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나름 고민이 많았겠네.”
“괜히 유난 떠는 것 같기도 하고, 제가 생각해도 좀 이상한 것 같긴 한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몇 가지 이야기는 숨겼지만, 대강의 이야기를 희주에게 털어놓은 리온이 고개를 숙였다. 입 밖으로 꺼내 보면 좀 정리가 될까 싶었는데,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알고는 있었는데, 가면 갈수록 걔가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 확인 사살당하는 기분이기도 하고, 또 어떨 땐 내가 너무 과민하게 생각하나 싶기도 하고.”
“둘이 성격이 어지간히 안 맞긴 하지. 그렇지만…… 난 유원 씨가 널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던데.”
희주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장난기 가득했던 희주였지만, 리온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덩달아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근데…… 어제 서하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거든요. 그걸 듣고는 또 내가 착각했던 건가 싶어지더라고요.”
“무슨 말.”
“음…… 병원에 있을 때요.”
리온이 차분한 목소리로 제가 들은 이야기 그대로를 설명했다. 이야기를 할수록 유원이 자신을 귀찮아하는 것 같다는 확신이 스멀스멀 올라와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사이가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수습하기 힘든 매칭 에스퍼한테 대충 맞춰 주는 건가 싶기도 하고.”
“예전 같았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알 바냐고 했을 텐데, 너도 많이 바뀌었네.”
“그렇…… 네요.”
차라리 신경 쓰지 않을 때가 좋았는데. 리온이 그렇게 생각하며 살짝 웃었다. 잠시 그런 리온을 바라보던 희주가 무언가를 곰곰이 떠올렸다.
“그런데 난…… 그건 잘 모르겠어.”
“왜요?”
“우리 긴급 출동했던 그 게이트 있잖아. 너랑 유원 씨랑 같이 들어갔던 그 게이트.”
희주와 유원이 함께 들어갔던 게이트는 딱 하나뿐이니 희주가 말하는 게이트가 무엇인지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때 보기로는 딱히 그래 보이지 않았었거든.”
“그때요? 그 게이트 나오자마자 페어 신청 취소하고 사이 완전 틀어졌었는데…….”
의외의 말에 리온이 뭔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얼굴을 하고 희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희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때 맞아. 내가 너랑 유원 씨 같이 있는 거 본 적이 그때밖에 없는데 다른 날이랑 헷갈릴 리가 없잖아.”
“아, 하긴…….”
그렇긴 하네. 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날 본 모습으로 유원이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는 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근데 대체 뭘 보고 그런 생각을 하신 거예요? 저희 그 게이트 안에서도 사이가 좋진 않았었는데.”
“아, 너는 기억 못 할 거야. 너 그때 제정신 아니었잖아.”
그 게이트에서 보스의 독에 당해 기절한 채로 나왔었던 것은 기억났다. 하지만 자신이 쓰러지고 난 후의 상황 같은 건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리온이었다.
“음…… 이유원한테 미쳤냐는 소리 들었던 건 기억나는데…….”
열심히 머리를 굴려 봤지만 애틋한 장면은커녕 미쳤냐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밖에 나질 않았다.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말하자 희주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 그것보다 더 뒤. 아예 쓰러지고 난 다음에 말이야.”
“그때 무슨 일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사람 하나하나 올려 보냈었으니까 기억하지. 유원 씨가 너를 안고 게이트 밖으로 나갔었어.”
“아…… 안겼던 것까지는 기억나요.”
대뜸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려졌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건 알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몸 사리지 않고 나서는 통에 다쳐서 나온 적은 몇 번이고 있었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다지 좋지 않은 의미로.
“그 뒤로는…… 눈 떠 보니 병원이었고 페어 신청 취소하겠다고 난리 쳤었죠. 그때부터 사이도 최악이 됐고.”
“그때 유원 씨 표정이, 되게 기억에 남았었거든.”
희주가 그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리온이 의식을 잃고 난 후, 아니 리온이 제대로 보지 못했을 뿐 유원의 표정은 처음부터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표정 변화가 적은 유원이었기에 그 표정이 더 기억에 남았던 것 같기도 했다.
“네가 다쳤으니까 너를 제일 먼저 게이트 밖으로 내보내야 했는데, 유원 씨가 너를 너무 꽉 안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한 번에 들어서 옮겨야 했어. 천장 위로 올려 주자마자 먼저 가 보겠단 말도 안 하고 바로 게이트로 뛰어가더라고.”
“그런 일이 있었어요?”
“얘기해야 할 만큼 엄청난 일도 아니었고…… 네가 그 뒤에 너무 큰 사고를 쳐 버려서, 다들 그 얘기만 하느라 금방 잊어버리기도 했고.”
