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런 리온과 달리 유원의 머릿속은 그다지 평화롭지 못했다. 이제 막 회복이 끝나 가는 단계에서 S급 게이트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도 그랬지만, 그건 일이니까 자신이 이해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S급 게이트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리온이 다쳐 나온 그 상황이 떠올랐다. 같은 상황이 되면 리온은 또 망설임 없이 그 선택을 반복하겠지.
잔소리해 봤자, 아무리 걱정해 봤자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복잡했다.
‘차라리 매칭률이 높지 않았더라면, 아니 내가 가이드가 아니어서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살았더라면 더 나았을 텐데. 하다못해 에스퍼여서 전투에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게이트에서 난 아무런 능력이 없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지만, 게이트 안에 들어가서까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유원에게 지금 이 순간은 한정된 평화였다.
조만간 깨져 버릴 것이 분명한, 그래서 지금 깨 버리고 싶지 않은 평화.
리온 없이 들어간 게이트는 힘들었지만, 마음 하나만큼은 편한 게이트였다. 일만 함께하지 않아도 이렇게 마음이 편한데, 애석하게도 그 일로 맺어진 관계라 다시 이런 행운이 없을 거라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감히 그만두라고 할 수도 없는 일. 차라리 이번 S급 게이트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이 시한부의 평화를 지키고 싶었다.
“이번엔 적어도 다치지는 않고 나왔으면 좋겠는데.”
유원이 그렇게 중얼거리곤 다음 가이딩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게이트가 빨리 처리되었으면 좋겠으면서도, 영영 게이트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모순적인 마음이 들었다.
* * *
“힘들죠?”
“네. 아니요, 그게…….”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힘든 걸 힘들다고 하지, 뭐 어떻게 해.”
“그, 그래도…… 다들 힘드신데 저만 생색내는 것 같아서.”
다음 날, 이번 게이트에 배정된 에스퍼와 가이드들이 한자리에 모여 센터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센터 업무에, 언론 발표, 훈련 진행까지 맡고 있는 센터장이 얼마나 힘들지 알기에 에스퍼들은 차마 힘들다는 소리도 하지 못한 채 지옥 같은 훈련을 버텨 내는 중이었다.
그중 가장 신입인 정현이 제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나마 조금 짬 낼 줄 아는 다른 에스퍼들은 훈련에 임하면서 요령껏 체력을 비축하고 있었지만, 정현은 그러지도 못하고 선배들 앞에서 힘들다는 말을 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묵묵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지쳐 가고 있었다.
하지만 힘들다는 소리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리온이 그렇게 생각하며 심각한 얼굴을 한 정현에게 말을 걸었다.
민현과 동갑에다가 능력까지 같은 정현은 성격마저도 민현의 신입 시절과 비슷했다. 싫은 얼굴을 하고도 애써 어색하게 웃는 모습까지 말이다.
최근 들어온 신입들이 하나같이 신입 같지가 않았기 때문에 그런가, 왠지 더 신경이 쓰이는 기분이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게이트는 처음이고. 답답한 게 당연한 거죠. 훈련하다 도망가는 것만 아니면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 그럼 선배님도 힘드신가요?”
“저요?”
힘든 것을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리온이었다. 센터에 그런 리온의 성격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꽤 신선하게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저도…… 힘들죠. 하하, 우리도 다 사람인데 센터 들어온 지 오래됐다고 안 힘든 게 어디 있겠어요.”
리온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신입을 북돋워 주려고 꺼낸 말인데 여기서 ‘전 별로…….’ 같은 대답을 해 버리면 오히려 더 눈치나 보게 하는 꼴이 될 것이었다.
“아마 센터장님이 제일 힘드실 거예요. 직책 때문에 티는 못 내시겠지만……. 근데 정현 씨는 아직 신입이잖아요. 신입일 땐 뭐든 힘든 게 당연한 거니까 그런 거 가지고 눈치 보지 마세요. 정현 씨가 훈련 불성실하게 받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걸로 이상하게 볼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가, 감사합니다.”
정현은 조금 감동받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후배들이 들어올 때마다 최대한 잘 챙겨 주려고 하는 리온이지만, 이번 신입은 어지간히도 힘든 상황에 있었기에 더 마음이 갔다.
“게이트 들어가서 힘든 거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요.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아, 그래도 유원이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유원이?”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정현 씨, 유원 씨 하던 사이 아니었나. 하루 만에 바뀐 호칭에 리온이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 정현을 바라보았다.
“둘이 친해요?”
