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야기 좀 할까?”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다. 리온은 지금, 평소보다 분위기가 좋은 오늘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다.
“네.”
조금 긴장한 상태로 건넨 말이었는데, 유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또 싸우려는 거 아니지?”
“우리가 맨날 싸우기만 하는 줄 알아요?”
“맞잖아…….”
리온은 민철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또 시비가 걸릴세라 황급히 유원의 손목을 잡았다.
그런 민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아무런 저항 없이 리온이 이끄는 대로 끌려온 유원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중요하게 할 이야기라도 있는 건가요?”
“음,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
리온이 조금 어색한 얼굴을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충동적으로 데리고 오기는 했지만 정작 운을 띄우려니 조금 망설여졌다.
‘에이, 여기까지 와서 빼는 게 더 이상하지.’
“우리, 페어 등록은 안 했지만 매칭 관계잖아?”
“네. 그렇죠.”
“그것도 무려 99퍼센트라는 말도 안 되는 매칭률을 가진.”
리온이 처음 측정기 위에 떠오른 99라는 숫자를 봤을 때 느꼈던 충격을 다시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이라고 해도 맞는 말이야. 그렇지 않아?”
리온이 그렇게 말하며 유원과 눈을 마주했다. 마치 자신의 말에 동의해 주길 바라는 부담스러운 눈빛에 유원의 눈동자가 슬그머니 왼쪽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유원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은 조금씩 내려와 어느새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유원은 그 손을 뿌리치지도, 마주 잡지도 못한 채 가만히 맞잡은 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여태 많이 싸우기도 했고, 솔직히 나라고 언제나 이해되는 건 아닌데…… 그래도 어제 얘기하면서 서로 너무 날이 서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닌가 싶더라고.”
어쩐지 유원의 표정이 굉장히 불편해 보였지만 리온은 애써 모른 체하며 말을 이어 갔다.“그래서 좀 잘 지내 보고 싶어. 내 얘기야 인터넷에 하도 알려져서 다들 알겠지만, 내 입으로 이렇게 털어놓은 건 드물어. 그래서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기도 하고.”
“아…….”
“왜,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게?”
“네? 아뇨.”
“농담이야, 말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이 얘기 모르는 사람 찾는 게 더 힘들걸?”
드물게 당황한 모습을 보인 유원에 리온이 작게 웃었다. 그러다 지금의 분위기가 좋다는 생각에 리온은 농담 반, 진심 반이 섞인 말을 던졌다.
“매칭률이 99퍼센트나 되는데, 네가 날 조금만 좋아하면 어떤 일이 생길지 궁금해지네.”
“……네?”
조금 이따 돌아온 되물음에 리온은 순간 자신이 실수한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미 던진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
“그렇잖아. 매칭률이 친밀도나 호감도에 영향받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니까. 그렇지 않아도 매칭률이 이렇게 높은데, 네가 날 좀 더 좋아해 주면 진짜 전대미문의 100퍼센트 찍을 수도 있지 않겠냐.”
리온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100퍼센트의 매칭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리온 역시 알고 있었지만, 그럼 어디 99퍼센트는 말이 되는 소리던가.
“아니다. 내가 좀 더 좋아해도 마찬가지인가?”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 가던 중, 리온은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엄지와 검지를 가볍게 튕겼다.
어차피 불편해하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이니 둘 중 한쪽이 상대를 좀 더 좋아하게 되어도 결과는 똑같은 것 아닌가?
“좋아, 나도 앞으로 널 좀 더 좋아해 볼게.”
리온이 결심한 듯 말했다. 겨우 1퍼센트지만 그래도 그 정도의 매칭률이라도 더 올라간다면, 그럼 이 아슬아슬한 관계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고작 1퍼센트이지만, 그 한 방울이 두 사람의 좋지 못한 관계를 환기시켜 줄 생명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너도 좀만 노력해 주라. 이미 알겠지만 나 되게 다혈질이거든. 좀만 건드려도 폭발한다고. 선배가 되어 가지고 그러는 거 내가 생각해도 유치하긴 한데…… 그래도 좀 이해해 줘. 나도 고칠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까.”
“……형을. 더 좋아하는 건 아마 힘들 것 같아요.”
빠직 리온의 이마 위로 핏줄이 솟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큰마음 먹고 기껏 이 오그라드는 말까지 한 건데. 열이 뻗치려는 순간 유원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렇지만, 형이 저를 좋아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잡고 있는 유원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인가, 잠시 손을 바라본 리온이 고개를 들어 도로 유원의 얼굴을 보았다.
