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하, 나…….”
“어허, 너는 네 가이드한테 가이딩 받아야지.”
현서가 진하에게 다가가는 리온을 유원 쪽으로 밀어 버렸다.
“게이트 들어가서까지 내외하고 있을 건 아니지?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마. 그럼 믿고 있을게?”
“선배…….”
리온은 잠깐 머뭇거렸다.
아무리 개인적인 감정을 뒷전으로 미루겠다고 결심했어도 막상 실행하려니 내키지 않았다. 당장 게이트에 진입한 것도 아니니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행동한 건데 저지를 당한 것이다.
하기야 그가 다짐했던 대로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게이트에서도 일을 그르쳐서야 안 될 일임은 틀림없었다.
“……자.”
리온이 퉁명스러운 태도로 유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빨리하고 치워 버리란 태도에 기분이 나쁠 법도 했지만, 유원은 아무렇지 않게 리온의 손을 잡을 뿐이었다.
‘짜증은 나지만 가이딩 받을 때만큼은…….’
리온이 손을 타고 흘러오는 기분 좋은 감각에 편안함을 느끼며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물.”
“어?”
“물 마시라고요.”
그렇게 유원의 손을 잡은 채로 멍하니 있다 유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그가 반대쪽 손으로 물통을 내밀고 있었다.
옆을 둘러보니 다들 가이딩을 받으며 물을 마시고, 앉은 채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리온이 뻘쭘한 얼굴을 하고 물통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
마지못해 고맙다는 말을 한 리온이 유원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로 물을 마셨다. 훈련은 생각보다 고됐다. 상대가 크게 다치지 않게 하면서 지능적으로 공격을 이어 가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꽤 까다로운 일이었다.
“자, 5분만 더 쉬고 다시 들어가자.”
“5분이라니, 너무 짧은 것 아니에요?”
“게이트 안에서는 이런 여유조차 없을 수도 있어. 쉬는 시간은 점차 줄일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현서의 단호한 말에 민현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다.
보조계 에스퍼다 보니 사람들의 짐짝 역할이 되어 싸움판 한복판에 끼어 있는 것이 어지간히도 힘든 모양이었다.
“내일, 늦어도 모레면 선배님들도 합류하실 텐데 젊은 애들이 이렇게 골골거리는 꼴 보여서야 되겠어?”
현서가 손뼉을 쳐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힘들진 않아요?”
불쌍한 민현 씨. 리온이 그렇게 생각하며 남은 가이딩을 받고 있는데 유원이 갑작스럽게 말을 건넸다.
갑자기 왜 안 어울리는 질문이람. 리온이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가 너무 유치한 짓인가 하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런 대답 말고, 괜찮냐고요.”
왠지 조금 전보다 더 날카로운 것 같은 말이 돌아왔다.
하여튼 싸가지하고는. 리온이 유원을 살짝 흘겨보곤 말했다.
“그게 뭐가 중요해. 어차피 내가 해야 하는 일인데. 안 힘들고 안 괜찮다고 S급 게이트 나 몰라라 하고 버리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말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오늘따라 말이 많네. S급 게이트를 앞두고 생각이 많아지기라도 한 걸까. 하긴, 이유원도 인간이기는 할 테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었다.
리온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걱정되긴 하지만 그건 어떤 게이트를 들어가든 마찬가지야. 이번엔 내가 실수했을 때 따라오는 리스크가 더 크니까 평소보다 더 집중해야겠지만, 딱 그 정도일 뿐이야.”
아무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다. 벌써부터 불안감에 밤잠을 설치곤 하는 리온이었지만 그런 불안을 곧이곧대로 말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 싸가지야 전혀 타격이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불안해했다가는 팀의 모두가 흔들릴 것이다.
그러니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해야 했다. 불안해도 티 내지 말아야 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럼 그렇지. 리온이 유원의 대답에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리온은 유원의 그 말을 듣자 긴장이 조금 풀렸다. 내가 불안해하든 그렇지 않든 태도가 늘 한결같은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니 부담이 조금 덜해지는 기분이었다.
“5분 끝났어. 자, 다들 다시 자리 잡아.”
“으아아…….”
죽는 소리를 내면서도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팀원들을 본 리온이 말없이 유원에게 물통을 돌려주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 *
“진짜 죽겠다…… 이 짓을 최소 일주일을 더 해야 한다고? 전 차라리 지금 당장이라도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을 지경이에요.”
주찬이 몇 시간 사이 홀쭉해진 얼굴을 하고 말했다. 옆에서 민현이 입을 열 기력도 없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소리 하면 안 되지. 지금 이 상태로 게이트 들어갔다가는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우왕좌왕하다 며칠 날렸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상황은 운이 좋은 거지.”
