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 적응 기간 시작이네. 잘 부탁해. 그냥 유원이라고 부르면 되지?”
“네. 편한 대로 부르세요.”
페어 등록 신청서를 제출하고 난 후, 두 사람은 센터장이 준 카드를 가지고 식당으로 향했다.
‘저도 돈은 있을 만큼 있는데요.’
‘야, 나도 돈 많아. 그래도 이런 날은 남의 돈으로 식사 한 번쯤은 해 줘야지. 센터장님 카드 쓰는 게 흔한 일이 아니거든.’
센터장의 카드를 받아 들고 싱글벙글하던 리온과 달리, 유원은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를 것 없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좋으나 싫으나 페어 등록을 하고 나면 내내 붙어 다녀야 할 텐데, 이렇게 무뚝뚝해서야 친해지기 어렵겠는걸.
리온이 그렇게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학교 졸업한 지 얼마 안 됐겠네?”
“네. 졸업하고 바로 검사 받았어요. 생일이 빠른 편이라서요.”
“대학 가기 싫었어? 보통 바로 이쪽으로 오는 애들은 잘 없어서.”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말이 조금 길어진 것 같기도 하고. 차차 나아지겠지. 리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대학 붙긴 했는데, 결과가 이렇게 나와서 입학 취소했어요.”
“왜? 결과 나온다고 바로 입소해야 하는 거 아니잖아.”
에스퍼와 가이드가 나타나고 난 직후만 해도 개인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았다. 나이에 대한 제한 같은 건 그저 희망 사항이었을 만큼.
그러나 일부 정신 나간 부모들이 에스퍼, 혹은 가이드로 각성한 자신의 자식을 팔아 돈을 벌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게이트 안으로 밀어 넣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이런저런 규정이 생기게 되었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한국에선 만 19세 미만의 청소년은 에스퍼로든 가이드로든 일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능력 검사 역시 나이가 되지 않으면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특이종이 아닌 개인으로서, 인간으로서의 삶 역시 배려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면서 입소를 강제하는 규정들 역시 하나둘 사라져 갔다.
각성 결과가 뜨더라도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센터에 들어올 수도 있었고, 비상책으로서의 훈련만 받으며 일반인의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다.
“어디 붙었었는데? 과는?”
“H대학교 법학과요.”
“……푸흡! 뭐?”
당황해서 마시던 물을 흘릴 뻔한 리온이 입가를 닦았다. H대 법학과라면 대학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리온조차 알 정도로 명문인 곳이었다.
“……어, 혹시 법학 쪽에 관심이 없었던 거야? 적성에 안 맞는데 부모님 결정이었다거나…….”
“아뇨.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법학과가 1지망이었어요.”
그럼 대체 왜 만 19세가 되자마자 능력 검사를 받고, 대학 진학마저 포기하고 센터에 들어온 건데?
리온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물었다.
“그럼 왜? 거기, 들어가기 힘든 곳 아냐?”
“그땐 제가 가이드인 줄 몰랐으니까요.”
유원이 담백하게 대답했다.
유원은 애초에 돈이나 권력욕 때문에 법학과 진학을 희망했던 것이 아니었다.
가장 원하는 길을 갈 수 없다면 그거라도 하고 싶었기에 적어 냈던 1지망이었을 뿐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해야죠.”
“그럼, 정말 가이드가 되고 싶어서 바로 검사 받고 이쪽으로 온 거라고?”
“네.”
유원의 대답에 리온의 눈동자가 감동으로 일렁였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능력을 최대한 빨리 활용하기 위해서 이 길로 뛰어든 거구나. 무뚝뚝하긴 하지만, 좋은 놈인가 봐.
리온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동안은 완전 체험 기간이나 마찬가지야. 일 시작하면 진짜 힘들고, 그만두고 싶어질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요. 힘든 일이라는 거 모르고 뛰어든 것도 아니고, 힘들어도 그만큼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으니까요.”
“그, 그렇긴 하지. 피곤하긴 하지만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니까 보람차기도 하고 멋진 일인데 다들 이해를 못 해 주더라고.”
다들 죽지 못해 산다며 툴툴거렸지만, 리온은 이 일이 좋았다.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는 게, 자신에게 그만한 힘이 있다는 게 뿌듯했다.
드디어 내 생각을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구나. 이거, 생각보다 얘랑 잘 맞을 수도 있겠는데?
리온이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니까 다행이네. 우리, 되게 잘 맞을 것 같은데? 그렇지?”
“……그런가요.”
유원은 여전히 무뚝뚝한 말투로 대답했지만, 이제 그의 태도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리온이 싱글벙글 웃음을 띤 채로 말했다.
“스무 살이니까, 술 마셔도 괜찮지? 내가 한잔 살게. 뭐, 내가 아니라 센터장님이 사는 거지만.”
리온이 손가락 사이에 센터장의 카드를 낀 채로 손을 흔들었다.
“비―싼 걸로.”
“……형도 같이 드세요?”
“아니. 난 가이딩 문제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 술 마셔 본 적 없어.”
