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장난치지 마세요.”
수건으로 상체를 최대한 가린 채 화장실에서 나온 유원이 리온을 가볍게 밀쳐 내곤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일어난 일에 졸지에 밀려난 리온이 멍하니 닫혀 버린 방문을 바라보았다.
“아니, 몸도 좋으면서 왜 저렇게 부끄러워하고 그러냐. 다 벗은 것도 아니고 윗옷만 안 입은 건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리온도 굉장히 민망해진 상태였다. 똑같은 남자의 벗은 몸일 뿐인데, 제 주변에 몸이 좋은 사람이 유원 한 사람뿐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기분이 묘했다.
‘전에 만져 봤을 때도 느꼈지만…… 옷 입고 있는 것만 봐서는 그렇게 우락부락하지 않은데, 저렇게 보니까 근육이 무슨…….’
밀려난 것이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강렬한 몸이었다.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간 그 몸을 떠올리던 리온은 방문이 다시 열리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깜짝이야.”
“왜 앞에서 이러고 있어요. 먼저 먹고 계시지.”
“어? 아, 난 그렇게 배고프진 않아서…….”
리온이 화내는 것도 잊고 어색하게 웃었다. 식탁에 앉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리온이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게이트는 어땠어?”
“일 자체는 평소랑 크게 다를 것 없었어요. 현서 선배가 마지막에 크게 다치시는 바람에 정신이 없긴 했지만요.”
“아, 현서 선배. 선배는 어떻게 된 거야?”
“저희는 전투 상황을 본 게 아니니까 자세히는 몰라요. 수술은 끝났는데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들었어요.”
“넌 다친 곳 없고?”
다들 자잘하게 다쳤다던데. 얼핏 본 몸에는 다친 곳이 보이지 않았지만, 완전히 확인하기 전까지 안심할 수는 없었다.
“전 괜찮아요. 가이드들은 다친 곳 없어요. 에스퍼분들은 자잘하게 부상이 있어서 하루 입원하고 퇴원하시기로 했고요.”
다행이다. 리온이 그제야 안심하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주일 만에 보는 얼굴은 조금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평소와 다를 것 없어 보였다.
“……나 없어서 불편한 점은 없었고?”
잘된 일인데 왠지 조금 서운했다. 유원이 애도 아니고 자신이 없다고 벌벌 떨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조금 정도는 어색하고 걱정되지 않았을까.
“오히려 좋던데요.”
“…….”
망설임 없는 대답에 리온이 입을 꾹 다물었다. 더 좋을 건 또 뭔데. 기대도 하지 않았다지만 역시 기분 좋지는 않은 대답이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리온의 꾹 다물린 입을 바라보던 유원이 어색하게 운을 띄웠다. 머뭇거리던 유원이 말을 이었다.
“형 아직 완전히 다 나은 것도 아니니까 같이 갔으면 신경 쓰였을 것 같아서요.”
처음이었다. 유원이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해명한 것도, 리온의 반응에 신경을 써 준 것도.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당황한 리온이 제 귀를 의심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이상하게 해석하지 마시라고요.”
머쓱하게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이 조금 부끄러워 보이기도 했다.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서 더 현실적인 반응이었다.
“나, 나 이제 다 나았는데 뭘.”
공기마저 어색하게 돌아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리온이 유원의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숙였다. 오히려 밀쳐졌을 때가 지금보다 더 아무렇지 않았던 것 같았다.
“걱정할 사람이 따로 있지 날 걱정하고 그러냐. 내가 괜히 센터 간판 에스퍼인 것도 아니고. 네가 아무리 몸이 좋고 어? 그래도 너는 가이드고 나는 에스퍼인데.”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스스로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횡설수설하던 리온이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손을 움직였다.
“안 다쳤으면 됐어.”
“저 게이트 들어가 있는 동안, 걱정했어요?”
그렇게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는 리온에게 유원이 말을 걸었다. 유원답지 않은 질문이었다.
꼭 그랬다는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말. 평소답지 않은 일만 이어지는 순간에 이상함을 감지한 심장이 크게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걱정…… 했지. 당연한 거 아냐? 너 내 매칭 가이드잖아. 너 없으면 나 큰일 난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려 했지만 유원의 귀에 어떻게 들렸을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리온이 유원을 힐긋 바라보곤 말했다.
‘그래, 당연히 그러니까 걱정한 거지. 그거 말곤 내가 얘를 그렇게나 걱정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당연히…….’
하지만 소리 내어 말할수록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유원은 센터에 들어올 때부터 리온의 매칭 가이드였지만 그때는 리온에게 유원이 이렇게 특별하지 않았다.
떼 내고 싶어도 떼 내지 못하는 존재. 저혈압 치료제.