손이 떨린 것은 착각이라고 말해 주는 것처럼 말끔한 얼굴이었다. 뜨거운 햇빛 탓에 볼 쪽이 살짝 달아오른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미약한 붉음일 뿐이었다.
“노력, 할게요.”
앞의 말과 대조되는 말. 이 말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잠시 고민하던 리온이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한 건지 유원의 손을 흔들었다.
“그래, 앞으로도 잘 부탁해. 싸우지 말고 잘 지내자고.”
“……네.”
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리온이 조금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을 덧붙였다.
“아까 보니까 예주 누나하고도 잘 지내는 것 같던데, 다른 사람들하고 잘 지내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나랑 제일 친하게 좀 지내 주라.”
“…….”
“질투 나니까.”
‘내 매칭 가이드가 자신과는 앙숙인 관계인데 다른 사람들과는 잘만 지낸다면 당연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지. 아까 기분이 이상했던 건 당연한 거였어.’
리온이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유원이 다른 팀원들과 잘 지내면 좋은 일인데, 왜 미묘하게 기분이 나빴는지, 그게 의문이었는데 태환과 희수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명색이 매칭 가이드랑 매칭 에스퍼인데. 서로한테 특별한 존재가 되면 좋잖아.”
매번 싸우면서도 매칭 가이드인 유원에 대한 미련을 아주 버리지 못했던 것과 비슷한 이유.
게다가 어제 제 입으로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기까지 했다 보니 그새 기대감이 커졌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닌 거 알지?”
“네, 알죠.”
“그래. 나름 내 비밀…… 은 아니어도 내 입으로는 잘 말하지 않는 걸 얘기해서 그런가, 이상한 기분이야.”
리온이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낯간지러운 말을 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뒤늦게 밀려오기라도 한 듯, 리온이 손을 놓고 도망치듯 돌아섰다.
“어쨌거나 잘 부탁한다고.”
새벽부터 시작해서 오늘은 참, 예상치 못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날이었다. 리온이 그렇게 생각하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더 늦으면 다들 내가 너 갈구려고 데려갔다고 생각하고 잡으러 오겠다. 빨리 가자.”
그렇게 말하는 리온의 귀 끝이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다시는 유원에게 기대를 걸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뭔가 다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야, 하도 안 와서 찾으러 가야 하나 싶었는데.”
“그럴 것 같아서 왔죠. 별 얘기 안 했어요.”
“야, 유원 씨 잘 봐 봐. 어디 안 보이는 곳에 멍 들어 있을지도 몰라.”
팀원들이 한마디씩 거들며 두 사람을 구경했다. 리온이 손을 휘저어 구경꾼들을 쫓아냈다.
“어허, 저 그렇게 막돼먹은 사람 아니거든요? 그렇죠?”
“네, 그냥 이야기 조금 하고 돌아온 것뿐이에요.”
“하나뿐인 매칭 가이드인데, 잘 지내는 게 뭐가 어때서.”
리온이 그렇게 말하며 유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순간 팀원들의 시선이 동시에 유원에게로 향했다.
‘설마…… 설마 저 손 쳐 내 버리는 건 아니겠지?’
‘아니, 리온 선배. 너무 무리수 아니에요?’
‘모처럼 분위기 좋은 날 왜 이런 시련이…….’
‘오, 싸움 구경.’
침묵과 긴장이 팀원들 사이를 맴돌던 그때,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유원이 입을 열었다.
“네, 하나뿐인 매칭 가이드니까요.”
“거봐, 유원이도 아무 일 없었다잖아. 다들 호들갑 떨지 말고 저녁 준비나 해요. 내일부터는 언제 보스가 출몰해도 이상할 것 없다고 하셨으니까, 오늘이 마지막 휴식이라고 생각하자고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유원 씨, 무슨 일 있으면 숨기지 말고 바로 말씀하세요.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아, 호들갑 떨지 말라니까.”
리온이 손을 휘휘 내저어 유원의 곁으로 몰려든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물론 내가 한 번만 더 쟤한테 기대를 걸면 사람이 아니라고 큰소리치긴 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의심이 너무 과한 거 아니냐고.’
속으로 동료들을 향한 불만으로 구시렁거린 것은 덤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의심과 걱정 가득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과 달리 흥미로운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흐음.”
“진하 오빠, 진짜 리온 선배가 뒤에서 유원 씨를 한 대 쥐어박고 왔다거나, 협박하고 왔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리온이가 아무리 다혈질이라도 누굴 때리고 다니진 않잖아.”
“그렇긴 하지만…….”
진하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얼굴로 리온과 유원을 번갈아 보았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은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