충격에 의해 지면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그 수가 사막 지대 전반을 빼곡히 채울 만큼이었다.
“어차피 사막은 놈들한테 유리한 지형이에요. 그냥 하늘에서 공격하는 게 나아요.”
“오케이. 근데 위치는 좀 떨어트려 주라.”
광현의 말에 에스퍼들이 넓게 퍼졌다. 에스퍼들은 각자의 능력을 이용해 사막 위를 징그럽게 채운 몬스터들을 하나하나 잡기 시작했다.
“아, 이주찬을 데려왔어야 하는데.”
하긴, 죄다 불 질러도 번질 게 없어서 걔 전공이긴 하겠다.”
리온이 툴툴거리면서도 몬스터에게 집중한 채로 사냥을 이어 갔다. 까다로운 환경이긴 했지만, 여긴 B급 게이트였다.
다시 말해 S급 에스퍼인 리온을 상대로는 귀찮은 날벌레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지금은 동시 동작을 쓰고 있으니 조금은 번거로운 날벌레 정도일 것이다.
“같은 능력인데 이거, 부끄러울 수준인걸…….”
희주가 몬스터를 차근차근 공략해 나가면서 중얼거렸다. 분명 같은 염력계 에스퍼인데, 리온과 자신의 힘은 차원이 달랐다. 위력 자체의 차이도 컸지만, 마치 여러 능력을 소유한 듯한 연계 공격도 대단했다.
“어, 저기!”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몬스터들의 시체가 모래사막 한구석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더니 이내 사막 한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얼레, 예상하고는 좀 다른데.”
사막은 그저 입구에 불과했다는 듯 지하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을 가리지 않고 몬스터들이 구멍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들어가야겠지?”
“보스 처리 못 하면 노 클리어인 거 몰라? 빨리 가자.”
에스퍼 일행이 땅을 향해 내려왔다. 그들을 반기듯 스산한 기운이 맴도는 계단을 따라 걷자 활짝 열린 문이 보였다.
“B급 게이트에서 이런 장치가 있는 경우는 잘 없는데.”
“몬스터는 다 잡몹 수준인 걸 보면 아무래도 보스가 꽤 강한 놈일 것 같죠?”
“강해 봤자 뭐, 우리한텐 강리온이 있는데 문제 있겠어?”
광현이 불안해하는 에스퍼들을 달래 그들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화상을 입을 듯 뜨거웠던 햇빛이 완전히 차단되고 몸이 떨릴 정도로 시린 추위가 엄습했다.
“으으, 최단 시간 갱신하는 줄 알았는데…….”
“지하라 지형 파악도 안 되고. 지금 파티랑 상성이 좀 별로인 것 같아.”
“빨리 끝내고 쉬긴 글렀네. 가이드들 당직 서다 온 거 아냐? 잠도 못 잤을 건데.”
에스퍼들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가이드들을 돌아보았다. 유원을 제외한 나머지 가이드 셋은 당직 근무를 서다 불려 온 터라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친 에스퍼에겐 가이드의 가이딩이 있다지만, 지친 가이드에겐 딱히 뭔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 이거라도 먹고 다들 힘내죠.”
짠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던 리온이 집에서 챙겨 온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집을 나오기 직전 쓸어 온 건강식품이 잔뜩 담긴 봉투였다.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죠. 뭐, 넌 자다웠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단 낫지?”
“…….”
리온이 살짝 빈정거리며 말했다. 이쪽도 자다 말고 나온 건 마찬가지였지만, 아직 화가 다 풀리지 않았기에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그러나 심술도 부리던 사람이 부려야 익숙한 법. 가만히 봉투 안을 내려다보는 유원을 보자 양심이 쿡쿡 찔리기 시작한 리온이 마지 못해 도로 입을 열었다.
“뭐, 어차피 굴러다니던 거 가져온 거니까. 먹고 싶으면 그냥 먹던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걸. 그렇게 생각하며 봉투를 유원 쪽으로 내밀자 유원이 얌전히 봉투를 받아 들었다.
“전 괜찮으니까 선배들 드세요.”
