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규칙을 정하는 일은 꽤 싱겁게 끝났다. 하나부터 열 끝까지 맞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꽤 잘 맞는 면이 있어서였다.
화가 나더라도 집에 꼭 들어오기, 집에 다른 사람 데려오지 않기, 그리고 동거하는 동안은 서로에게 충실할 것.
노력이 필요한 것은 이 정도가 끝이었다.
활동 시간이야 어차피 같은 직장에 다니는 데다가 게이트에 들어가는 일정을 제외하고는 업무 시간도 같아 조정할 필요가 없었다.
둘 다 집안일은 꼼꼼히 하는 편이었고, 깔끔한 성격이라 상의를 하는 동안 서로 안 맞는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없었다. 리온이 마지막 수칙까지 적고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럼 집안일 분배는 이렇게 하고, 내일 짐 챙겨서 완전히 들어오는 걸로? 짐 그리 많은 것도 아니고 몇 개는 천천히 옮겨도 되니까, 혼자서도 옮길 수 있을 것 같아.”
“네, 좋아요. 바꾸고 싶은 게 있을 때는 서로 상의해서 정하는 걸로.”
유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넋이 나간 얼굴로도 일을 빠르게 처리해 준 센터장 덕에 당장 내일부터 유원의 집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 리온이었다.
“월차라는 걸 휴식 목적으로 써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월차 쓰고 병원 안 가는 거 처음이었던가? 원래 월차 쓰는 날은 무조건 병원행이었거든.”
“병원이요?”
“너 오기 전에는 어쩔 수 없었지. 가이딩이 항상 부족하니까 체력에 영향이 가서 임무 수행 중에 쓰러지지 않으려면 열심히 다녔어야 했거든.”
“…….”
“그래서 나한테 너는, 어? 생각보다 꽤 소중한 사람이다, 이거야. 알아?”
리온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매번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긴 하지만 리온에게 유원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렇죠, 하지만 이제 저 없어도 되잖아요. 진하 씨도 있고.”
기뻐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더 싸늘한 반응이었다. 리온이 그런 유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래, 얘는 동생이고, 후배다. 내가 져 줘야지.
반년 가까운 시간을 싸우고, 또 싸워서 얻어 낸 침착함이었다.
“그래도 네가 처음이었으니까, 자부심을 좀 가지라고. 아, 그러고 보니 걔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얘기 들었으려나?”
날짜를 확인한 리온이 진하의 반응을 상상해 보았다. 이야기를 들으면 분명 진하도 깜짝 놀라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며 당황스러워할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본 리온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 잠깐만.”
내일의 일정을 맞춰 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 리온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리온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 좀 받고 올게. 어, 여보세요.”
—야, 너 미쳤어?
핸드폰을 타고 넘어온 쩌렁쩌렁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유원도 아는 사람이었다. 리온이 통화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고, 유원은 방 안의 가구를 조금씩 조정하며 리온을 기다렸다.
유원은 진하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온에 곁에 붙어 있는 것도 싫었고, 다 아는 것처럼 여유롭게 행동하는 것도 싫었다.
자신의 행동이 리온에게 환심을 사기에는 지나치게 날카롭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사근사근한 후배보다는 고깝더라도 믿을 수 있는 동료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자신이었지만 그래도 싫었다.
‘차라리 강우 선배가 나았어.’
강우가 리온의 가장 친한 동료였을 때가 차라리 나았다. 적어도 강우는 유원을 이렇게 짜증 나게 하지도 않았고 아는 척, 이해하는 척하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게 만들지도 않았다.
리온이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것도, 같이 살자는 제안을 한 것도 그의 입장에서 큰 결심을 한 것이라는 걸 알기에 기뻤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그의 제안을 승낙하긴 했지만 사실 걱정이 되기는 했다. 리온과 자신이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매번 화를 내며 ‘다시는 너랑 잘 지내 볼 거라는 멍청한 생각 같은 거 안 해!’라는 리온의 말을 끝으로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은 끝나 버리곤 했다.
‘그래도 이번엔 이런 것까지 썼으니까 좀 다르려나.’
유원이 함께 쓴 생활 수칙을 바라보았다. 유원이라고 리온과 잘 지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리온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이제는 별 의미 없는 것 같지만.’
자신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라도 아주 조금만 몸을 사려 줬으면 하는 바람은 너무 큰 바람이었던 것 같았다.
리온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반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어 버린 사실이었다.
리온은 예상도 못 하고 있겠지만, 아마 매칭률이 떨어진 것도 그것과 관련된 이유일 것이다. 유원은 여전히 리온이 좋고, 그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지만 조금 지쳤다.
이게 의미가 있는 일인가 싶어 자괴감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유원도 이번 3개월이 자신과 리온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시간이자, 기회가 될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이제 이러는 것도 다 그만둘까. 차라리 입 다물고 순한 후배처럼 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
유치해지고 싶지 않은데, 아무리 어른스럽게 굴고 싶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나이를 좀 더 먹으면 달라질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아직은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당장 예상할 수 없는 미래의 일보다는 지금 전화를 하기 위해 나간 리온이 최대한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앞서 있었다.
