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올라가던 일행은 슬슬 몬스터가 나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가이드들을 남겨 두고 다시 길을 올라갔다. 그러다 먼저 정찰을 나갔던 리온이 몬스터들을 자극하게 되었다.
“아, 이런.”
역시 약간의 긴장은 필요한 법인가. 괜히 딴생각을 하다가 몬스터들을 자극해 버린 리온이 당황한 얼굴을 하고 하늘 위로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러나 동료들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었다. 리온이 정신을 다잡고는 다가오는 몬스터들의 특성을 대강 파악했다.
펑―, 펑―.
“끼에엑―!”
“크아아!”
다행히 이번에 나온 몬스터들은 어제 맞닥트렸던 것들과 비슷한 성질과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혼자서 완전히 소탕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시간 끄는 것 정도는 무난히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 리온이 공격을 이어 가며 크게 막을 펼쳤다.
이동하지 못하게 해 두면 길을 막을 수 있겠지.
막을 크게 펼쳐 보이지 않는 벽으로 몬스터들을 동그랗게 감싼 리온이 주변을 살폈다.
축구장보다도 넓은 공간을 모두 감싸고 있자니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선배!”
다행히 오래 지나지 않아 도착한 서하가 리온을 불렀다. 그녀의 부름과 동시에 몬스터들을 감싸고 있던 힘을 거두어들인 리온이 파티원들과 합류했다.
방어를 위해 쳐 둔 막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막에 머리를 쳐 대던 몬스터들의 체력이 깎이는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해롱거리고 있네. 앞으로도 이렇게 잡을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힘 아껴 둬야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공격이나 제대로 해.”
“예, 예.”
민철에게 잔소리를 들은 리온이 대강 고개를 끄덕이곤 공격을 이어 갔다. 전투 계열이 아닌 서진도 몬스터 몇몇을 수면 능력으로 비틀거리게 만들어 전투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으으, 악! 사람 살려!”
“안 죽는다니까! 꽉 붙잡고 있어!”
“선배님, 저 진짜 죽을, 죽을지도 모른다니까요!”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고개 숙여!”
아직도 게이트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는 소리를 내는 사람은 민현 하나뿐이었다. 신체 강화 계열인 태환이나 현서에게 딱 붙어 부상을 입는 즉시 치유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민현은 내내 아이템인 양 태환의 등판에 업힌 채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아악!”
“어제도 안 죽었고 그제도 안 죽었으니까 오늘도 안 죽을 거야! 걱정하지 마!”
“오늘에야말로 죽을 것 같아요!”
“저기는 오늘도 시끄럽네.”
며칠 새 민현의 새된 비명에 익숙해진 에스퍼들이 덤덤한 얼굴을 하고 공격을 이어 갔다.
저렇게 비명을 지르며 우는 소리를 내긴 하지만 잘 매달린 채로 두 사람의 사람을 전담 마크하며 치유해 주고 있는 민현이었다.
“귀 아프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 보자고요.”
“그래. 민현이 목 다 쉬겠다.”
모두가 힘들었고, 불안했지만 생사의 기로가 걸린 길에선 괴로워하는 시간조차 사치였다. 리온의 퉁퉁 부은 얼굴을 보며 느낀 점이 많았던 에스퍼들이 다시 처음 들어왔을 때의 마음을 떠올렸다.
“끼에엑!”
“꾸엑!”
“크르릉…….”
3일 차에 접어들며 슬슬 경험이 쌓인 것인지, 이번에는 전날보다 조금 더 빠르게 몬스터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모두는 저 혼자서 무언가를 모두 처리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리온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처럼 게이트 안에서 자신이 팀이 핵심이 될 수 없다는 것 역시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지만 옆에서, 뒤에서, 앞에서 힘이 되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에스퍼들은 조금 더 성장한 모습으로 하루를 이어 갔다.
* * *
“얼굴 퉁퉁 부은 것 좀 봐. 가서 좀 쉬어. 잠도 못 자고 힘들었겠다.”
“아니, 저는 정말 주무시라고 했는데…….”
“아, 애초에 존 네 잘못이잖아. 네가 졸고 있는데 우리 책임감 강하신 리온이가 어떻게 자러 갔겠냐고. 네 잘못이야.”
“넵. 제가 죽을 죄를…….”
모두 녹초가 되었지만 어제보다는 분위기가 좋았다. 리온 역시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에 비해 기분은 좋은 편이었다.
힘든 걸 티 내면 안 될 줄 알았는데, 퉁퉁 부은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사기가 떨어지기는커녕 자신을 걱정하며 더 힘을 내주는 동료들을 직접 확인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얼굴이 진짜 좀 붓기도 했고…….’
울어서 눈이 부었을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태 겪어 본 게이트 중 가장 힘든 데다가 맘고생까지 해서 그런지 정말로 얼굴이 꽤 부어 있었다.
눈의 붓기는 어느 정도 묻힐 정도라 이럴 줄 알았으면 굳이 찜질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늘은 푹 쉬세요. 아, 텐트 바꿔 드릴까요? 가이딩만 빨리 받으면 굳이 같은 텐트 쓸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고 친한 사람이랑 있으면 좀 더 마음이 편하잖아요.”