“저도 알아요.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뭐…….”
주찬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툴툴거렸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다들 훈련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다.
“들어가서 잘할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하루 온종일 리온 선배한테 맞기만 한 것 같은데…….”
“몬스터보다 내가 더 강한 건 당연한 거지. 머리 쓸 줄도 모르는 바보들하고 비교하지는 말아 줄래?”
리온이 기분 나쁘다는 듯 말했다. 장난인 것이 분명한 말투였기에 다들 심각해지지 않고 주찬을 타박하기만 했다.
“너 훈련 열심히 해야겠더라. 리온이가 완전 너만 잡던데.”
“다 강하게 키우려는 마음인 거지, 뭐.”
“내일은 너니까 기대해.”
“네⁈”
서하가 청천벽력 같은 말에 입을 떡 벌리곤 세상이 무너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리온이 기대하라는 말을 남기곤 킬킬거리다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훈련은 잘 끝났냐?]
“첫날치고는요. 확인하려고 전화하신 거예요?”
[다 같이 있으면 지금 바로 센터장실로 올라와. 너희 선배들 왔으니까 인사 정도는 해야지.]
내일이나 모레쯤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리온이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벌써요?”
[어떻게 가만히 있기만 하냐면서 총알같이 날아왔네. 훈련은 내일부터 합류할 건데, 온 김에 안면을 먼저 익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리온이 센터장과의 전화가 끝난 후 팀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어차피 훈련이 끝나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다 같이 이동하는 길이었기에 목적지를 옮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떤 분들일까?”
“센터장님이랑 같이 활동하던 후배분들이라고 하던데.”
“S급 페어라는 얘기가 있던데 진짜일까?”
열 명 가까운 인원이 함께 이동하다 보니 이야기가 끊기질 않았다. S급 페어라는 말에 관심이 간 리온이 귀를 쫑긋 세우곤 이야기를 들었다.
“맞긴 한데, 두 분 다 S급인 건 아냐. 에스퍼 쪽이 S급이고 가이드 쪽은 A급이라고 들었어. 그래도 한국에서는 S급 에스퍼의 페어 등록이 처음이라 당시에는 떠들썩했다고 하던데.”
“어떤 능력인지도 들으셨어요?”
“근거리형이라는 이야기밖에는 못 들었어.”
S급 페어라. 리온이 유원을 힐긋거렸다. 원래대로라면 우리도 페어여야 했는데. 저 싸가지가 조금만 더 예의 있었어도 그랬겠지.
“그래도 S급, A급 페어면 어마어마하지 않아요? A급 페어만 되어도 위력이 어마어마한데.”
“아이, 눈앞에 두고 그런 말 하면 좀 부끄럽잖아요.”
민호와 수진이 팔짱을 낀 채로 웃었다.
현재 한국에 있는 페어 중 가장 능력 있는 페어인 두 사람은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한 쌍이었다.
“다 우리 자기 덕분인데.”
“아이, 자기도 참.”
저 꼴을 게이트 안에 들어가서까지 봐야 한다는 건 조금 짜증 났지만, 사이가 좋을수록 효율이 더 올라가니 꼴 보기 싫으니 떨어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페어는 거의 커플이니까…… 두 분은 부부이시려나?”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뭐, 굳이 이야기할 필요 없는 부분이라 그러신 걸 수도 있고.”
현서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었더니 어느새 센터 바로 앞에 도착해 있었다.
“가서 물어보면 되지.”
“뭔가 조금 긴장되네. 센터장님이랑 같은 시대에 현역이셨던 거면 진짜 체계도 없던 시기에 일하시던 분들인 거잖아. 그럼 되게……. 위엄있고, 깐깐하고 그런 분들이지 않을까?”
“게다가 페어시니까 더 대단할 것 같기도 하고.”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수다는 이어졌다. 그리고 그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에스퍼들뿐만이 아니었다.
“굉장히 멋진 분들이겠죠?”
“그렇지 않을까요? 솔직히 바리바리 싸 들고 가도 가이드가 게이트 안에서 버티는 건 늘 죽을 맛이잖아요. 그분은 그런 체계도 없는 시기부터 일하셨을 테니까…….”
예주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번 팀의 가이드 중 최고참인 그녀는 유독 신이 나 보였다.
“기대돼요. 으으,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이나 안 보였으면 좋겠는데.”
“아, 다 왔어요. 내리죠.”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일행은 각자의 기대를 품고 센터장실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센터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아니, 어차피 다 준비해 놨을 건데 주책맞게 뭐 하는 짓이야!”
“그래도 선배가 돼 가지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는 게! 그게 선배의 미덕이냐? 하여튼 나이는 허투루 먹어 가지고!”
사람 수만큼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