* * *
“넌 어떻게 그런 얘기를 예고 한마디 없이 듣게 하냐. 게이트 나오자마자 기절할 뻔했잖아.”
“아, 어제 전화로 그만큼 잔소리했으면 됐지. 나도 반쯤 충동적으로 그런 거였……. 아니,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결론 내린 거였다고.”
“그놈의 급발진, 아무튼 진짜 놀랐다니까. 그럼 오늘부터 유원 씨랑 같이 사는 거야?”
“어. 어차피 챙길 짐도 별로 없고, 퇴근하고 옷만 좀 챙겨서 나가면 돼.”
리온이 진하의 잔소리에 귀를 막으며 싫은 표정을 지었다. 하루 온종일 이 주제로 시달리느라 아주 진저리가 절로 쳐질 지경이었다.
“기숙사 체류 최장기간 기록을 좀 더 끌어 보고 싶었는데 그건 좀 아쉽네.”
“별걸 다 아쉬워한다. 그럼 3개월 끝나고 나면 어쩔 건데?”
“나도 근처에 집 얻어 보든가 해야지. 돈이 없어서 안 나왔던 건 아니었으니까. 근데 큰돈 쓸 생각하니까 좀 싫긴 하다.”
“너 돈 많잖아, 아냐? 에스퍼 월급도 있고, 게이트도 많이 들어가니까 돈 아까워하지 않을 정도는 있을 텐데.”
“숫자로만 따지면 그렇긴 한데 돈도 써 봤어야 익숙하지. 돈 쓰는 데는 영 취미가 없어서.”
리온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신입 시절에는 돈을 모으자마자 써 버리기도 좀 그렇고, 기숙사에서 사는 게 불편하지 않아 그냥 살았지만, 어느 정도 연차가 차고 나서부터는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아예 들지 않았다.
“다들 시설이 아무리 좋아도 기숙사는 불편하다는데 난 괜찮았거든. 필요 없는 데 돈 쓸 필요도 없고, 출퇴근 시간도 단축 가능하고, 센터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서 긴급 신청 들어오면 바로 달려갈 수 있고.”
“그런 이유로 기숙사에 사는 걸 좋아한 건 정말이지…… 너밖에 없을 거야. 진짜.”
“아무튼 난 그랬다고. 그렇지만 뭐…… 영원히 기숙사에 살 수도 없으니까 이번 기회에 나도 나가야지. 3개월 지나면 나도 너희 사는 오피스텔로 들어갈까? 아, 근데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던데.”
“A동에는 큰 평수가 더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것보다 작은 평수도 있을걸.”
“그래? 그럼 미리 좀 알아봐야겠다.”
리온이 다행이라고 하며 핸드폰을 켰다. 유원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은 센터와 가장 가까운 오피스텔이었다. 시설도 괜찮고, 전세든, 월세든 비싸다고는 하지만 에스퍼 생활을 하면서 사치한 적이 없는 리온에게 부담이 될 만한 금액은 아니었다.
“근데 진짜 괜찮겠어? 싸우고 다 때려 부숴 버리고 싶으면 애먼 집에다가 화풀이하지 말고 그냥 바로 우리 집으로 와.”
“날 뭘로 보는 거야. 그리고 그럴 거면 동거씩이나 하는 의미가 없잖아. 화난다고 집 나가는 일 없이 꼭 집에 붙어 있기로 약속했다고.”
리온이 진하를 흘겨보며 말했다. 못 미덥다는 얼굴로 리온을 보던 진하가 말했다.
“뭐…… 그래. 그럴 수 있다면 그러는 게 좋겠지. 근데 집들이는 안 해? 동거 기념 파티 같은 거. 나도 유원 씨 집에 좀 놀러 가 보고 싶은데.”
“아, 집들이…….”
진하가 은근히 기대하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유원과 세운 수칙이 있기에 안 될 말이었다. 리온이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못 해, 우리 생활 수칙 정하면서 동의 없이 다른 사람 데려오지 않기로 했거든. 걔는 다른 사람 들이는 거 싫나 봐.”
“그래? 아쉽네.”
“바로 옆 건물이니까 자주 만나서 놀면 좋을 것 같았는데. 하긴 싫을 수도 있기는 하겠네. 어쩌다 한 번 누구 초대하는 건 괜찮지 않냐고 물으려다가 싫다길래.”
“아…… 하. 그렇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군. 진하가 어떻게 된 것인지를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이유원은 참 속이 투명한 사람이었다.
‘그걸 눈치 못 채는 얘도 참 웃기고. 다들 게이트 생각만 하느라고 눈치가 많이 퇴화됐나 봐.’
진하가 리온을 슬쩍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눈치라고는 게이트에 놔두고 온 것 같은 리온은 그저 핸드폰을 붙잡고 3개월 뒤 이사할 집을 찾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