핼쑥한 얼굴을 한 민현이 말했다. 민현과 텐트를 같이 쓰는 사람은 다름 아닌 진하였다.
진하와 리온이 친한 사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팀원들은 리온이 당연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괜찮아.”
“네. 그럼 제가 짐을…… 네?”
당연히 긍정의 대답이 돌아올 줄 알고 있던 민현이 뒤늦게 리온의 말을 이해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놀란 것은 민현뿐만이 아니었다.
“왜?”
“너 말만 안 할 뿐이지, 같은 텐트 쓰는 거 엄청 불편해하고 있었잖아.”
“진짜요? 선배, 진짜 어제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에요?”
이해하지 못할 만한 반응도 아니었지만 왠지 머쓱한 기분이 든 리온이 팀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어차피 그냥 자는 건데, 굳이 바꿀 필요까진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됐어. 호들갑 떨지 마. 아, 저기 가이드들 다 올라왔네요. 그러고 보니 아까 정찰하다가 근처에서 호수를 봤었는데요.”
“그래? 호수면 간만에 좀 맘껏 씻을 수 있을까?”
“네. 아마도요? 거리도 멀지 않을 것 같아요. 걸어서 한 시간 정도?”
“오늘은 거기서 쉬는 걸로 하자.”
상황을 정리해 준 현서가 리온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호기심 많은 인간들에게서 벗어난 리온이 작게 감사를 표시했다.
‘돌아가면 이제는 정말 괜찮다고 말해 줘야지. 또 웃는 얼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리온이 짐을 도로 챙기며 생각했다.
유원의 웃는 얼굴, 드물면서도 참 보기 좋은 그 얼굴을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민현이 괜찮은 거 맞아? 얼굴이 완전 창백한데. 자가 치유는 안 되는 거야?”
“상처는 처치할 수 있지만, 피곤한 건 어쩔 수 없어요…….”
가장 먼저 에스퍼들 앞으로 다가온 건 진하였다. 진하가 영혼이 나간 얼굴을 한 민현을 놀렸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완전 종잇장이 됐는걸. 이러다가 이틀 뒤쯤에는 장렬하게 산화하는 거 아니야?”
“혀엉…….”
“왜 애를 놀려. 가이딩이나 해 줘.”
입술을 삐죽거리며 충격받은 얼굴을 한 민현을 편들어 준 리온이 진하의 등을 가볍게 내리쳤다.
“다들 가이딩 받읍시다. 어, 근데…… 왜 넷밖에 없어?”
가이드 다섯과 비상사태를 위해 남겨 둔 에스퍼 하나. 그러니 총 여섯 명이 있어야 하는데 산을 올라온 사람이 네 명밖에 없었다.
유원과 예주가 보이질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리온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두 사람을 찾았다.
“먹을 수 있는 것 같은 열매가 있어서, 그거 따고 있어.”
“둘만 보내면 어떻게 해?”
“바로 옆인걸. 나무에 가려서 그렇지 바로 저기야. 사과 같은 열매가 잔뜩 열려 있더라고.”
진하가 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빽빽한 나무들로 가려진 숲 안쪽에서 무언가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괜히 에스퍼 하나 붙여 준 줄 알아?”
“그래. 넌 선배가 돼서 안 말리고 뭐 했냐?”
태환이 틈을 놓치지 않고 희수에게 핀잔을 주었다. 희수가 억울하단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아니, 우리도 같이 따고 있었어. 따다 보니까 잠깐 엇갈린 거고 오는 게 보이니까 곧장 이리 온 거지.”
그 말을 뒷받침하듯 희수의 가방에는 열매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상황을 대강 파악한 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리고 가면 되죠. 다음 텐트 칠 곳까지 가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하니까 슬슬 출발하자고요. 짐은 제가 들어 드릴게요.”
“어휴, 이런 건 저 무식하게 힘만 센 아저씨가 해야 하는데 리온이가 고생하네.”
“힘은 세도 팔은 두 개라서, 미안하게 됐네요.”
양쪽 팔에 가장 무거운 가방 하나씩을 번쩍 들어 올린 태환이 툴툴거렸다. 리온이 예주와 유원을 데리고 오기 위해 빽빽한 수풀을 헤치고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머지 네 사람의 말대로 나무에 가려져서 그렇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리온은 두 사람의 대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요? 그래도 대단하다. 난 스무 살에 혹시라도 가이드나 에스퍼로 판명받을까 봐 무서워서 일부러 검사 안 받았는데.”
먼저 들린 것은 예주의 목소리였다.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불퉁한 얼굴로 ‘그렇군요.’ 정도의 대답을 하지 않을까. 리온이 그렇게 생각하며 시야를 가리고 있는 마지막 덤불을 잘라 내었다.
“하하. 그런 경우도 많다고는 들었어요.’
그리고 덤불을 잘라 낸 순간, 리온은 참 보기 좋다고 생각했던 유원의 그 웃음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