“어, 진짜요?”
“전 자다가 나와서 괜찮아요. 그리고 제가 제일 신참이잖아요.”
하! 나한테 그 반만 해 봐라! 역시 챙겨 줄 보람도 없는 놈이었다. 그 광경을 보는 리온이 툴툴거리며 다시 에스퍼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괜히 시간만 낭비했네.’
리온이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어 보며 지하 던전을 살폈다.
“지난번에 갔던 던전은 벽에 박쥐 같은 몬스터들이 드글드글 붙어 있어서 짜증 났었는데, 이번엔 그렇진 않네요.”
하늘 위에서 봤던 광활한 사막처럼, 지하 던전 안은 끝없이 넓었다. 다리가 터지도록 걷고 또 걸었는데도 몬스터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 폭풍전야처럼 고요하고도 불안했다.
“후열이 너무 지친 것 같은데 잠시만 쉬었다가 가자.”
빛이 들어오지 않아 시간을 확인할 방법이 유원의 아날로그 손목시계뿐이었다. 리온이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유원에게 물었다.
“지금 몇 시야?”
“낮 12시 반이요.”
“들어온 게 새벽 4시 반쯤이었으니까…… 지칠 만도 하다.”
광현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가이드들을 바라보았다. 가이드 하나가 자신의 뺨을 내리치며 말했다.
“나 지금 서른 시간 넘게 깨어 있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는데, 하필 이런 곳을 걸려 버렸네.”
주위를 살피던 광현과 리온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게이트 처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이었다.
‘몬스터도 안보이고……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리온이 결심한 듯 말했다.
“급한 거 없으니까 한 시간이라도 눈 붙여요.”
“그래. 몬스터들 몰려오면 바로 깨울 테니까 잠깐이라도 쉬자.”
“가이딩 해 주러 들어온 건데, 우리가 쉬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가이드 하나가 곤란한 얼굴을 하고 에스퍼들을 돌아보았다. 피로에 점령당한 얼굴을 하고도 에스퍼들이 걱정되는 모양새였다.
“잘난 S급 가이드가 있는데, 그게 무슨 걱정이에요.”
리온이 유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 가이드와 달리 유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이딩도 체력에서 오는 거잖아요. 급한 가이딩은 제가 맡을 테니 잠시라도 쉬세요.”
유원이 얌전하게 리온의 말을 거들었다.
“그럼 진짜 한 시간, 딱 한 시간만 쉴게요.”
몇 번을 설득한 끝에서야 겨우 던전 한가운데 간이 침낭을 꺼낸 가이드들이 바닥에 머리를 댐과 동시에 잠들었다.
보스를 처리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도 모를뿐더러 어쨌든 사람을 갈아 쓰는 일이니 잠깐의 휴식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가이딩 필요하신 분, 있으세요?”
“나, 나!”
“나도…….”
“저도요.”
유원의 말에 에스퍼들이 우르르 유원의 앞으로 몰려들었다. S급 가이드에 B, C급 에스퍼라면 딱히 매칭률을 따지지 않아도 효과가 굉장할 터였다.
“살다 보니 S급 가이드한테 가이딩 받아 보는 일도 다 생기네.”
“긴급 출동은 싫지만 이런 가이딩 받을 수 있으면 어쩌다 한 번 정도는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하급 가이드가 상급 에스퍼의 가이딩에 들어가는 경우는 있어도 상급 가이드가 하급 에스퍼의 가이딩을 맡는 일은 드물었으니 저렇게 좋아하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리온은 은근히 기분이 나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뭐 그딴 놈이 있냐며 같이 화내 줘 놓고는 가이딩에 홀려 아무렇지 않게 시시덕거리긴.
어쩐지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유원의 가이딩이 끝날 때쯤 한 시간이 지났고, 에스퍼 일행은 잠깐의 휴식을 취한 가이드들을 깨워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나지 않는 던전,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나타나지 않는 게이트의 잡 몬스터들.
게이트 안쪽 곳곳에서 성가시게 굴어야 할 몬스터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었는지에 대한 의문과 불안감이 리온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