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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퍼센트의 사랑 27화

“그런 일이 있었다니까.”

“그래서, 유원 씨는 괜찮대?”

“괜찮지. 입 터는 것 보니까 괜찮다 못해 아주 쌩쌩해.”

리온이 진하에게 게이트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분통을 터트렸다.

“기껏 걱정해 줬더니 왜 말을 그딴 식으로 하냐고.”

“그래서, 괜히 구해 준 것 같아?”

“……그렇다기보다는, 뭐.”

아직 자책감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부분은 이제 기억도 희미할 만큼 열이 뻗쳐서인지 마음이 좀 가벼워지긴 했다.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래서 내일부터 동시 동작 훈련 받기로 했어. 여태 답답하기도 하고 해도 해도 마음처럼은 안 되니까 시간 낭비 같아서 안 하려고 했는데 이제 진짜 해야겠더라.”

“그게 그렇게 재미가 없어?”

“그냥 재미가 없는 수준이 아니지. 그거 한번 하고 나오면 옷은 엉망이고 열은 받을 대로 받고……. 솔직히 좋게 말해서 동시 동작 훈련이지, 그냥 냅다 이것저것 집어던지는 거나 마찬가지야.”

리온이 별로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하고 센터 입소 초반 받았던 훈련을 생각했다. 다른 훈련은 다 괜찮았는데, 그 훈련만은 훈련이 아니라 놀림 받는 기분이었던 데다가 큰 필요성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지 않아도 방대한 힘으로 빠르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고, 선배들 역시 ‘아, 딴 거 다 잘하는데 이거 하나 정도는 잘 못 할 수도 있지!’ 하며 리온의 기를 북돋아 줬기 때문이다.

“세상에 쓸모없는 훈련이라는 건 진짜 없더라. 괜히 몇십 년 동안 이런 훈련 방식을 개발해 온 게 아닌가 봐.”

“그래도 큰일 안 나서 다행이네. 그리고 본인도 괜찮다고 했잖아. 너무 신경 쓰지 마.”

“솔직히 처음엔 진짜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열 받아서 그 재수 없는 놈한테 다신 그런 빚 안 지고 싶단 생각뿐이야.”

유원은 하루 병가를 냈다. 예린에게 슬쩍 들은 바로는 감기라는 것 같았다. 하긴 눈 폭탄을 맞고 몸 추스를 틈도 없이 한겨울에서 한여름으로 내쳐졌으니 그럴 만했다.

“그렇게 재수가 없어?”

“어. 오늘도 병가 내고 안 나와서 그렇지, 만약 있었으면 또 나한테 잔소리나 하고 있었을걸?”

“유원 씨는 왜 선배한테만 그렇게 쌀쌀맞을까요. 그래도 매칭 관계인데.”

진하에게 가이딩을 받고 있는 주찬이 말했다.

“선배한테만 그러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냥 평범하게 굴던데요.”

“……내가 싫은 건가 보지.”

리온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얘도 이유원이랑 같이 첫 게이트에 들어갔었지. 리온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네 생각엔, 내가 걔랑 처음 게이트 들어갔던 날 실수한 게 있었던 것 같냐?”

“처음 게이트 들어갔던 날이요? 잘 기억 안 나는데…….”

“끽해야 고작 반년인데 벌써 기억이 안 나?”

리온이 어서 기억해 보라며 주찬을 닦달했다. 결국 리온의 등쌀에 못 이겨 그날의 기억을 끄집어 낸 주찬이 말했다.

“근데 뭐…… 별일 없지 않았어요? 그냥 유원 씨는 낯을 좀 많이 가리고, 선배는 긴장 풀어 주려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게 막 부담스럽고 그랬나?”

“음…….”

주찬의 고민이 길어지자 조금 불안해진 리온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건드렸다. 주찬이 한참 동안이나 상황을 되짚어 보다 말했다.

“낯을 많이 가리는 사람 입장에선 좀 부담스러웠을 것 같기도 하고…….”

리온이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입을 떡 벌렸다.

눈치 없는 주찬이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아니, 운동 좋아하냐고 갑자기 팔을 만지고 그러면 싫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아니, 그런가…….”

주찬의 해맑은 말에 리온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일부러 들이댄 거였는데. 그게 부담스러웠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럼 불편하다고 말을 하던가. 대놓고 싫은 티를 내고, 가까이 가기만 해도 벌레라도 닿은 양 피하고! 그거는 좀 심한 거 아니냐?”

리온이 편을 들어 달라는 듯 억울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과하게 중립적인 면이 있는 주찬이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그렇긴 하죠. 그래도 동료고 심지어 매칭 관계였고, 거기다 그땐 페어 신청서도 낸 상태였지 않아요?”

“맞아. 썼었지.”

“좀 부담스러웠더라도 나쁜 의도로 그런 것도 아니고 선배도 나름 분위기 편하게 만든다고 그런 거였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좀 너무하긴 하죠.”

“그러니까. 누가 보면 내가 걔한테 돈이라도 뜯은 줄 알겠어.”

몇 번의 상처 끝에 원하는 답을 들어 낸 리온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유원 씨가 리온이한테만 유독 쌀쌀맞아요?”

“저도 유원 씨 자주 본 건 아닌데……. 리온 선배한텐 쌀쌀맞다기보단 불같죠. 다른 사람들한텐 좀 무뚝뚝하긴 해도 예의 바르게 구는데, 이상하게 리온 선배 앞에서만 애 같은 건지, 불같은 건지. 뭐 그렇게 굴어요.”

