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온이 슬금슬금 방 밖으로 나왔다. 작게 딸린 창고에다가 짐을 정리하고 있는 유원의 뒷모습이 보였다.
‘제일 간단한 것부터 해 보는 게 좋겠지. 어깨동무 정도야 아무하고나 할 수 있는 건데 뭐.’
“뭐 해? 좀 도와줘?”
리온이 자연스럽게 유원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아직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이렇게 조금씩 거리를 좁히다 보면 가까워질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한 리온이었다.
그러나 유원은 리온의 손이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오자마자 깜짝 놀라 그의 손을 쳐 냈다. 리온은 유원의 매서운 손길에 내쳐져 살짝 따끔거리는 손을 무안하게 만지작거렸다.
“어…….”
그러고 보니 유원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게이트 안에서도 지금의 상황과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었나.
리온이 뻘쭘한 얼굴을 하고 유원을 바라보며 애써 웃었다.
“내가 너무 눈치가 없었나?”
“……그게 아니라 놀라서 그래요.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니까.”
그때의 상황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유원이 싫지 않은 척이라도 해 주었다는 것이다.
잘 지내려 시작한 동거인데 이렇게까지 선 긋듯 사람 무안하게 쳐 내는 게 서운하기도 하고, 솔직히 한편으로는 기분이 조금 나쁘기는 했지만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도 자신이고, 유원도 놀라서 그런 거라고 해명을 해 주기까지 했으니 전처럼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것일 테니.
“아, 그렇지. 그냥 뭐 하고 있나 싶어서.”
“그냥 정리 좀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리온이 이런 유원의 태도에 조금 익숙해진 것 같기도 했다. 예전 같으면 어색하게 웃는 게 아니라 대뜸 화부터 냈을 텐데.
‘나도 죽다 살아났더니 뭐가 좀 바뀌는 게 있네. 둘 다 어떻게든 발전하고 있는 거지. 좋게 생각하자, 좋게.’
“이건 뭐야? 너 가족사진?”
“아, 네. 이게 왜 여기에 있지. 부모님이 저 몰래 넣어 두신 건가 봐요. 꽤 예전 사진이라 찍은 기억도 잘 안 나는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한 리온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런 리온의 눈에 창고 한구석에 놓여 있는 액자가 들어왔다.
일단 무슨 말이라도 꺼내 어색한 분위기를 푸는 것이 낫겠다 싶었던 리온이 그 액자를 집어 들고 호들갑을 떨었다.
“와, 이거 몇 년 전이야?”
“아마…… 5년 전이요. 재작년에 새로 찍은 가족사진 있어서 이 사진은 오랜만에 보네요.”
다행히 유원은 리온을 더 이상 뻘쭘하게 두지 않고 성의껏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러다 리온에게서 가족사진을 받아 갔다. 사진 속의 유원은 지금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와, 5년 전이라고? 너 고등학교 때 완전 훅 컸나 보다.”
“네, 중학교 때까지는 좀 작았어요.”
“이분은 네 형님이야? 와, 형님도 잘생기셨다. 너랑 닮지는 않았는데, 다른 느낌으로 잘생기셨네. 형님은 무슨 일 하셔? 이런 거 물으면 실례인가?”
“경찰이에요.”
경찰이라는 말에 리온이 눈을 반짝였다. 관심 가득한 얼굴을 한 리온이 말했다.
“진짜? 나, 센터 들어오기 전까지는 경찰 하려고 준비했었는데. 멋있다.”
“형이랑 잘 어울리네요. 그것도 사람 구하는 일이니까.”
“암튼 멋지다. 다음에 한 번 소개시켜 줘. 근데…….”
리온은 유원의 손에 들린 사진 속 유원의 형을 바라보다 다시 어린 유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묘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흠, 어릴 때도 잘생겼는데…….”
“갑자기요?”
“아니, 이런 얼굴은 한 번 보면 못 잊을 것 같은 얼굴이라 내 기억이 잘못된 거겠지만, 뭔가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리온이 눈을 가늘게 뜨고 어린 유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인데, 기억이 영 흐릿하다. 그런데 이런 얼굴을 내가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기분 탓이겠죠, 방 정리는 대강 끝내셨어요?”
“어? 어, 내일 겉옷만 가져와서 정리하면 끝날 것 같네.”
“그럼 그만하고 저녁이나 먹죠.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유원이 사진을 다른 곳에 정리한 바람에 시선 둘 곳을 잃은 리온이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어디선가 본 것 같았는데, 그냥 기분 탓이었나.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 이것도 나름 이사니까 짜장면이나 먹을까? 아, 너 혹시 그런 거 안 좋아해?”
“아뇨, 괜찮아요. 딱히 가리는 거 없이 먹어요.”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사진 따위 잊어버린 리온은 유원의 뒤를 따라 거실로 나왔다.
‘어깨동무 정도는 쉬울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네. 아, 다른 사람이랑 몸이 닿는 거 자체를 싫어하나? 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 이씨, 안 되는데.’
“짜장, 짬뽕?”
“형은요?”
“음…… 나는…… 둘 다 괜찮은데 역시 이사 온 날은 짜장이지? 아니다, 근데 매운 게 좀 당기는 것 같기도 하고. 잠깐 고민을…….”
“그럼 그냥 하나씩 시켜요. 전 뭐든 상관없으니까.”
“그래? 여기 이름이…… **오피스텔이지? 901호…… 설정됐다. 평소에 시켜 먹는 집 있어?”
“아뇨.”
“그럼 그냥 리뷰 좋은 곳으로 시킨다.”
