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
“그륵, 그르륵…….”
태환이 보스의 눈을 강하게 내리침과 동시에 보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마치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멈춘 탓에 당황한 에스퍼들이 눈을 깜빡였다.
“뭐, 뭐야.”
“반응 보니까 이쪽이 약점인 건 맞는 거 같은데, 클리어된 것까진 아닌 거 같네.”
태환이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보스를 클리어하거나, 게이트가 열린 지 일주일이 지나면 게이트 내부에도 그에 맞는 변화가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고 조용했으며 아직 게이트가 열린 지 일주일이 되기까지는 하루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일단 좀 떨어져 계시는 게 좋겠어요. 예감이 안 좋아요.”
현서가 불안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태환 역시 섬뜩할 정도로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보스에게서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그대로 떨어져 나왔다.
“아무래도 뭔가…….”
“잠깐, 방금 보스 눈이!”
쾅―!
다급한 외침이 끝을 맺기도 전에 보스의 남은 눈이 빛을 내더니, 입이 크게 벌어졌다. 동시에 뭉툭한 다리를 든 보스가 다리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에스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크르르! 크릉!”
“완전히 미쳐 날뛰는데요?”
“잘못 건드린 건가?”
에스퍼들이 아슬아슬하게 보스의 공격을 피했다. 공격을 해야 이 지긋지긋한 게이트에서 나갈 수 있을 텐데, 폭주라도 한 것처럼 미쳐 날뛰는 보스의 공격을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미친 거 아냐? 이러다 다 죽겠…….”
“크아아!”
귀가 쩌렁쩌렁할 정도로 큰 소리였다. 입을 있는 대로 크게 벌린 보스가 하늘을 향해 강력한 불을 내뿜었다.
“피해!”
“강리온! 괜찮아?”
“괜찮아요.”
난장판 속에서 보스가 공격을 개시하는 틈을 타 한 방 먹이는 데 성공한 리온이 괜찮다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해. 뚫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더 막막해질 수밖에 없다고.’
리온이 애써 침착하게 생각하며 보스를 바라보았다. 여덟 개였던 눈이 태환의 공격으로 인해 그 주변까지 영향을 받았는지 반이나 줄어 있었다.
‘다른 곳을 아무리 공격해도 느긋하던 놈이었는데 눈을 공격하니까 저렇게 날뛰었다는 건, 눈이 중요한 부분이긴 하다는 거겠지. 게다가 미묘하게 움직임이 느려졌어.’
하지만 알아낸 것에 대한 보람도 없이 한 번 급소를 공격당한 몬스터는 털을 겹겹이 세워 제 눈을 보호하고 있었다.
한 번만 더 저 눈을 공격하는 데 성공한다면 판세가 기울어질 것 같은데. 리온이 그렇게 생각하며 이를 바득 갈았다.
에스퍼들에게는 깊게 생각할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보스는 그저 마구잡이로 다리를 휘둘러 대며 공격한 것뿐이지만, 그 마구잡이인 공격마저도 상대하기가 벅찼다.
“젠장, 불을 열심히 피워 봤자 털 몇 개나 간신히 태우는 게 다야.”
“한서하, 발이라도 좀 얼려 봐!”
“하고 있어요! 근데 다 얼리기도 전에 힘으로 뜯어내 버리는 걸…… 으악!”
눈, 저 눈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다면 뭐라도 해결될 텐데. 리온이 보스의 공격을 겨우겨우 막아 내며 생각을 이어 갔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크릉!”
털 아래 가려진 네 개의 눈이 다시 한번 빛나고, 보스가 입을 열었다. 다가올 공격에 대비하던 리온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쾅!
“윽……!”
“리온아!”
그 모습을 집중해서 보느라 공격을 제대로 피하지 못해 팔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괜찮았다. 리온이 아래 있는 제 동료를 향해 외쳤다.
“눈이 아니에요, 아니 눈도 급소는 맞겠지만, 더 분명한 급소는 눈 아래, 피부 아래 있는 것 같아요!”
“뭐?”
“보스가 공격할 때, 입안에서 뭔가 반짝거리는 걸 봤어요. 그게 핵인 것 같아요.”
“입안? 아니, 그걸 어떻게 부숴. 피부도 더럽게 단단한데.”
“입은 공격할 때만 벌리던데. 하아…… 이거 진짜…….”
더 분명한 급소를 알아내 봤자 곧바로 처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 상황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란 말과 다를 바 없었다.
“차라리 고양이 목은 눈에 잘 보이기라도 하지…….”
“일단 알겠어. 눈을 뚫을 만한 공격이 필요하다는 거지.”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그럼 뭔가 방법이라도 있어?”
현서가 내심 기대가 가득한 눈으로 리온을 바라보았다.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든 이 게이트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에스퍼는 리온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리온이는 할 수 있겠지.’
“무슨 방법이 있는 거죠?”
“역시 리온 선배. 진짜 이제 여기서 나갈 수 있어!”