리온이 페어 신청을 철회했다는 소식 때문에 희주 역시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느 날 불현듯 생각이 났을 때는 이미 그 이야기를 꺼내기 애매할 만큼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래서 유원 씨가 표현이 서툴러서 그렇지, 조만간 너랑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었어.”
“그런…… 그런 건 미리 말 좀 해 주시지.”
“나도 잊어버리고 있었어. 그리고 C급인 내가 너랑 같은 게이트에 들어갈 일도 잘 없고, 대뜸 찾아가서 말하기엔 또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왠지 너무 늦게 듣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다.
리온이 한참 동안 그 상황을 상상해 보다 말했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랬다고 해도 지금은 아닐 수도 있는 거죠.”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 일과 이번 S급 게이트 사이에는 짧지 않은 시간이 있었다. 그때는 걱정했더라도 지금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걱정했다면…… 적어도 병문안은 왔겠죠. 멀리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같은 병원, 같은 층에 있었는데.”
조금 더 추측해 보자면 사실 그땐 유원이 신입티를 다 못 벗었던 시기였기도 했으니 단순히 놀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매번 사이코니 뭐니 했지만 유원은 그냥 자신의 행동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할 뿐 정말 공감 능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으니, 그때까진 다친 사람을 보고 외면할 정도로 자신이 싫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었다.
‘예전엔 분명히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신경 쓰이진 않았는데.’
관계를 개선해 보겠답시고 동거까지 제안한 것이 후회되는 리온이었다. 이렇게 신경 쓰일 줄 알았더라면 그냥 있는 대로 사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글쎄, 너무 앞서나간 생각일 수도 있지만…… 꼭 싫어야만 보기 싫은 건 아니더라.”
어깨를 축 늘어트린 리온에게 희주가 달래듯 말을 건넸다. 잠시 리온을 바라보던 그녀가 말했다.
“센터에 그런 사람 한둘이 아니겠지만, 나도 나름 가정사가 있거든. 자세히 말하긴 좀 그렇고…… 대충 설명하자면, 아버지가 편찮으셨어. 근데 나도 있고, 내 동생도 있다 보니 어떻게 집에서 놀기만 하냐고 그 몸으로 우리 몰래 일을 하시고 그랬거든.”
최악의 상황에는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일.
리온과 같이 사명감을 가지고 들어온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큰돈이 필요해 센터 입소를 결정한 사람도 많았다.
희주도 그런 경우였다. 돌아가신 어머니, 아픈 아버지와 대학 진학을 간절히 바라던 동생.
가족들을 책임지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오다 뒤늦게 받은 형질 검사에서 자신이 에스퍼라는 걸 알게 돼 센터에 들어왔다.
“센터에 들어오기 전엔 나도 알바하느라 바빠서 아버지가 나가는지, 집에 있는지 확인할 틈도 없었어. 처음에는 몸도 안 좋으신데 일하시게 만든 게 죄송스럽기도 해서 길게 잔소리 못 했는데 센터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돈을 좀 벌었잖아? 그래서 당장 일 다 그만두고 치료나 받으시라고 강하게 말했지.”
희주가 몇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센터에 들어오고 나서, 매일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를 해도 두세 달은 걸려야 손에 들어왔을 금액의 돈을 받자마자 아버지에게 이제 치료만 받으라고 통보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안심이 되질 않아 일하지 않는 게 어색하다며 틈만 나면 지인들의 일을 도와주러 나갔고, 그렇게 받은 돈으로 동생과 그녀에게 얼마 되지 않는 용돈을 쥐여 주곤 며칠을 끙끙거렸다.
“처음에는 이제 내가 돈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버는데 왜 힘들게 그런 일을 하냐고 화냈어. 말려 보려고 했는데 알바를 하든 센터에서 일을 하든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건 마찬가지고, 동생도 학교 다니느라 집에서 하루 종일 아버지를 감시할 순 없었거든.”
처음에는 화를 내고, 아버지를 설득해 보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간 낭비라는 생각에 화를 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한 번은 또 몰래 일을 다녀온 아버지가 아프단 말을 듣고도 병원에 찾아가지 않았었다.
“아버지가 미워서 그랬던 건 아냐. 그냥…… 그땐 답답했던 것 같아. 아무리 말해도, 하지 말라고 몸 더 안 좋아진다고 잔소리를 해도 내 말은 듣지도 않으니까 지치기도 했고.”
“…….”
“너무 앞서나간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냥 난 그랬어. 싫어야만 그 사람을 보기 싫은 게 아니더라고. 너무 좋아도 그렇더라. 너무 좋은데, 소중한데. 나만 늘 애쓰는 것 같으면.”
‘그럼 내가 형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그건 좀 기쁘네요.’
희주의 씁쓸한 미소에 유원의 목소리가 떠오른 건 왜였을까. 전혀 다른 인상의 두 사람이 겹쳐 보이는 듯한 착각에 리온이 멍하니 희주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