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잘 다녀와. 들어가기 전에라도 걱정되거나 궁금한 거 있으면 바로 물어보고] 오후 9 : 12
집에 도착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보낼 수 있었던 답장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멋지지도, 도움이 되지도 않는 문자를 겨우 보낸 리온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늘 별거 아닌 일에 신경 쓰게 되는 자신이 싫으면서도 하지만 좀 그럴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싸가지 : 네. 밥 잘 챙겨드세요.] 오후 9 : 15
서하의 말을 들어서 그런가, 아직 바꾸지 않은 저장명이 지지부진한 두 사람의 관계를 알려 주는 것 같아 괜히 기분이 나빠진 리온이 핸드폰 화면을 꺼 버렸다.
저를 걱정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제가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병실을 한 번 들여다보지도 않았다니.
“다른 사람들이 안 볼 때 왔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지, 병문안을 그렇게 조심스럽게 할 필요는 없잖아.”
아니면 그 일을 계기로 내가 너무 생각 없어 보여서 포기했다거나. 그런 거라면 매칭률이 떨어진 것도 이해가 갔다.
“그렇지만…… 그렇다기엔 요즘 괜찮았는데.”
하지만 어느 쪽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하나씩 있었다.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지는 기분에 리온은 생각을 포기하고 핸드폰을 침대 한쪽으로 던져 버렸다.
* * *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리온 선배한테 말 많이 들었어요.”
다음 날, 게이트가 열리기 전에 그 앞에서 대기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공략 팀은 서둘러 게이트 앞으로 모였다.
그때 익숙하게 혼자 대기하고 있던 유원에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 같은 게이트 들어간 적 없으니까 잘 모르시겠네요. 저는 오주섭이라고 하고요, 나이는 스물네 살이에요.”
“신체 강화 계열 A급 에스퍼셨죠.”
“어? 아, 명단에 있으니까 당연히 아시겠구나.”
주섭이 머쓱한 얼굴을 하고 목뒤를 긁적거렸다. 악수를 요청하듯 한 손을 내민 그가 말했다.
“리온 선배 매칭 가이드시죠. 원래 유원 씨가 유명해서 알고 있었던 것도 있지만…… 선배가 잘 좀 부탁한다고 연락 주셨거든요.”
“리온 형이요?”
“네. 어제 연락 와서 잘 좀 봐 달라고 하셨어요. 맨날 네 몸이나 알아서 잘 간수하라고 하지, 남 부탁 잘 안 하는데.”
주섭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주섭은 자신과 유원과 입소 시기가 얼마 차이 나지 않아 동기나 다름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리온 선배 없이 유원 씨만 게이트에 들어가는 거 처음이니까 걱정되셨나 봐요. 잘 좀 챙겨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더라고요.”
“그랬나요.”
유원이 고개를 끄덕이곤 리온을 떠올렸다. 유난히 신경을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부탁까지 해 뒀을 줄이야.
리온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겠다는 욕심은 부리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막기가 어려웠다.
“다쳐서 돌려보내면 절 가만두지 않을 기세던데요. 아닌 척하시더니 리온 선배도 매칭 가이드가 소중한 건 어쩔 수 없나 봐요.”
“그렇겠죠.”
하긴, 매칭 가이드에게 에스퍼가 호감을 가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지. 현실을 돌아보게 된 유원이 다시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 게이트 열리나 봐요. 어쨌거나 부탁받은 것도 있고, 잘 부탁드려요.”
“특별히 신경 써 주지 않으셔도 돼요. 저도 잘 부탁드려요.”
“거기, 빨리 이쪽으로 와.”
이번 게이트에서도 자연스럽게 리더를 맡게 된 현서가 두 사람에게 어서 오라며 손짓했다. 유원과 주섭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 * *
“뭐야, 벌써 들어갔어?”
그리고 그로부터 아주 조금 뒤, 잠에서 깨어난 리온은 유원이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어 보려다 통화가 불가능하다는 기계음을 듣고 이미 공략 팀이 게이트로 들어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기분 복잡하다고 그냥 자 버리는 게 아니었는데.”
A급 게이트로 들어간 팀이 나오기까지는 최소로 잡아도 3일 이상이 걸릴 것이었다. 3일도 굉장히 빠른 거고, 보통 A급 게이트쯤 되면 5일 정도 걸린다고 생각해야 했다.
이렇게 찝찝한 기분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뒤늦게 후회해 봤자 이미 공략 팀은 게이트로 들어가 버린 후였다.
“이런 기분으로…… 보내긴 싫은데. 아, 한서하는 괜한 이야기를 해 가지고.”
사실 서하가 유원을 그리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에 저도 한몫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른 척하고 싶었다.
“괜찮겠지. A급 게이트이긴 하지만 그만큼 구성원을 잘 짜 놓기도 했고…… 주섭이도 이제 생신입 아니니까.”