주찬이 순간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이곳에서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이 중에서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말만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 에스퍼들은 어느새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이며 리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격할 때, 공격을 개시하는 그 틈을 노리면 돼요.”
리온은 마치 길 안내를 하듯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그 평온한 말투에 아, 그렇구나. 정말 쉽다. 하고 맞장구를 칠 뻔한 현서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잖아. 지금 이렇게 날뛰는 걸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버티기 힘든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스는 입으로 공격할 때는 하늘을 향해서만 하고 있어요. 위치는 이미 제가 확인해 놨으니까 조금 도와주시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이 휘말리지 않도록 공격할 수 있을 거예요.”
리온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보다도, 어쩌면 이 게이트에 온 이후로 가장 침착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저 공격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너 혼자서 정말 할 수 있겠어?”
“다 도와주실 텐데 혼자서 하는 건 아니죠. 어떻게든 보스가 조금 전과 같은 공격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하고, 또 최대한 제가 생각하는 좌표에서 움직이지 않도록 서하가 발을…….”
“강리온, 그런 말이 아니잖아. 정말 괜찮은 거야?”
“크르르!”
태환의 외침과 동시에 보스가 으르릉거리며 공격을 이어 갔다. 눈을 공격당해 폭주하던 것은 조금 사그라졌지만 여전히 위협적인 움직임이었다.
“한서하, 발을 최대한 얼려 줘. 다른 사람들은 서하가 보스를 고정하는 동안 그 발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좀 잡아 주시고요.”
결국 대답을 회피한 리온이 익숙하게 동료들에게 지시했다.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한 에스퍼들이 리온의 지시를 따랐다.
‘괜찮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온 선배인데…….’
‘강리온이 저러는 건 다 자신감에서 나오는 행동 아니겠어?’
‘빨리 나가고 싶다. 진짜 죽겠어…….’
모두 조금씩의 불안함은 품고 있었지만 리온을 향한 믿음과 신뢰 반, 지긋지긋한 S급 게이트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 반으로 그 불안함을 모른 척했다.
리온의 말을 따르지 않고 이 상황을 해결할 만한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좋아.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할게요.”
서하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다 능력을 발휘했다. 힘을 너무 많이 써 기운 없이 한쪽 구석에 널브러져 있던 서진도 없는 힘을 쥐어짜 보스가 느려지도록 스킬을 걸었다.
“……그래. 뭔가 생각이 있겠지.”
이 상황에 불만이 있는 것 같던 태환도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리온이 시킨 대로 보스를 자극했다. 보스의 입이 다시 한번 크게 벌어진 것은 얼마 뒤의 일이었다.
‘저거다.’
벌어진 입안에서 빛나는 핵을 발견한 리온이 자신의 힘을 최대한 날카롭게 끌어모았다.
‘한 번 공격당하고 나면 쉽게 틈을 보이지 않겠지. 그러니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야 해.’
리온이 있는 곳에서 보스의 핵은 손가락 한 마디보다도 작게 보였지만 그런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집중만 한다면 먼지만큼 작은 물건도 하나하나 옮길 수 있는걸. 저 정도야 괜찮아.’
문제는 리온의 공격이 보스의 공격에 묻히지 않고, 무사히 핵을 공격할 수 있느냐 그것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보스의 입을 향해 다가간 리온이 집중력을 끌어내 보스의 입안을 노렸다.
‘됐다!’
제 공격이 손을 떠난 순간 리온은 이 한 방이 지겨운 S급 게이트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거라고 직감했다. 리온의 공격은 날카로우며 정교했고, 약간의 장애물 정도는 뚫어 버릴 수도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크르르르!”
리온의 직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보스의 혀에 가려져 부서진 핵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리온은 자신의 공격이 목표물을 제대로 맞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최후의 순간을 앞둔 보스가 온몸을 비틀며 주위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저 발악까지 멈추고 나면, 이제 정말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크르, 크르르…….”
얼마나 지났을까, 보스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더니 큰 소리와 함께 보스가 바닥에 쓰러졌다. 끄륵거리며 숨을 몰아쉬고는 있지만, 움직일 힘까지는 없는 듯했다.
“하아. 이제 정말 끝인가.”
그 모습을 확인한 리온이 하늘에서 내려와 팀원들에게로 향했다. 지칠 대로 지친, 그러나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이 가득한 얼굴들이 리온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끝날 것 같지만, 그래도 빨리 나가려면…….”
“강리온, 뒤!”
“리온 선배!”
안도감에 차 있던 팀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황급히 뒤를 돌아본 리온이 보스의 다리 하나가 날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정도쯤이야 손쉽게 날려 보낼 수 있…….’
“윽……!”
땅 위에 발을 딛고 공격을 막아 내려던 리온은 다리가 땅에 닿자마자 밀려드는 고통에 중심을 잃고 기울어졌다.
‘사람들을 구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냥, 자기 생각도 조금 정도는 했으면 좋겠고, 사람을 구하다 죽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보스의 다리가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유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재생된 것은 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