“유원 씨 아직 고등학교 졸업한 지 반년도 안 된 것 아니에요? 그 정도면 애지, 뭐.”

“걔 편들어 주지 마. 난 스무 살 때 그따위로 싸가지 없지 않았거든?”

리온이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차라리 다른 사람들한테도 다 똑같은 태도를 고수한다면 그나마, 아주 조― 금이나마 위로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유원은 리온에게만 그랬다. 유난스럽게, 까칠하게, 그리고 재수 없게.

“게이트 들어오기 전에는 사이 괜찮았어요? 아니지. 게이트에서도 들어갈 땐 괜찮았던 것 같은데.”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리온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무튼 이번엔 자신의 안이함 때문에 험한 꼴을 본 게 맞으니 사과하고 좀 잘해 주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글렀다.

“이제 진짜 걔한테 신경 안 쓸 거야. 내가 자기 없으면 뭐 망하기라도 하는 줄 알아? 이제 얘가 있으니까 괜찮다고.”

“내가 있어서 다행인 거네.”

“다행이지. 넌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야. 센터 좀 빨리 들어오지 그랬냐?”

“하하. 외국에서 유학하다 보니 검사 받을 일정 잡기가 영 힘들더라고.”

진하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니가 프랑스계 미국인이지만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도 한동안 미국에 살았다고 했다.

에스퍼든 가이드든 능력 검사는 자국에서만 받을 수 있도록 국제법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진하는 자신이 가이드라는 것 자체를 늦게 알게 된 편이었다.

“근데 선배, 저번에도 유원 씨랑은 진짜 끝이라고 했잖아요. 제 기억엔 저번 달에도 그랬고, 저저번 달에도…… 악!”

“넌 진짜 눈치라고는 먹고 죽으려도 없구나.”

리온이 주찬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주찬은 능력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데, 어리바리한 면이 있는 게 문제였다.

“이번엔, 아니지. 저번에도 진짜였거든? 근데 같은 게이트에 배정받은 매칭 가이드니까 아예 얼굴 마주하지 않을 수도 없고, 나 때문에 다쳤는데 신경이 안 쓰였겠냐고.”

“아, 하긴 그렇긴 하겠네요.”

“근데 기껏 걱정해서 데려다주겠다고 했더니! 또 시비나 걸고! 뭐? ‘자기 몸 하나 못 챙겨서 다쳐서 나올 때마다 사람들 기분이 어떨지요.’ 이런 재수 없는 소리나 하고!”

리온이 유원의 말을 우스꽝스럽게 따라 하며 분을 털어놓았다.

“그렇게까지 말했어요? 아, 근데…… 또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야, 너는 가이드도 아니고 에스퍼가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지. 넌 네가 다칠 것 같으면 같이 들어간 가이드 내팽개칠 거야?”

“그건 아니죠.”

“평소에 게이트 안에서 자주 다치나 봐?”

두 사람의 바보 같은 티키타카를 구경하고 있던 진하가 물었다. 센터로 온 지 채 한 달도 안 된 진하는 게이트 경험이 없었다.

유원은 처음부터 리온의 매칭 가이드였기에 게이트 임무가 급하게 주어졌지만, 보통은 한 달 가까이 여유를 두고 첫 파견을 하는 편이었다.

“솔직히 부상 걱정 없이 하는 일은 아니잖아요. 근데 그중에서도 리온 선배는 좀 자주 다치는 편이에요.”

주찬이 리온의 한쪽 팔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여기 옷 밑에 꽤 큰 흉터 하나 있지 않았나? 선배가 동시 동작이 다른 것에 비해 서툴다 보니까 한 번씩 다쳐요. 뭐가 안 된다 싶으면 몸부터 던져서.”

“능력도 잘난 애가 왜 이렇게 상처가 많아.”

주찬의 말에 리온을 빤히 쳐다보다 반팔 티 소매 끝에 희미하게 삐져나온 흉터를 발견한 진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얘 말대로지 뭐. 그런 상황이면 길게 생각할 정신도 없이 몸부터 나가서 그래. 그리고 동시 동작이 다른 것에 비해 서툴긴 하긴 하지만 진짜 위험한 상황이면 본능적으로라도 방어가 되는 편이라, 다른 사람들보단 적게 다쳐.”

“적게 다친다고 뭐가 다르나. 어차피 다치는 건 똑같은데.”

“이 정도면 영광의 상처지, 뭐.”

리온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흐음.”

그런 리온을 보며 진하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무언가 눈치챈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몸조심해야지. 동시 동작 훈련은 꼭 잘 받아야겠다.”

“나도 알아. 내일부터 훈련 시작하겠다고 했더니 센터장님이 신이 나서 바로 일정 잡아 주더라. 좀 더 바빠지긴 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리온이 옷 아래 숨겨진 흉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내일부턴 그 지겨운 훈련이 다시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튼, 걘 진짜 가망이 없어. 두고 보라고. 이제 게이트 안에서도 말 한마디도 안 걸 거니까.”

리온이 이를 바드득 갈며 말했다. 당분간 게이트 배정이 안 되길 빌어야지. 아, 그냥 게이트가 열리질 않았으면 좋겠다.

리온은 입사 이후 처음으로 게이트에 가기 싫다는 생각을 하며 앞으론 유원을 쳐다보지도 않을 거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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