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살아 보는 거 어떻겠냐고.”
중간이 생략되어도 너무 생략된 폭탄 발언에 당황한 유원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어차피 리온이 할 말이야 거기서 거기일 거라고 생각했기에 어차피 비슷한 말일 거, 빨리 듣고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상상치도 못한 말이 나와 버렸다.
“……저더러 기숙사에 들어와서 살라고요?”
“기숙사는 둘이 살기는 좀 좁지 않나, 따로 집을 구해도 괜찮겠지만 네가 괜찮다면…….”
“잠깐, 잠깐만요. 진짜 같이 살자는 말이에요?”
“그럼 가짜로 같이 사는 것도 있어?”
“왔다 갔다 하는 시간 아끼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네 집은 어차피 센터 코앞인데 굳이……? 어차피 왔다 갔다 해 봤자 10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데.”
리온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그 정도는 유원도 생각할 수 있다. 정말 몰라서 물은 게 아니라, 그런 이유가 아니고서야 리온이 자신에게 동거를 제안하는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럼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데요?”
“우리 서로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더라고. 맨날 싸우고 그랬구나 할 게 아니라 좀 제대로 알아보자.”
“갑자기 그런 생각을 왜 하신 건데요?”
“그냥…… 그럼 안 되냐?”
네 씁쓸한 표정이 자꾸 신경 쓰여서. 이 말을 하기에는 조금 부끄러웠던 리온이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게이트 안에서 선배님들이 해 준 얘기가 있었거든. 두 분도 예전에는 엄청 싸우셨대. 아, 지금도 좀 그러시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신뢰가 기반으로 된 관계라는 건 보이잖아?”
리온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유원이 태환과 희수의 관계가 어땠는지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정도의 사이만 되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었지.’
“그래서 두 분은 어떻게 이렇게 관계를 쌓으셨는지 물었는데, 사귀어 보고 나서 해결했다고 하시더라고.”
“네?”
유원이 다시 한번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긴장한 채로 말을 하느라 자신의 말이 유원에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던 리온이 뒤늦게 손사래를 치며 설명을 덧붙였다.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리온이 겨우 진정하고 게이트 안에서 들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유원에게 설명해 주었다. 뜬금없는 소리에 당황했었던 유원도 상황을 이해하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알아 가는 시간을 가져 보자고요?”
“그래. 솔직히 우리 알게 된 지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잖아? 네 말대로 98퍼센트든 99퍼센트든 전례 없는 매칭률이니까 앞으로도 가까이 지내야 할 거고, 나 이번 부상으로 한동안 게이트도 못 들어가게 됐거든.”
리온이 못내 아쉬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자신이 없을 때도 센터는 어떻게든 굴러갔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여튼, 여기 한동안 붙어 있게 됐으니까 그 시간을 좀 의미 있게 써 보려고. 나도 너랑 붙어 있으면서 얘기도 좀 하고 그러다 보면 뭔가 바뀌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
“…….”
“매번 앞으로 잘 지내 보자고 얘기만 했지, 일할 때 아니고는 데면데면했으니까. 네가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괜찮아요.”
유원이 그 말에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퇴짜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원을 설득할 만한 이야깃거리를 여럿 생각해 놨었던 리온이 빠른 승낙에 당황했다.
“진짜 괜찮아?”
“집 따로 얻지 말고, 제 자취방으로 형이 오는 걸로 해요. 같이 살기에 좁은 집도 아니고, 그런 이유라면 저도 괜찮아요.”
“그렇긴…… 하지.”
“손님 방으로 쓰는 방 하나 있으니 치워 둘게요. 언제 들어오실 건데요?”
“음…… 결심한 김에 빠르게 들어가면 좋을 것 같은데. 기숙사 퇴소 신청부터 해야 하니까 적어도 3일은 걸리지 않으려나.”
“알겠어요. 맞춰서 준비해 둘게요.”
“음식 나왔습니다.”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끝나 버린 이야기에 조금 얼떨떨해진 리온이 어색한 손길로 식기를 잡았다. 나름 설득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쉽고 싱겁게 이야기가 끝나 버렸다.
“다들 놀라겠다, 대뜸 내가 너랑 같이 산다고 하면 오늘 만우절이냐고 물어보는 거 아니야?”
“그렇겠죠. 특히…….”
유원이 이 소식을 듣고 기절초풍할 것이 분명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모두가 놀라겠지만, 아마 이 사람이 제일 놀라지 않을까.
“특히 누구? 진하?”
“……그 사람은 몰라요?”
“걔 게이트 들어가서 아직 안 나왔잖아. 일정 확인 안 해 봤어?”
“관심이 없어서 몰랐네요.”
왠지 표정이 좋아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리온이 유원의 미묘한 변화를 살피다 그가 말한 것이 누구인지를 알아챘다.
“아, 누구 말하는 건지 알겠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 바로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놀라서 뒤로 넘어가는 건 아닌가 몰라.”
리온이 생각만 해도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었다.
* * *
“……내가 지금 꿈을 꾸나.”
“꿈 아닌데요. 볼 꼬집어 드려요?”
