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분명 보기 좋다고 생각했던 웃는 얼굴이었는데, 이번엔 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걸까.
“어, 강리온. 언제 왔어?”
그렇게 유원과 마주하고 웃고 있던 예주가 리온을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돌리며 사라진 유원의 미소에 리온은 표정을 구기지 않으려 애를 써야만 했다.
“지금요. 뭉쳐 있으라니까 왜 따로 행동하고 그래요.”
“어? 식량 확보도 중요하니까 집중하다 좀 이탈했나 봐. 그래도 그렇게 멀리 오지는 않았는데?”
“알죠, 그렇게 멀지 않은 건 아는데 지금은 그냥 어중간한 게이트에 들어온 게 아니니까 조금 더 주의하자는 거죠.”
게이트에서는 늘 경계해야 하는 게 맞지만, 지금은 다른 곳도 아닌 S급 게이트라 그런지 유난히 조심스럽고,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 리온이 이렇게까지 혼내는 이유도 그 때문일 터.
예주는 평소에도 주변 사람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강한 리온을 알기에 당황도 잠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유원을 불렀다.
“유원아 가자.”
“유원아?”
유원이 이번 구성원 중 막내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유원과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었기에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원을 ‘유원 씨’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유원아, 라니.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리온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예주가 말했다.
“아, 이제 게이트도 반이나 지났고, 자기가 막낸데 계속 그렇게 딱딱하게 부를 필요는 없다고 해서. 그렇지?”
“네. 다들 편하게 대해 주셨으면 좋겠어서요.”
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좋은 변화였지만, 리온은 왠지 모를 얼떨떨한 기분에 표정을 찌푸렸다.
‘뭐야. 그럼 어제 그것도…… 그냥 다른 사람들한테도 다 똑같이 적용되는 친절 같은 거네.’
딱히 기분이 나쁠 일도 아니었는데 왠지 모르게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서운함도 잠시, 리온은 이내 고개를 젓고서 말했다.
“일단 가요.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아, 그래야지. 가자 유원아.”
“네, 누나.”
유원이 고개를 끄덕거리곤 예주를 따라 나왔다.
“근데 그거 먹을 수 있는 열매긴 해요?”
“아, 어. 간이 검사기로 확인해 봤어. 사과랑 같은 성분이야.”
예주가 양팔 가득 든 열매를 자랑하며 말했다. 리온은 고개를 끄덕이곤 앞장서서 걸었다.
두 사람이 합류한 뒤, 팀은 곧바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늘은 좀 괜찮았던 것 같아.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그래도 하루하루 괜찮아지니까 다행이죠. 일주일 내내 힘들어서 울다가 나가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운 건 너고. 난 안 울었거든?”
“아, 네네.”
여전히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상황에서 말만이라도 편히 주고받으니 한결 편안해진 분위기에 리온 역시 기분이 평소보다 나아져야 했지만, 어째 어제보다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역시 힘들지? 오늘은 푹 쉬어.”
“어, 어어?”
“맞아요. 리온 선배 못 자서 표정 안 좋은 것 좀 봐. 너 때문이잖아.”
“아니…… 나도 너무 피곤해서…….”
주찬이 뻘쭘한 얼굴을 하고 너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피곤해서 기분이 좋지 않은 게 아닌 것 같긴 하지만, 리온은 동료들이 착각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 오늘은 맘 편히 잘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 불침번 누구야?”
“……저랑 진하 씨요.”
민현이 싫다는 얼굴을 하고 손을 들었다. 치유 계열 에스퍼인 민현이 불침번을 서는 것이 큰 의미가 있나 싶기는 했지만, 그렇게 치면 가이드들이 불침번을 설 필요도 없으니 리온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민현이 믿고 자도 되는 거지?”
“전…… 저는 자신 없…….”
“내가 자신 있으니까 괜찮아. 나만 믿어, 응?
진하가 우물쭈물하는 민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 채 자신만 믿으라며 가슴팍을 두들겼다. 사교성 좋은 진하는 어느새 대부분의 팀원과 친해진 상태였다.
민현과 진하의 앞에만 가면 그렇지 않아도 짧은 말이 더 짧아지는 유원만 빼고.
“민현이, 형 못 믿어?”
“아니, 그게 아니라요…….”
“낯 가려서 그래. 같이 일한 지 1년 넘은 우리도 아직 어려워하는데 네가 너무 나대니까 어려워하지.”
“나댄다니…… 너무해.”
진하가 풀이 죽은 척을 하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괜한 곳에 화풀이를 한 것 같은 찜찜한 기분에 어깨를 으쓱했다.
“장난이야, 그냥 낯 많이 가려서 그래. 겁도 많고. 그래도 너무 괴롭히면 진짜 너 싫어할지도 모른다.”
“아냐, 우리 민현이가 나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렇지?”
“네, 네. 그렇죠.”
어색하게 웃는 민현과 진하를 보던 리온이 자신의 텐트 메이트를 바라보았다. 팀원들과 편하게 지내고 싶다는 말이 사실인지, 옆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는 모습이 낯설었다.
