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리온이 살짝 긴장한 얼굴을 하고 태환에게로 다가갔다. 할 말이 있다던 그는 희수와 함께 텐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리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아,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개인적인 이야기라 따로 하자고 한 거니까.”
“네, 무슨 일이세요?”
태환이 긴장하지 말고 앉으라는 듯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그의 옆자리로 가 앉은 리온이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자, 이거 마셔. 남의 가방에서 가져온 거긴 하지만.”
“앗, 이건…….”
태환이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익숙한 포장의 건강음료였다. 어쩐지 누구의 가방에서 훔쳐 온 것인지 알 것 같은 마음에 리온이 조용히 건강음료를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힘들지?”
태환이 리온을 보며 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리온이 대답했다.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버틸 만해요.”
“하하, 그렇지. 편할 수가 없지. 이 망할 S급 게이트라는 게.”
태환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내가 들어갔던 S급 게이트에서도……. 아, 물론 같은 S급이라고 해도 리온이처럼 압도적이라고 할 만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S급 에스퍼로 주목받던 상황이었거든. 근데 정작 들어와서는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하루하루 더 힘들어지기만 하고…… 게다가 페어라고 하나 있는 애는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된 햇병아린데 선배 말을 아주 껌인 줄 알고 씹기 바쁘고.”
“뭘 또 그렇게까지…….”
희수가 옆에서 억울하다는 듯 꿍얼거렸다. 그러나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그때의 본인은 그랬다.
사실 가이드라는 일이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들어오자마자 S급 에스퍼의 매칭 가이드라는 이유만으로 천상 직업을 찾았다느니, 집안의 자랑이 났다느니 하며 쏟아지는 관심에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
물론 그게 제 파트너인 태환에게 시도 때도 없는 시비를 건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안 그래도 힘든데, 남들은 페어라고 하면 아주 끼고 다니면서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처럼 친하게 지내는데 난 왜 그것도 안 되나 싶어서 더 짜증 나기도 했지.”
“그렇겠네요.”
“남 일 같지 않지?”
“아하하.”
그제야 태환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아챈 리온이 긴장을 풀고 웃었다. 유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훈련하면서도 느꼈지만 게이트 안에 들어오고 나서도 별 대화가 없길래, 참 예전의 우리를 보는 것 같더라고.”
태환이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태환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별로 재미없는 얘기이긴 한데, 옛날 얘기 좀 해 줄까?”
태환이 21년 전, S급 게이트 안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희수를 바라보았다.
* * *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건데?”
태환과 희수는 팀의 막내이자, 팀의 큰 전력이 되는 멤버들이었다
당시에는 가이드로서의 자질을 측정하는 과정이 필수가 아니었고, 기계 역시 B급 이상의 가이드밖에 잡아내지 못했었기 때문에 현재보다 가이드의 수가 한참 적었다.
그렇기에 희수는 에스퍼들 못지않게 기력을 써야만 했다. 페어인 태환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까지 신경 쓰려고 하니 평소보다 기력이 더 빠르게 닳았고, 그만큼 더 신경질적으로 변해 갔다.
“여기 너 힘든 거 하나하나 신경 써 줄 수 있을 정도로 한가한 곳 아니야. 찬혁이 팔 저렇게 된 거, 규리 죽을 뻔한 거 보고도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려?”
스무 살, 센터에 들어온 지 한 달이 겨우 넘은 신입이 힘들어하는 것을 달래 주기는커녕 화를 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날카로워진 사람들 속에서 희수가 그나마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은 태환뿐이었다.
경력도, 나이도 다른 팀원들에 비해서는 한참 모자랐고, 몇 년씩이나 함께 일해 온 동료가 다치는 것을 보며 신경이 한껏 날카로워진 팀원들은 희수가 힘들어하는 티를 내기만 해도 신경질을 냈다.
그런 게이트 안에서, 희수의 투정을 받아주는 것은 태환 한 사람뿐이었다.
“야, 괜찮냐? 그러니까 경철 선배 앞에서는 힘든 티 내지 말랬잖아. 그렇지 않아도…….”
“그래서요, 뭐요. 제가 그런 거 하나하나 다 따져 가면서 울어야 해요? 그냥 눈물이 나는 걸 어떻게 하라고요.”
어쩌면 비겁하고 못난 행동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리고 눈치 없는 태환이 자꾸만 희수의 속을 긁기도 했다.
“그래도…… 선배들이 더 힘들 건데…….”
“그럼 선배들은 오빠가 챙겨 주면 되겠네요. 저는 그렇게 못 하겠으니까 못 하는 사람한테 강요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알아서 잘하세요.”