“헛소리하는 거 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내 눈이 잘못됐냐?”
“그거 기숙사 퇴소 신청서 맞아요.”
“새로운 방식의 반항이야? 이래도 너 게이트 못 보내. 의사 선생님께서도 퇴원해도 된다고 하신 거지 무리해도 된다고 하시진 않았거든?”
센터장이 리온의 기숙사 퇴소 신청서를 들고 흔들어 보이며 으름장을 놓았다. 놀랄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런 반응까지는 예상 못 했는데.
‘이런 반응이면 괜히 기대에 부응해 주고 싶단 말이지.’
“그냥…… 천천히 생각 좀 해 보고 싶어서요.”
“천천히? 생각?”
센터장이 그런 단어가 너와 어울리기나 하냐는 듯 눈을 매섭게 떴다. 리온은 그의 말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제가 지금까지 좀 성급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사람이 앞만 보고 달리기만 해서 일을 해결하겠어요?”
“그건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리온의 퇴소 신청서를 그의 의도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방향으로 받아들인 센터장이 급기야 울컥한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네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럴 수가 있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그럼 그전에 미리 얘기라도 하던가. 어떻게 나한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센터장님이랑 상의해야 하는 이야기가 아니지 않나 싶어서…….”
“너, 너 어떻게 그런…… 내가 너를 얼마나…….”
이쯤 놀렸으면 됐나. 리온은 툭 치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센터장을 놀리는 것을 이쯤에서 그만두고 말했다.
“맞죠, 집 바꾸는 걸로 무슨 상의씩이나 해요.”
“어, 어?”
“기숙사 퇴소하고 잠깐 다른 데서 지내려고요.”
“센터 그만둔다는 거 아니었어?”
“제가 센터를 그만두긴 왜 그만둬요. 게이트 못 들어가는 것만 해도 좀이 쑤시는데.”
센터장이 그제야 자신이 리온에게 속았음을 깨달았다. 리온이 거짓말 하나 치지 않은 건 맞지만, 얄밉게도 그는 단단히 오해해 혼자 드라마를 찍는 센터장에게 굳이 사실대로 정정해 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가지고 논 것이었다.
“너, 너…… 이 미친놈아.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센터장님이 혼자 겁먹으신 거면서.”
“지금 같은 시기에 그러면 당연히…… 아니, 기숙사 나가는 거 가지고 왜 분위기까지 잡고 난리야?”
센터장이 억울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리온이 처음부터 센터장을 골려 줄 생각을 하고 이야기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분위기 잡은 이유는 따로 있는데.’
“근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가려고 하는 건데? 기숙사에 사는 게 왔다 갔다 하기도 편하고 안정감이 느껴져서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은 없는데, 사정이 생겨서요.”
“무슨 사정? 뭐, 기숙사에 벌레라도 나와? 아니지, 귀신이라도 나와? 웬만한 이유로는 나갈 놈이 아닌데.”
기숙사에서 나가는 거야 이상할 것 없는 일이지만, 리온은 기숙사에 오래 남은 드문 케이스였다. 시설이 나쁜 편은 아니라지만 에스퍼나 가이드가 돈을 적게 버는 직업도 아닌데 굳이 기숙사 생활을 이어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이사 가게?”
“여기 앞에 오피스텔이요. 이름이…… ** 오피스텔이었나.”
“아, 거기? 거기 시설 좋다고는 하더라. 대신 엄청 비싸다던데. 하긴 너한테는 별로 상관없는 문제겠네. 거기 사는 애들 몇 명 있었는데.…… 누구였더라.”
“유원이요?”
“아, 맞아. 유원이도 거기 살고 진하도 거기 살고. 괜히 또 출근하다 마주쳤다고 싸우고 그럴 건 아니지, 너?”
“안 그래요.”
리온이 냉큼 고개를 가로저었다. 싸우지 않겠다는 말이야 이미 지겹도록 들었기에 별로 믿음이 가진 않았지만, 그래도 대답이라도 잘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한 센터장이 퇴소 신청서를 집어 들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 줄게 아마 내일 정도면 수리될 거야. 아니지, 어차피 이사하려면 시간 좀 걸릴 거 아냐? 좀 여유 있게 잡아줄까?”
“아뇨. 최대한 빠르게 잡아 주세요.”
“벌써 계약했어? 퇴원한 지 얼마나 됐다고. 병원에서부터 집 미리 알아 둔 거야?”
“아뇨, 같이 살기로 했거든요.”
“아아, 진하랑? 그럼 진하 게이트 클리어하고 바로 들어갈 수 있게 처리해 달라고 해야겠네.”
센터장은 동거 상대가 당연히 진하일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센터장이 들고 있던 퇴소 신청서를 놓치고 입을 쩍 벌리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말이었다.
“아뇨. 당분간 유원이랑 같이 살기로 했거든요.”
“……뭐?”
센터장이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귀에 문제가 생겼음을 확신했다. 그러나 리온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유원이랑 동거하기로 했다고요.”
거짓말 같은 소식이 센터 전체에 퍼지기까지는 채 1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