‘평소라고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지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나서서 말을 걸던 애도 아닌데.’
“흐음.”
그런 리온을 재미있다는 얼굴로 바라보던 진하가 작게 웃음 지었다. 그제야 시선을 느낀 리온이 유원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빨리빨리 걷자고요. 조금 있으면 해가 질 것 같으니까. 그래도 여긴 밤이 짧아서 다행이야.”
“그래, 기운이 영…… 가볍지 않아지는 걸 보니까 여기서 보스가 있는 곳까지 그렇게 멀지 않은 것 같다. 오늘은 최대한 이동하기 편한 곳에 자리를 잡고 계획을 짜는 게 좋겠어.”
태환이 멀리 보이는 산을 노려보며 말했다.
“감일 뿐이지만…… 그래도 게이트 안에서는 이 직감만큼 쓸모 있는 게 없거든.”
“맞아요. 사실 저도 좀…… 기분 나쁜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렇지? 아무래도 보스를 지키는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내일부터는 정말 쉴 시간도 없을 것 같다.”
태환이 그렇게 말하며 에스퍼들을 돌아보았다. 자신보다 적게는 10살, 많게는 20살 가까이 어린 후배들이었지만, 그래도 마냥 어리지만은 않은 동료들이었다.
“반쯤 은퇴한, 큰 도움도 안 되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 과한 잔소리 같겠지만……. 그래도 S급 게이트에 들어가 본 적 있는 사람으로서, 예전에 들어갔던 게이트가 어땠는지 떠올려 보면…… 익숙해질 만하면 더 빡세지는, 그런 상도덕 없는 곳이었거든. 그러니까 지금 좀 익숙해진 것 같다고 너무 안심하진 마.”
“과한 잔소리라뇨.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인데요.”
“그럼 다행이고.”
분위기를 잡은 태환이 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신이 이전에 느꼈던 무력감과 공포를 생각하면 지금의 팀원들은 생각보다 상황을 잘 이겨 나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안심해도 될 단계가 아니었다. 조금 나아진 분위기를 깨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내일은 아마 더 힘들 거다. 그러니 긴장을 늦추지 말고, 너무 안심하지도 말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둬. 목표는 들어온 인원 그대로 나가는 것. 그것만 하면 잘한 거니까 너무 기대하지도 너무 실망하지도 마.”
“네.”
“애들한테 너무 겁주는 거 아냐? 필요한 이야기기는 하지만…… 어차피 겪으면서 다 알게 될 텐데.”
희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녀에게도 이 이야기는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그들이 들어갔던 S급 게이트에서는 들어온 숫자만큼의 인원이 게이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일이 적지 않았기에 더더욱 그랬다.
“알고 겪는 것과 모르고 겪는 건 다르니까.”
“더 힘들어질 거라는 건 알고 있어요. 당연히 정신 똑바로 차려야죠. 우리가 여기서 제대로 끝내지 못하면 어떤 일이 생길지, 다들 잘 알고 있잖아요.”
리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태환의 말이 맞았다. 이곳은 한시도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물론 극도의 불안감에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문제겠지만, 어느 정도의 긴장은 필요했다.
“지금 일주일을 편하게 지내면, 나가고 나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다들 일주일 안에 꼭 끝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텨야죠. 절반이나 왔는데, 나머지 절반을 못 해서 실패하면 너무 아깝잖아요.”
“맞아요. 열심히 해야죠.”
“제일 먼저 나가떨어진 게 말이 많네.”
“……이제 진짜, 정신 제대로 차릴 거라니까.”
“특히 리온이한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는데…… 아니다. 이건 다들 듣는 자리에서 하는 것보단 따로 하는 게 낫겠어.”
뭔가 말하려던 태환이 입을 다물곤 고개를 내저었다. 태환이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갑자기 이런 말 해서 좀 당황스러웠으려나. 그렇지만 지금 말할 기분이 들었을 때 딱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아니에요. 필요한 말이었다고 생각해요. 어제는 힘들었다가, 오늘은 또 다 잘될 것 같았다가…… 중간이 필요했는데, 딱 잡아 주시니까 좋네요.”
“허허,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현서가 태환의 말을 거들자 태환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목뒤를 긁적였다. 태환이 뻘쭘하다는 듯 괜히 팔다리를 크게 휘저으며 걸었다.
“일단 텐트부터 치자. 아무래도 내일부터는 보스가 있는 중심지로 들어가게 될 테니까 아까 딴 열매들도 좀 정리하고, 남은 식량과 물도 체크해 보자고.”
“아직 텐트 칠 곳까지 도착하려면 좀 남았어. 하여튼 성질만 급해 가지곤.”
희수가 그런 태환에게 잔소리를 했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따라가던 리온은 애매하게 끝나 버린 이야기를 떠올렸다.
‘나한테 할 이야기라니 뭘까.’
뭔가 실수한 거라도 있는 걸까. 어느새 유원에 대한 생각 대신 걱정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운 리온이 온갖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묵묵히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