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밤에 큰 소리가 나던데.”
“보스는 아니었어요. 하아…… 차라리 그게 보스였으면 좋았을 텐데.”
돌아온 에스퍼들은 하나같이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는 옷 앞섶이 온통 검게 변한 피로 물든 사람도 있었다.
“이건…….”
“아, 바로 치료받았어요. 진짜, 민현이 없었으면 큰일 났을 거예요.”
서하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웃으며 말하지만, 사실 별거 아닌 상황은 아니었다. 조금 전엔 정말 죽는 줄 알았으니까.
“빠르게 보스를 처리하려고 했는데…… 보스를 지키는 다른 몬스터가 하나 있더라고요. 보스는 땅, 그놈은 하늘. 아주 상성이 잘 맞던데요.”
“제발 그만 좀 다쳐요…….”
완전히 패닉이 온 것 같은 민현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치료 계열 에스퍼의 특성상 환자를 볼 일이 많은 민현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진 것은 처음이었다.
“내 팔이 다 아픈 것 같아요…….”
“잠깐, 리온이는?”
돌아온 사람들의 상태를 살피던 희수가 사람이 한 명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물었다. 그러자 에스퍼들이 조금 곤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아무리 말해도 듣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혼자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유원이 주찬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 에스퍼들이 불편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는 가서 가이딩 받아.’
‘선배는요?’
‘난 괜찮아. 당장 시간은 벌어 놨다지만, 몬스터가 우리 사정 봐 가면서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이만큼 헤집어 놨으면 한 명은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야지. 어서 다녀와.’
보스를 지키는 몬스터는 겨우겨우 처리했지만, 아직 가장 중요한 관문이 남아 있었다. 리온은 그런 불안함을 안은 채로 이 숲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보이는 몬스터는 다 처리했어. 만약을 대비해서 남아 있겠다고 해서…….”
“그래도, 그 상태에서 몬스터가 나타나기라도 하면요.”
“진정해, 일단 가이딩부터. 팀원들이 빨리 회복해서 돌아가야 리온이한테도 도움이 될 거잖아. 안 그래?”
진하가 순간 자제력을 잃은 유원을 진정시켰다. 진하의 말이 맞았다. 이미 리온은 혼자 숲에 남아 있고, 지금 상황에서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다른 에스퍼들이 최대한 빠르게 회복해 그와 합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침착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리온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도 위험한 짓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었다.
혼자 있으면 또 무슨 위험한 짓을 할지 모르는데, 심지어 가이딩도 부족한 상황에서 리온을 혼자 두고 와도 되는 걸까.
“그래, 설득해서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보통 황소고집이어야지. 차라리 그럴 시간에 빠르게 가이딩 받고 합류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일단 온 거야.”
태환이 진하의 말을 거들며 그런 유원을 진정시켰다. 유원이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상황인지 이해는 갔지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가이딩이 필요한 건 등급과 무관하게 에스퍼라면 누구든 마찬가지일 텐데, 자신은 초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자리에 남아 있다는 게 답답했다.
조금 전, 민호가 숲에 들어가서라도 가이딩을 해 주고 싶다던 말이 뼈저리게 이해됐다. 유원은 지금 당장이라도 리온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가이딩을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유원은 그런 마음을 애써 억누른 채 에스퍼들을 가이딩 해 주었다. 그들의 말대로 리온은 한 번 정한 것을 쉽게 바꾸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조금은…… 기대했는데.’
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섭섭했다. 새벽의 그 대화 이후로, 자신의 마음이 아주 조금 정도는 전달됐다고 생각했었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리온은 이번에도 위험한 길을 택했고, 답답해하는 것은 유원 한 사람뿐이었다. 유원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꼭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는 사람처럼 구네요.”
“에스퍼라면 누구나 그런 상황을 각오하긴 하지만, 걔는 좀 심하긴 하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제가 말하기엔 너무 주제넘는 말일까요.”
유원이 흘리듯 본심을 털어놓았다. 다행히 민철은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대강 대답해 줄 뿐이었다.
“주제넘을 건 없지. 근데 걔는 그래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걸. 누가 말하든 마찬가지일 거야.”
“그런가요.”
분명 리온에게 반한 건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그 반짝거리는 모습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리온의 그런 면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다 됐어요.”
“역시 S급 가이딩이 빠르고 효과가 좋아. 매칭률이 그렇게 높은 편도 아닌데 말이지.”
