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 좀 해요.”
“……난 하고 싶은 이야기 없는데. 빨리 가서 짐이나 마저 싸는 게 좋지 않을까? 저게 언제 움직일지 모르니까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싶거든.”
리온이 유원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가 무슨 소리를 할지는 몰라도, 그 대화가 좋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도 유원의 시선은 그대로 느껴졌다. 결국 어색한 공기를 이기지 못한 리온이 유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유치하게 굴지 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할 줄 알고요.”
“……또 뭐, 몸 생각은 추호도 안 하니 뭐니 하는 잔소리나 하겠지. 그런데 이건 일이야. 몸 사리다가 다 같이 죽을 수도 있다고. 네가 이것보다 더 나은 해결책을 찾아온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지금은 방법이 이것밖에…….”
“지금껏 제가 한 말이 다, 귀찮은 잔소리로만 들렸어요?”
유원이 리온이 하던 말을 끊었다. 평소와 같은 말, 하지만 이번에는 잔뜩 날이 선 말투가 아니었다.
“저도 알아요, 일이라는 거. 이번엔 이것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없다는 거.”
리온이 예상한 말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말, 그렇지만 처음 보는 표정과 어울리지 않게 파르르 떨리는 손.
“제가 하는 말은 형한테 딱 그 정도의 의미였던 거네요.”
“그게…….”
“듣기 싫은 잔소리.”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리온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맞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
하지만 입이 리온의 마음처럼 따라 주지 않았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는지,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지 떠오르질 않았다.
때때로 침묵은 긍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번에는 아니었지만, 유원에게 리온의 침묵은 긍정을 의미하는 것 같아 보였다.
“가지 말라고 할 수 없다는 거 알아요. 그 정도도 모를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거든요. 아니, 상관없나. 어차피 형한테 제가 하는 말은 다 듣기 싫은 잔소리일 뿐이고, 형 눈에 저는 공과 사도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보일 테니까.”
“그, 그런 뜻이 아니라 난 그냥.”
“……그러니까 형이 이런 상황에 잠깐이라도 내 생각을 해 주길 바라는 게,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기대였다는 것도.”
정작 유원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유원이 남아서 자신을 가이딩하겠다고 고집을 부릴까 봐, 였지만, 리온은 그것을 말하지 못하고 가만히 입술을 파르르 떨 뿐이었다.
게이트에서 나가면, 이 상황을 끝내고 나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유원을 마주하고서는 나가서 이야기하자는 말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다 아는데…….”
유원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에 리온이 자신도 모르게 유원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할 수 있는 게 짜증 나는 잔소리뿐이라 죄송하네요. 저도 제가 좀 더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이번엔 유원이 리온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할 말이 많은 얼굴을 하고 리온을 바라보던 유원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제가 어떤 말을 해도 의미 없겠죠. 듣고 싶지도 않을 테고, 시간 낭비일 뿐이니까.”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지금은 여유 부릴 시간이 없으니까 너도 이럴 시간에 최대한 멀리 가는 편이 안전하고.”
“그래도 가이딩은 필요하잖아요. 힘을 끌어 쓰려면…….”
“그건 안 돼.”
내내 어벙하게 있던 리온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제안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요? 형이 그렇게 좋아하는 효율 챙기려면 그편이 제일 낫잖아요.”
“내가 안 괜찮아. 가이딩을 하려면 바로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그럼 신경 쓰일 거고, 오히려 방해만 돼.”
“신경 안 써도 돼요. 저는 제가 다치든 말든 상관없어요. 형도 그렇잖아요.”
“그건…… 다르지. 나는 에스퍼고, 너는 가이드니까.”
“에스퍼면 뭐, 상처가 피해 가기라도 한 대요?”
“……내가 신경 쓰여서 안 된다니까? 됐어. 그만하자. 말싸움할 시간 없어.”
“사람이 참 일관적이질 못하시네요.”
유원이 비꼬듯 말했다. 어쩌면 리온을 화나게 만들어 ‘그래, 그렇게 잘났으면 그냥 남아. 남으면 될 거 아냐!’ 하는 소리를 이끌어 내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리온은 유원과 함께 이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른 가이드였다면 자신이 남아야 하기라도 할까 봐 가슴 졸이며 제발 아니기를 기도했을 텐데, 유원은 도대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걸까.
“굳이 다칠 수도 있는 길을 고르고 싶어 하는 이유를 모르겠네.”
“형은 제가 그렇게 말할 때 한 번이라도 들었어요?”
“……너랑 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지. 나는 일이 잘못되더라도 최악의 상황은 면할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고, 너한테는 없어. 내 말이 틀려?”
“…….”
“이제 이 얘기는 그만하자. 정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 그럼 그때는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들어 줄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제발 그만하고 안전한 곳으로 가 버려.
