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온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눈을 깜빡였다. 당황한 얼굴의 리온을 보던 태환과 희수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 사귀는 게 답이라는 뜻은 아니야.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아, 네네. 그렇죠. 네.”
그제야 살짝 벌어져 있던 입을 다문 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머쓱한 얼굴을 한 태환이 이야기를 이어 갔다.
두 사람이 사귀게 된 것은 다툼 속에서 피어난 사랑이나, 뭔가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 * *
“둘이 사귀는 거 아니야?”
“원래 그러면서 사랑이 싹트는 거지~.”
“좋을 때다, 좋을 때야.”
당사자는 진심으로 싸우는 것인데, 선배들은 그 모습이 귀엽다며 매번 두 사람에게 사실 뒤에서는 사귀고 있는 것이 아니냐며 심심찮게 묻곤 했다.
“그럼 그냥 사귈까?”
“무슨 사귀자는 얘기를 오늘 점심은 국밥 먹자는 얘기처럼 해요?”
그렇기에 반쯤은 충동적으로, 반쯤은 오기로 시작한 연애였다. 이렇게라도 하면 이 관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 정도는 있었다.
물론 현실은 그리 로맨스 드라마 같지가 않아서 관계가 바뀌었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무슨 데이트하자면서 온 곳이 시장이에요? 사람은 사람대로 많고, 할 것도 딱히 없는데.”
“나온 김에 장 봐 가면 좋잖아.”
“데이트가 뭔지 몰라요? 아, 진짜 짜증 나!”
사랑은 없고 오기로만 똘똘 뭉친 연애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진창으로 처박혔고, 이제는 둘의 다툼을 귀여워하며 놀리기도 하던 센터의 선배들마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어…… 이번 게이트는 태환이네 페어…… 랑…….”
“뭘 그렇게 눈치를 보세요. 센터 공식 커플인데.”
“넌 눈치 좀 챙겨라…….”
“뭐, 뭐야. 헤어졌……? 미안하다. 내가 소식이 느려서…….”
“안 헤어졌어요.”
그렇지만 먼저 헤어지자고 하면, 왠지 지는 것 같은 기분에 양쪽 모두 헤어지자는 이야기는 하지 않은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럴 거면 그냥 헤어지자고 하시죠?”
“아니? 난 그런 소소한 이유로 헤어지자고 할 생각 없는데?”
연애가 아니라 싸움의 연장선인 관계였지만 두 사람은 허울뿐인 관계를 열심히 이끌어 갔다.
그렇게 기 싸움을 이어 가기를 한참, 관계 회복을 위한 실마리는 꽤 격한 방법으로 두 사람을 찾아왔다.
“솔직히 너 헤어지자고 하면 지는 것 같아서 얘기 안 하는 거지?”
“누가 할 소리를. 본인도 마찬가지면서 저한테 그런 소리나 할 자격이 있어요?”
오기를 부리는 것도 평생 할 수 있는 짓은 아니었다. 결국 쌓이고 쌓인 것이 터졌던 날, 두 사람은 허울뿐인 데이트를 위해 만난 식당에서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저기 커플 싸운다.”
“커플 맞아?”
“헤어지네, 마네 하고 있잖아.”
“근데 저 사람들 낯이 좀 익은데……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에스퍼나 가이드는 따지자면 유명 공무원, 그렇지만 웬만해서는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올해 있었던 S급 게이트의 영향으로 매체에 꽤 노출됐었다.
“……이러다가 알아보는 사람 나오겠네. 일단 자리부터 옮겨서 이야기해.”
“좋아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한 두 사람은 다툼을 이어 갔다. 다툼의 이유는 언제나 거기서 거기였다.
“됐어요, 이제 진짜 그만해요. 이게 무슨 멍청한 짓이냐고요. 이걸 사귄 거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헤어져요. 그래, 헤어지자고요.”
결국 끝을 고하는 말은 희수의 입에서 나왔다. 아무런 미련도,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은 말투였다.
“근데, 기왕 헤어지는 김에 우리 얘기 좀 해요.”
“뭐, 무슨 얘기. 어차피 또 시비나 걸 거잖아.”
“아, 진짜 짜증 나게!”
머리를 헝클어트린 희수가 호흡을 가다듬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짜증이 나는 건 언제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기왕 이렇게 된 거 할 이야기는 다 하고 끝내고 싶었다.