민철이 가이딩을 받기 전보다 훨씬 상쾌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답지 않게 명랑한 얼굴이었다.
“너무 걱정하진 마. 그런 사람 아니면 에스퍼 못 해. 뭐, 가이드도 크게 다를 건 없지만…… 그래도 이런 사람들이 있어야 세상이 돌아가는 거 아니겠냐.”
“그렇죠. 그렇긴…… 하죠.”
유원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민철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온은 그런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게 되는 것은, 그저 유원의 사심일 뿐이다.
“이제 그만 가자. 언제까지 유원이 혼자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잠시만, 가이딩 10초만 더……!”
잠시 후, 각자 나름의 정비를 마친 에스퍼들이 다시 숲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1초라도 더 가이딩을 받고 싶어 하던 주찬까지 가이딩을 마친 후, 현서를 필두로 한 팀원들이 다시 출발하려던 순간.
쾅―!
큰 소리와 함께 숲 바깥의 나무가 울릴 정도의 진동이 게이트 안을 울렸다. 놀란 팀원들이 소리가 울린 곳을 동시에 쳐다보았다.
“뛰어!”
“젠장, 어떻게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대기해요. 휘말릴 수도 있으니까 절대 안쪽으로는 들어오지 말고.”
에스퍼들이 서둘러 숲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전투에 참여할 수 없는 가이드들은 떠나는 에스퍼들의 뒷모습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들 괜찮아야 할 텐데.”
“리온이, 괜찮을까? 물론 이 중에서 가장 강한 애긴 하지만…… 지금은 가이딩도 부족할 거고, 혼자서는 역부족일 텐데.”
“괜찮을 거예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리온이잖아요.”
가이드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에스퍼들을 걱정하고, 서로를 달랬다.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멍하니 숲을 바라보는 유원을 발견한 진하가 유원에게 말을 걸었다.
“유원 씨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단 들어와요. 지금 우리는 가만히 컨디션 조절하면서 여기 버티고 있는 게 도와주는 거예요.”
“…….”
유원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숲에 고정되어 있었다.
‘괜찮은 걸까.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똑같은 사람인데, 두렵지는 않을까. 가이딩을 받은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 지난번처럼 가이딩이 부족해서 쓰러지는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지.’
자신이 S급 가이드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리온의 매칭 가이드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마냥 기쁘기만 했는데 지금은 자신이 에스퍼가 아닌 가이드라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가이딩을 해 줄 능력이 있으면 뭐 해. 눈앞에 있어야만 해 줄 수 있는걸. 게다가 지금 내가 숲에 들어가 봤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되겠지.’
차라리 리온의 곁에서 직접 싸울 수 있는 에스퍼가 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원이 그렇게 생각하며 애꿎은 입술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입술을 아무리 물어뜯어도, 자신의 무능함을 탓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유원은 리온에게 당장 달려갈 수 없었고, 도움을 줄 수도 없었다.
‘눈앞에서 다치는 걸 보는 것보다 더 싫은 일도 생기는구나.’
유원이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리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설렘에 차 망설임 없이 시작한 가이드 일인데, 어째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무력함만 느끼게 되는 것 같았다.
* * *
‘다들 한군데로 모이면, 보스가 어디로 갈지는 너무 뻔한 일이지 않아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한 명이라도 남아서 시간 끌기라도 해야죠. 가이드들까지 끼고 전투하는 건 다 같이 죽자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고집을 부려 팀원들을 보낸 리온이 혼자 남아 숲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리온이라고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매칭률 99퍼센트의 S급 가이드. 유원에게 받은 가이딩은 확실히 다른 가이딩과는 급이 달랐다. 가이딩의 속도도, 질도, 지속되는 효과도 좋았다.
그러니 팀원들이 잠시 가이딩을 받고 오는, 그 잠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리온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리온은 여유가 조금이라도 더 있는 사람이 희생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한 능력이 있으면 당연히 의무도 따라오는 거니까.
‘사람들을 구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냥, 자기 생각도 조금 정도는 했으면 좋겠고, 사람을 구하다 죽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유원에게 들었던 말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괜히 감성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걸 보니 아무래도 S급 게이트에서의 일정이 힘들긴 힘들었나 보다.
“됐어,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중요한 건 일단 이 게이트를 마무리하는 거지.”
스스로를 타이르듯 혼잣말한 리온이 잡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숲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숲은 폭풍이 치기 전날의 밤처럼,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