리온이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한 템포를 쉬어 갔다.
“제발 그만해. 그만하고 가.”
“형은 언제나 참 형 마음대로네요. ……좋아요. 그래도 이것까지 거절하지는 않겠죠.”
유원이 포기한 듯 길게 한숨을 쉬곤 한 손을 내밀었다. 리온이 어색하게 그 손을 잡았다.
평소와 같은 가이딩일 뿐인데 조금 다른 감각이 느껴졌다. 기분 탓이겠거니 생각한 리온이 고개를 숙인 채 맞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형은 언제나 제멋대로예요.”
“…….”
“저도 그렇게 제멋대로 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럼 너도 그렇게 하던가.”
입을 다물고 있으려고 했지만, 이 상황에서도 입은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기어코 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 하고 만 리온이 도로 입을 다물었다.
“……하, 그럴까요.”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을 뗐다. 가이딩은 이미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차 있었고, 대화할 시간을 위해 피해 주었던 팀원들도 슬그머니 나타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나가서는 다 네 마음대로 해.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이야기하고 말고 할 시간도 없어.”
“준비 다 됐어요.”
“나도 얘기 끝났어요. 얼른 데리고 가요.”
리온이 정현 쪽으로 유원을 밀어 버렸다. 유원이 리온에게 힘으로 밀릴 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유원은 순순히 밀려 주곤 리온을 보내 주었다.
걱정하는 거면 그냥 좋은 말로 해 주면 안 되냐고, 나는 성격이 글러 먹어서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아도 네가 그렇게 왁왁하면 나도 모르게 더 화내게 된다고. 그렇게 말해 준다면 리온에게도, 유원에게도 나은 방법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리온은 결국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이번엔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다.
“최대한 멀리 가요. 어떻게든 영향 덜 가게 해 보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네, 네.”
“그리고 만약에라도 저게 움직이면…… 효빈 선배가 잡아 보겠지만 오래는 못 버틸 테니까 네가 다 데리고 빠르게 날아와야 해. 알겠지?”
“빠르게 달려올게요.”
리온이 주섭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리며 말했다. 주섭이 고개를 끄덕이곤 유원에게 미리 정리해 둔 가방을 건넸다.
가방을 받아 든 유원이 나머지 팀원들과 합류했다.
“조심하세요.”
“누가 누굴 걱정하냐, 나 못 믿어?”
“당연히 믿죠. 그런데 저걸 보니까…… 으으, 저런 게 몬스터라니. 갑자기 움직이기라도 하면 어떡하죠?”
“그러니까 빨리 처리할 수 있게 어서 멀리 가 버리라고. 나도 금방 처리하고 갈 테니까.”
리온이 조금 긴장한 것 같은 주섭을 달래 보냈다. 효빈과 리온, 센터장을 제외한 사람이 모두 떠나고 남은 세 사람은 보스를 보며 마지막으로 계획을 확인했다.
“효빈 선배가 이쪽. 나는 여기에서 능력을 쓰고……. 센터장님은 윤아 누나가 만들어 준 자리에…… 미리 옮겨 드릴까요?”
“지금은 좀. 애들 어느 정도 이동했다 싶을 때 시작하는 게 낫지 않겠냐.”
“그럼 한참 걸리겠는데요. 리온, 네가 올라가서 얼마나 갔나 한번 봐, 봐.”
“지금은 당연히 얼마 못 갔죠. 보자, 저 정도 속도면…… 그래도 안전 범위라고 할 만한 곳으로 이동하기까지 적어도 한 시간은 걸릴 것 같아요.”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리네.”
“그동안 보스나 좀 더 살펴보죠. 일단…… 저기가 머리인 건 맞겠죠?”
팀원들이 영향을 덜 받을 만한 곳으로 이동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어차피 이쪽에서도 만반의 준비를 해 두는 것이 좋을 테니, 세 사람은 리온의 도움을 받아 보스를 면밀히 살폈다.
“확실히…… 만져 보니 알겠네.”
“이런 몬스터는 또 처음 봐요. 흙 속에 숨어 있는 경우는 몇 번 봤는데.”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대놓고 있는데도 몰랐다니, 돌아가면 새로운 형태의 몬스터에 대해 보고서부터 써야겠어.”
“센터장님도 어째 얘를 닮아 가는 것 같아요.”
“그건 좀 싫은데.”
효빈과 센터장이 긴장을 떨쳐 내기 위해 일부러 실없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러나 리온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지 못한 채 멍하니 보스를 살필 뿐이었다.
‘긴장이라도 한 건가?’
리온이 심란한 이유를 알 리가 없는 두 사람이 그런 리온을 슬쩍 보며 조금 비껴간 걱정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