리온이 내심 불안한 마음으로 핸드폰 화면을 톡톡 눌렀다.
매칭률 문제도 있고, 그날 유원의 표정이 마음에 걸리기도 해서 최대한 잘해 보려고 했는데 첫날부터 미묘하게 삐걱거리고 있었다.
‘다른 애들은 어깨동무 정도로는 아무렇지도 않아 하던데……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다는 건 알지만……. 아이 씨,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3개월이나 붙어 있는데 뭐 하나쯤은 싹이라도 트지 않겠어?’
묘하게 삐걱거리는 상황을 불편해하는 감정을 티 내고 싶지 않았던 리온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저녁을 주문했다.
“그냥 리뷰 많은 데로 시켰다?”
“돈은…….”
“아이, 뭐 이것까지 주려고 그래? 나도 자존심이 있지. 너한테 밥까지 얻어먹기는 싫네요. 내 마지막 자존심이니까 좀 지켜주라.”
리온이 쾌활한 척을 하며 유원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피하거나 내치지 않은 유원이었다.
‘그래. 조금씩 가까워지면 되는 거겠지.’
“맛있겠다. 빨리 왔으면 좋겠네.”
리온이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래, 첫날부터 드라마 같은 정도의 변화를 바랄 수는 없는 거니까.
“아, 게이트 안 들어가니까 하루하루가 너무 느리게 가.”
리온이 기지개를 쭉 켜면서 유원의 집을 돌아다녔다. 생각보다 막막하고도 평화로운 두 사람의 동거 첫날이었다.
* * *
“둘이 어제 싸웠지?”
“안 싸웠거든?”
“진짜? 별로 믿기지가 않는데.”
“아, 진짜 안 싸웠어. 내가 많이 참고 있지. 나 성질 많이 죽었다니까?”
“네가? 강리온이랑 참는다는 말이 공존할 수 있는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이걸 확 그냥.”
“이것 봐, 이것 봐.”
건수를 잡은 진하가 리온을 지겹게도 놀려 댔다. 두 사람의 동거가 일주일째 되던 날이었다.
“일주일 동안 한 번도 안 싸웠어?”
“뭐…… 한 번 정도는 싸웠지?”
“오, 그래도 생각보다 얼마 안 싸웠네? 뭐 하다가 싸웠는데?”
“아냐 근데 싸웠다고 하기엔 좀 애매하긴 해. 그냥 걔 운동하는 거 구경하다가 다친 쪽 다리 좀 부딪힐 뻔했는데…… 그럴 수도 있는 건데 그러게 왜 얼쩡거리냐길래 욱해서.”
리온은 동거 이후 딱 한 번 유원의 언성이 높아졌던 날을 떠올렸다. 이런 좋은 기구들을 눈앞에 두고 쓰지도 못한다는 게 영 아쉬워서 유원이 운동하는 데 근처를 알짱거리다가 다친 다리를 세게 부딪힐 뻔한 일이 있었었다.
“푸핫, 너도 참 너답고 걔도 참 걔답다. 그러게 왜 거기서 얼쩡거려. 다리는 괜찮고?”
“다치진 않았어. 아니, 돌아보면 나도 그런 말쯤이야 별거 아닌 건 알거든? 근데 순간 욱하는 걸 어떻게 해.”
리온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별거 아닌 일이었다. 하지만 제 성격이 이래서 저도 모르게 그런 반응이 나오는 걸 뭐 어쩌란 말인가.
게다가 그렇게 치면 사사건건 화부터 내고 보는 유원의 성격도 만만치 않았다.
“성질 좀 죽여라. 그래도 이제 일주일씩이나 살아 봤으니까 좀 감이 잡히지 않아?”
“감? 어떤 게?”
“유원 씨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유원 씨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뭐 이런 거?”
진하가 은근한 기대를 품고 리온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들으면 성을 낼 말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의 지지부진한 관계를 지켜보는 것은 진하의 센터 생활에 소소한 낙이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여느 드라마 시청자가 그렇듯 관계의 엇갈림이 너무 오래가면 재미가 없는 법이었다. 해서, 이제는 슬슬 새로운 소식이 들려오길 기대하는 진하였다.
“걔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라…… 음…….”
리온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고민에 잠겼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그딴 걸 왜 알아야 하는데!?’ 하고 화부터 냈을 리온이었으니 이만한 것도 나름 발전이었다.
“근데 그건 더 모르겠어.”
“왜?”
“그냥…… 어려워. 차라리 싸우기만 하던 때가 더 나은 것 같기도 해.”
리온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예전에는 그냥 서로 땍땍거리면서 싸운 뒤 씩씩거리며 친한 에스퍼들에게 걔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고함 한 번 내지르고 나면 끝났을 일인데, 한 번 신경 쓰기 시작하니 생각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의외의 모습 같은 건 안 느껴져?”
“의외의 모습? 아, 그건 좀 많이 느껴져.”
리온이 집에서의 유원을 떠올렸다. 평소 밖에서만 봐 왔던 쌀쌀맞고, 지나치게 꼼꼼한 모습을 예상했으나, 유원은 동거를 시작하니 예상 밖의 모습을 보였다.
“그런 얘기 좀 해 줘봐. 나도 궁금하다.”
“으음…… 일단…….”
리온이 유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재수 없는 얼굴, 하지만 요즘은 왜인지 모르게 만만해 보이는 얼굴.
“그러니까, 어떤 점이 의외냐면…….”
이제는 떠올리는 것이 꽤 익숙해진 얼굴을 머릿속에 그린 리온이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