그렇다 보니 주량도 주사도 모르는 처지였다. 혹시라도 자신이 술이 약하기라도 하면, 그래서 다음 날을 숙취라는 최악의 컨디션으로 맞이하게 된다면, 제 능력을 적시에 쓸 수 없을 터였다.
혹시 모를 숙취 때문에 게이트로 인한 재해를 막지 못하는 것. 리온은 그런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만성 가이딩 부족이라 그렇지 않아도 몸 아껴야 하는데, 술은 사치였다.
“가이딩 문제면, 이제 상관없지 않아요?”
“……어?”
유원의 말에 고개를 내젓던 리온이 그대로 멈췄다.
‘그러고 보니 얘, 나랑 매칭률이 99퍼센트나 되는 S급 가이드였지?’
잠깐 잊고 있었다.
애초에 가이드가 나타났으니 가이딩부터 받아야 했는데, 저와 99퍼센트의 매칭률을 자랑하는 가이드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놀라,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잊고 있었다.
“그러네. 너, 내 매칭 가이드였지.”
리온이 멋쩍게 웃었다. 뭐 이런 중요한 걸 잊고 있었지? 자신도 그렇고 센터의 사람들도 다들 놀라긴 했나 보다.
“손이라도 잡을까?”
리온이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한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기초 교육은 끝냈으니까, 소개해 준 거겠지. 가이딩을 하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을 터였다.
“…….”
유원이 가만히 리온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뭐야, 왜 보고만 있어? 내민 손이 슬슬 부끄러워질 때쯤, 유원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
크고 따듯한 손이 리온의 손을 덮다시피 감쌌다. 쌀쌀맞은 태도와 다르게 손이 참 따듯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여태껏 느껴 본 것과 차원이 다른 기운이 손을 타고 들어왔다.
지금껏 받은 가이딩이 물을 졸졸 흘려 보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건 혈관을 타고 폭포수가 흐르는 것 같은 청량함이었다.
늘 안개가 낀 것처럼 답답하던 머리가 순식간에 맑아지고, 잠을 자도 자도 사라지지 않던 피곤함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췄다.
그간 가이딩을 응급 처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건 완전히 달랐다. 센터 내의 다른 에스퍼들이 왜 그렇게 가이드들에게 의존하는지, 매칭 가이드가 있는 에스퍼들이 왜 그렇게나 자신의 페어를 끼고 도는지 이제 새삼 알게 되었다.
“……언제까지 잡고 계실 거예요?”
“……어? 아.”
손을 얼마나 오랫동안 잡고 있었던 건지, 어느새 맞잡은 손 사이로 땀이 잔뜩 맺혀 있었다.
처음 느껴 보는 강렬한 가이딩에 넋을 놓고 있었던 리온이 뒤늦게 손을 빼냈다.
“와……. 나, 이렇게 제대로 된 가이딩 처음 받아 봐.”
“처음이요?”
“들었겠지만…… 나, 이상할 정도로 매칭률 좋은 가이드가 없어서. 매칭률 제일 높은 가이드랑도 겨우 34퍼센트였거든. 그래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머리가 말끔해지자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리온이 전에 없이 생긋 웃으며 유원을 바라보았다.
“진짜, 이래서 다들 가이드 찾는 거구나.”
여태 잘 맞지도 않는 상성을 감수해 가며 꾸역꾸역 가이딩을 해 준 강우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이제야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제가 형한테 처음인 거예요?”
“응. 처음이야. 너무 좋다.”
유원의 물음에 리온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유원이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제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말했다.
“다행이네요. 도움이 되어서.”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나 봐. 아무튼, 진짜 잘 부탁해. 저기요.”
리온이 지나가던 종업원을 불러세웠다.
“여기서 제―일 비싼 술로 두 잔만 부탁드려요.”
“제일 비싼 술이라면…….”
“가격은 상관없으니까, 부탁드릴게요.”
가격 들으면 괜히 결제하기 미안해질 수도 있으니까. 리온이 킥킥거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내일도 일해야 하니까 과음하기는 그렇지만, 처음으로 한 잔만 마셔 볼까 봐. 너도 괜찮지?”
“네. 전 괜찮아요.”
좀 무뚝뚝하긴 하지만 얘기하다 보니 좀 귀여운 구석도 있는 것 같고. 성격 좀 나빠도 매일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다.
잠시 후, 리온이 직원에게 건네받은 술잔을 위로 올려 들며 말했다.
“기념으로 짠 할까?”
“좋죠.”
“앞으로의 페어 생활을 위하여!”
짠―! 유리잔이 부딪치는 청아한 소리가 테이블 위에 울려 퍼졌다.
“잘 부탁할게, 유원아.”
“……저도 잘 부탁드려요.”
그 뒤로도 두 사람은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이어 갔다.
이후 식사를 마치고, 내일을 기약하면서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리온은 몰랐다. 이유원은 낯을 가리고 무뚝뚝한 것이 아니라, 그냥 싸가지가 없는 새끼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