그 정도의 존재였는데 지금은 달랐다.
함께 있는 것이 익숙해졌고,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범위 밖으로 사라져 버리면 걱정이 됐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 쓰이게 됐고, 눈에 보이지 않을 때도 자꾸만 생각하게 됐다.
“뭐 당연한 걸 물어보고 그래.”
하지만 그런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지금과 다른 관계가 되기 위해 뭔가를 할 만한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리온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아, 이거 왜 이렇게 맵냐. 어우, 더 못 먹겠다.”
하지만 어색함에는 영 면역이 없는 리온인지라, 리온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저 먹어. 난 더 못 먹겠다.”
리온이 물을 찾으러 가는 척하면서 부엌 안쪽으로 향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자꾸만 생기는 것이, 올해는 정말 마가 껴도 제대로 끼인 것 같았다.
‘S급 게이트도 그렇고, 이번에 생긴…… 잠깐만. 제일 중요한 걸 말 안 하고 있었잖아?’
물을 들이켜며 마음을 진정하던 리온이 유원이 오면 하려던 말을 기억해 내고 컵을 내려놓았다. 관계도 관계지만, 이게 더 중요한 일인데 어떻게 이걸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이런 이야기 하게 돼서 좀 그렇긴 한데.”
일 생각을 하니 마음이 급속도로 진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식탁으로 돌아온 리온이 차분함을 되찾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 다시 게이트 들어가야 해.”
“……우리요? 하지만 센터장님께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내가 들어가게 됐어. 내일쯤이면 공지도 나갈 거야.”
“게이트가…… 최근에 많이 생기긴 했죠.”
유원이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 역시 일주일 동안 게이트가 세 개나 생겨 버리는 바람에 센터가 어수선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리온이 게이트에 들어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S급 게이트가 또 나타날 거야.”
리온의 말에 유원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리온도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신의 귀를 의심했으니 납득이 가지 않는 반응은 아니었다.
지난번의 게이트야 S급 게이트가 언젠가 터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으니 놀라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대비를 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고비를 넘기자마자 찾아온 두 번째 S급 게이트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지금 당장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는 S급 에스퍼가 나랑 효빈 선배뿐이야. 원래는 현서 선배랑 그대로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선배가 그렇게 다치셨으니까.”
리온이 유원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말했다. 자신은 정말 괜찮았지만, 유원은 자신이 아직 환자인 것처럼 과보호했으니 말이다.
‘평소에도 뭘 그렇게까지 나서냐고 시비였는데 또 한 소리 하려나. 으으, 얘기하다 보면 무조건 싸울 것 같은데.’
또 싸움이 나는 건 아닌가,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말했지만 의외로 돌아온 반응은 담담했다.
“S급 게이트라…… 하긴 얼마마다 발생한다는 주기가 있는 것도 아니죠. 타이밍이 별로 좋지는 않지만요.”
“별생각 안 들어?”
자신의 건강에 대해 과보호하는 사람들을 귀찮아하는 리온이었는데, 정작 그 참견의 기색이 보이질 않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 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여태 그래 왔는데 갑자기 안 하면 이상하잖아.’
“복귀전으로 너무 과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형이 언제까지나 게이트에 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전 형이 에스퍼 일을 하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에요.”
“…….”
“굳이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위험까지 감수하려고 하는 게 싫은 거지.”
유원이 그렇게 말하곤 식탁 위를 정리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같이 들어가니까 서로 뭐 하고 있나 궁금하지는 않겠네요.”
“그런 걱정은 나만 했지. 게이트 안에서 바깥사람 걱정할 일이 뭐가 있냐. 내가 무슨 물가에 내놓은 애도 아니고.”
“형은 게이트 안에 있건 밖에 있건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라 예외예요.”
유원이 그렇게 말하며 살짝 웃었다. S급 게이트가 또 발생한다는 무시무시한 소식을 들은 것치고는 지나치게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럼 나머지 명단까지 내일 발표되는 건가요?”
“어? 아마……. 근데 나도 누가 들어갈지 정확히는 몰라. 지금 당장 게이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도 고려해야 하고.”
“그럼 내일 마저 이야기할까요. 지금은 조금 피곤해서.”
“아, 그렇겠네. 들어가서 쉬어.”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더라니 피곤해서 그런 것이었을까. 하긴 거의 일주일 가까운 시간을 게이트에서 보내고 막 돌아온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이상한 거였나. 그래도…… 되게 묘하네.’
성질을 돋우는 말 뒤에 나온 변명도 피곤함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그런 거라면 앞으로도 조금 피곤하게 살게 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리온이 유원이 들어간 방의 문을 잠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