어떻게 보면 팀원 중 가장 만만하고, 자신을 챙겨 주는 사람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었지만, 겨우 스무 살에 국가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무를 짊어진 희수에게 S급 게이트에서 벌어지는 일은 이미 상식에 벗어난 일이었다.
자신을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어 남의 입장을 생각할 여유를 찾지 못했다. 게이트를 어떻게든 해결하고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게이트, 몬스터, 에스퍼, 가이드. 그 모든 단어가 자신과는 상관없는 세계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일상이 송두리째 바뀐 것을 어디에라도 투정 부리고 싶었던 희수였다.
“그땐 미안했다. 네 잘못은 없다는 것도, 네게 그래선 안 됐다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그때는 마음에 여유가 너무 없어서 괜한 데다가 화풀이를 했어.”
“규리나 찬혁이가 그렇게 된 게 네 탓도 아닌데…… 미안하다. 정말.”
그러나 S급 게이트 안에서 자신에게 화를 냈던 선배들이 희수를 찾아와 사과를 할 때쯤에는 희수 역시 제 행동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사과를 할 만한 용기는 나질 않아서, 그리고 여전히 눈치 없이 구는 태환이 조금 짜증 나서 그 뒤로도 태환만 보면 시비를 걸거나 툴툴거리곤 했었다.
“페어 맺을 만큼 매칭률 높은 경우도 드물긴 하지만…… 난 매칭률 좋은데 저렇게 앙숙인 애들은 처음 본다.”
“저도요. 뭐, 그래 봤자 센터 창설 이후로 세 번째 페어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전의 두 팀은 사이가 좋다 못해 아주 껌딱지가 따로 없었는데 그렇죠?”
센터에서 두 사람은 늘 관심의 중심에 있었다. 입사 초반에도 그랬지만, S급 게이트에서 나온 이후에는 더 그랬다.
단순히 두 사람이 센터의 큰 전력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그래서, 하기로 했으면 하면 되지 왜 또 난리냐고!”
“선배는 뇌세포가 단순해서 모르시겠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그거 하나만 처리하면 되는 게 아니라, 미리 이것도 해야 하고, 처리해야 할 서류도 산더미인데 그렇게 쉽게 ‘네, 알겠습니다’ 하면 끝이에요?”
“그럼 나 혼자 하면 되지!”
“페어라고 저한테까지 불똥 튈 게 뻔한데!”
두 사람은 하루가 멀다고 센터 한가운데에서 말다툼을 벌이곤 했다. 보통 무던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 성격인 태환이 뒷일 생각하지 않고 일을 받아오면 희수가 불같이 화를 내는 흐름이었다.
“좀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
“됐어, 애들은 저러면서 크는 거지.”
“어린 건 맞지만…… 그래도 센터 안에서 매일 같이.”
“너 어디 가서 그런 말 하고 다니면 꼰대 영감 소리 듣는다. 그리고 재미있잖아.”
센터의 선배들은 그런 두 사람의 말다툼이 재미있다는 이유로 두 사람을 말리지 않았다. 게다가 매번 싸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일을 못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굳이 타이를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선배들이 보기에는 그저 귀엽고 별일 아닌 것 같던 그 말다툼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조금씩 벌려 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 펑 하고 터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부풀어 오른 짜증은 덤이었다.
“지금도 그런가? 페어면 같은 호실 배정 받거든. 우린 이성이라 기숙사 같은 방은 아니었지만…… 내 사무실을 없애 버리고 얘 처치실에다가 내 짐을 다 옮겨 놓는 바람에 출근할 때마다 스트레스였다고.”
“누구는 아니었는 줄 알아. 하필 센터 오자마자 붙어 다녀야 하는 페어이자, 사수가 단세포 생물이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두 사람이 이야기를 이어 가다 투덜거렸다. 지금에서야 웃으면서 서로를 타박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꽤 스트레스였었다.
“그럼 언제쯤부터…… 사이가 괜찮아지신 거예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사람은 지금도 티격태격하기 일쑤지만, 짜증보다는 서로를 향한 신뢰나 편안함이 느껴지는 것에 가까웠다.
언젠가 유원과 저 정도의 사이만 될 수 있어도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리온이 약간 긴장한 채 물었다.
“아, 그건…… 무조건 따라 하라는 의미로 이해하지 말고 들어.”
태환이 조금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리온 역시 덩달아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선배들이 해 주는 조언이니까 조금 엉뚱하게 들리더라도 귀담아듣고 실천해 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태환의 말을 기다리던 리온은 그의 말을 듣고 당황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잠깐 사귀었었거든. 우리.”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