“아, 게이트 후처리 팀 신설 준비한다고 교육 센터에 있을 때부터 민현이랑 유원이랑 셋이서 종종 봤었는데 이번에 같은 게이트 들어가게 되면서 좀 더 얘기를 많이 하게 됐어요. 나이는 저보다 어리지만, 선배 같은 면도 있고. 아, 선배니까 당연한 건가?”
정현이 조금 전보다 살짝 긴장이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동료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건 좋은 일이지만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자신과는 들어왔을 때부터 전쟁이었던 데다가, 다른 에스퍼들과 교류하며 지내게 된 것도 지난 S급 게이트가 끝나고 난 뒤부터였다. 그런데 정현과는 들어오자마자 말을 편하게 하면서 지낸다니.
“두 분은 매칭 관계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아, 네. 맞아요.”
“와, 정말 좋으실 것 같아요.”
정현이 진심으로 부럽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리온이 복잡 미묘한 기분을 얼굴에 티 내지 않으려 애를 쓰며 말했다.
“매칭 가이드가 있어서요? 확실히 가이딩 질도 좋고, 거의 전담처럼 붙여 주니까 게이트에서 안심이 되기도…….”
“아뇨. 그것도 부럽지만, 유원이가 매칭 가이드인 게 부러워서요.”
정현이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말했다. 리온을 선망의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모습이 악의 한 점 없이 순수해 보였다.
“되게 친절하잖아요. 좀 무뚝뚝한가 싶으면서도 소소한 것도 안 잊어버리고 잘 챙겨 주고, S급 가이드니까 능력도 좋고.”
“그런가요?”
내가 아는 이유원이랑 다른 이유원을 알고 있기라도 한 건가. 리온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정현의 이야기를 들었다. 리온과 유원이 하루가 멀다고 센터를 떠들썩하게 만들 만큼 싸워 대던 것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하는 정현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처음 만났던 날에 같이 카페 갔었는데 그때 시킨 메뉴 기억하고 만날 일 있을 때마다 사 오더라고요. 그것도 그렇고 그냥 이야기하다 보면 얘기한 거 하나하나 허투루 듣지 않았다는 게 티가 나요.”
사소한 친절이었지만, 자신은 받아 본 적이 없는 것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유원이 자신에게만 시비 걸지, 다른 사람에게는 예의 바르고 꼼꼼한 신입이라고 평가받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나름 유대감이 생긴 자신보다 이제 막 센터에 들어온 신입에게 더 친절하다는 것이 그리 기분 좋지는 않았다.
“저도 매칭 가이드가 생기면, 그 사람이 유원이처럼 좋은 사람이면 좋겠는데…… 매칭 가이드라고 할 만큼 매칭률이 좋은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그렇게 높지는 않다더라고요.”
“그렇죠. 적어도 70퍼센트는 넘어야 매칭 가이드라고 하니까…… 등급 차이 제한도 있어서 까다로운 편이고요.”
“급하게 투입된다고 아직 매칭률 측정을 다 끝내지는 못했지만, 70퍼센트는커녕 50퍼센트 넘는 경우도 생각보다 적더라고요.”
그 뒤로도 정현과 꽤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없었다. 어딘가 얹힌 것처럼 불편한 기분을 느끼면서 이어 가던 이야기는 센터장이 도착해 훈련이 시작되고 나서야 끝이 났다.
하지만 그 대화로 시작된 찜찜함까지 끝나 버린 것은 아니었다.
* * *
“이런 걸 뭐 하러 신경 쓰는 거야. 사춘기 어린애도 아니고.”
리온이 자신에게 되뇌었다. 유원이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도, 정현이 이 상황에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것도 분명 좋은 일인데 자꾸 시답잖은 서운함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게 잘 챙기면서 정작 제일 친하게 지내야 할 나한테는 왜 아직도…….’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그렇지만’, ‘그래도’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됐다. 애꿎은 정현에게 꼭 내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야 했나 하는 화살이 향하는 순간도 있었다.
누구에게 이야기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것도 마땅치 않았다. 친한 사람은 많았지만 이런 부끄러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도통 떠오르지가 않았으니 말이다.
들으면 충격을 받고 어디 아픈 게 아니냐며 걱정부터 할 사람이나, 깔깔거리며 비웃을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인생을 아주 헛살았지.”
직접 보지 않아도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모습에 리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센터 생활을 엉망으로 해 왔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왠지 짙은 회의감이 들었다.
“하아…….”
“땅 꺼지겠다. 땅 꺼지겠어.”
“아, 깜짝이야.”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놀란 리온이 뒤를 돌아보자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모를 진하가 리온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