그리고 그렇게까지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센터에서 자신이 가장 강하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동료들이 그렇게 무능한 것도 아니고, 뭐가 됐든 가이드를 보호하지 못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후배들의 말대로 유원이 자기 몸 하나 못 지키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만큼 연약한 존재도 아니었다. 적어도 여차하면 대피라도 할 수 있을 만한 체력은 있으니.
하지만 자꾸만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게 됐다. 아무리 일반인보다 힘이 세고 체력이 좋아도 장거리형 공격을 구사하는 몬스터라면? 지능이 높은 몬스터가 나타나서 함정이라도 파 놓으면?
드물지만 확실하게 위험한 상황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다른 사람 걱정을 이렇게 해 본 적이 있었던가. 리온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상황이었다.
“매칭 가이드니까…….”
페어 등록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을 했던 것조차 아득히 먼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그냥, 매칭률이 떨어진 걸 확인한 날 이후로 봤던 그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노력하기 시작했고, 확실히 처음보다 훨씬 괜찮은 사이가 되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편해지질 않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왜 자꾸 신경이 쓰이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각을 그만둘 수도 없었다.
매칭 가이드인 유원이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인 건 당연한 거지만, 단순히 그런 것 때문이라기에는 이유원이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져만 갔다.
“수진 누나랑 민호 형도 서로를 이렇게까지 생각하진 않을 것 같은데.”
“뭐가?”
“어? 아냐.”
며칠 뒤 게이트 공략을 위해 떠나는 에스퍼들을 대신해 당직을 서게 된 리온이 혼잣말을 하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당직 선 지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은 걸로 아는데 다들 게이트 때문에 빠져서 또 이렇게 됐네.”
“그렇죠.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너는 게이트 들어가는 게 더 속 편할 건데. 그렇지?”
함께 당직을 서게 된 희주가 킥킥거리며 리온을 놀렸다. 그러자 리온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죠. 뭐.”
“유원 씨는 게이트 들어갔는데 넌 남았네. 그건 좋은 건가?”
“…….”
“맨날 싸우잖아.”
“요즘은 안 싸워요.”
리온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 들어 두 사람의 사이가 꽤 괜찮아졌다지만,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이 얼마 못 갈 평화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좀 괜찮아지나 싶을 때쯤 싸우고 그대로 파국으로 치달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번엔 진짜 잘 지내고 있…… 다구요.”
“그래, 그래.”
리온이 소심하게 반박해 보았으나 희주는 그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리온이 페어 신청을 취소하게 된 계기가 된 그 게이트. 그곳에 함께 들어갔었던 그녀의 기억 속에는 두 사람의 삐걱거리는 모습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같이 산다고 했을 땐 많이 걱정했는데 생각한 만큼은 아니라서 다행이야. 둘이 진짜 안 맞아서 놀랐었다고.”
“같은 게이트 들어간 적 한 번밖에 없으면서.”
“한 번만 봐도 보이는 게 있지. 내가 C급이고 너보다 후배이긴 하지만…… 그래도 너보다 정신 연령은 많이 높을걸.”
희주가 리온을 놀리며 말했다. 조금 약이 오른 리온이 희주를 살짝 노려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그렇게 안 맞는 걸까요?”
“응?”
농담으로 던진 말에 진지한 대답이 돌아오자 되레 당황한 희주가 풀이 죽은 리온을 돌아보았다.
“물론 저희가 어지간히 싸우기도 했지만…… 다들 안 될 거라고 말하니까 좀 기분이 이상하달까.”
“야,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모르겠어요. 요즘 되게 괜찮게 지내고 있긴 한데…… 전 이 정도 사이만 되면 솔직히 다 괜찮아질 줄 알았거든요.”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만한 사이이긴 했다. 단순히 같이 살게 되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농담도 주고받고, 매일 꾸준히 연락도 주고받았다.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 준다든가 하는 스킨십도 자연스러워졌다.
리온이 ‘딱 이 정도 사이만 되어도 좋겠다’라고 줄곧 생각해 온 정도의 사이가 되었는데, 왜 마음이 편하기는커녕 여전히 어딘가 찜찜한 기분만 드는 걸까.
“다들 반쯤 농담으로 하는 말인 건 아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도 이 상황이…… 좀 이상하다고 느껴서 그런가. 생각할수록 마음이 좀 불편해요.”
“야…… 미안. 난 그냥……. 미안, 내 생각이 짧았다.”
진지하게 돌아온 대답에 희주가 빠르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거의 하루 종일 당직실에서 리온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대로는 하루가 굉장히 불편하게 지나갈 것 같았다.
“아니에요. 누나 잘못은 없죠. 그냥…… 답답해서 그래요. 저도 제가 왜 이렇게 답답한지 모르겠어서.”
“그…… 그럼 얘기라도 좀 해 볼래? 왜, 답답한 얘기 남한테 하다 보면 정리도 좀 되고 해결책이 나올 때도 있잖아. 오늘 하루 종일 시간도 많은데.”
희주가 어떻게든 싸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수습해 보기 위해 말했다. 잠시 고민하던 리온은 어차피 비밀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