“다른 선배들 눈치는 그렇게 잘만 보면서, 왜 저한테만 세상 눈치 없는 멍청이처럼 굴어요?”
“머, 멍청…….”
“차라리 아예 눈치가 없는 사람이면 열이라도 덜 받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잘만 하면서 저한테만 바보처럼 굴잖아요.”
“그러는 너는. 야, 내가 선배이자 오빠로서 참아야지 싶어서 말 안 했는데 너야말로 나한테 너무하는 거 아니냐? 다른 선배들한테는 예의 잘만 차리면서, 왜 나한테만 그러는데?”
매일 같이 짜증을 내고 싸우면서도 서로에게 그 이유를 물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그 뒤로도 처음 말한 것과 다를 것 없는 대화를, 아니 다툼을 이어 갔다.
서로 네가 먼저 그러지 않았냐, 선배가 그런 식으로 나오는데 제가 그러지 않을 수가 있냐 잘못의 원인을 찾아가던 중, 태환이 소리치듯 말했다.
“아니, 매칭 가이드에 페어라면서 그 정도도 이해 못 해 줘?”
“처음으로 공감 가는 이야길 하시네요.”
사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었다.
매칭 가이드, 페어.
에스퍼와 가이드 중 이 단어에 로망이 없는 사람은 소수였다.
내게도 매칭 관계인 에스퍼, 가이드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 페어를 맺으면 그 사람과 어떤 관계가 될까 하는 생각 정도는 교육을 받는 신입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보는 망상이었다.
‘물론 로망과 현실이 맞아떨어질 수 없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고.’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은 태환뿐만이 아니었다. 희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둘은 서로 환상을 품은 채 갈등을 쌓아 온 것이다.
어느 순간 펑, 하고 터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커져 버린 아슬아슬한 환상을.
* * *
“그런 생각에 상대한테 악감정만 늘어 갔던 거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 아저씨도 그땐 어렸고, 경력도 뭣도 없는데 S급 에스퍼라고 높게 평가받으니까 기대에 부응하느라 남 챙길 정신이 없었던 건데 말이야.”
“네가 그걸 알아주는 날이 오다니, 이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다.”
“그럼 지금 당장 감던가.”
태환과 희수가 서로를 보며 킬킬거렸다. 잠시 웃던 두 사람이 이야기를 이어 갔다.
“뭐, 그렇게 한 번 서로 털어놓고 이야기하고 나니까…… 여태 왜 그렇게 열을 냈나, 싶더라고. 생각해 보면 페어라는 존재에 거는 기대감이 큰 신입 둘을 다짜고짜 S급 게이트에 던져 버리니까 상대한테 신뢰를 쌓을 시간도 없이 틀어져 버렸던 것 같아.”
“결국 기대가 컸던 게 문제였던 거지. 페어, 매칭 가이드. 그런 단어들 괜히 뭔가 있어 보이잖아.”
리온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기대감이라, 솔직히 리온이라고 기대를 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S급 가이드가 새로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아주 조금은 기대했었다. 매칭률이 바닥을 기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그런데 그 미약한 기대가 매칭률 99퍼센트라는 어마어마한 숫자로 돌아왔을 때, 그 관계에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렇죠. 아직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데, 다 잘될 것 같고…… 인생의 동반자를 얻은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어요.”
“기대가 컸는데 초반부터 틀어져 버리면, 별거 아닌 일에도 더 기분이 상하게 되더라고. 너희 매칭률 99퍼센트라고 했었지? 그럼 당연히 조금만 삐걱거려도 기분 이상하지.
99퍼센트라는 숫자. 정말 실감이 나지 않으면서도 신기한 숫자였다. 물론 매칭률 99퍼센트가 아니라 안 맞을 확률이 99퍼센트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짜증 나는 숫자이기도 했다.
“허심탄회하게 다 털어놓고 얘기해 봐. 그러다 보면 좀 나아질지도 몰라.”
“그래, 똑같이 싸우더라도 순간 짜증 나는 것만 던지면서 싸우는 것보다는, 속에 있는 이야기 다 털어 내면서 얘기해 보는 게 도움이 되더라고.”
“꼰대 같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도 나름 비슷한 걸 겪어 본 사람이라 하는 말이니까 너무 나쁘게 듣진 말고.”
“아니에요. 도움이…… 많이 된 것 같아요.”
리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매번 싸울 때마다 서로 할 얘기만 했지,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그리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저놈은 대체 왜 나한테만 그러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어차피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진지하게 대화를 청해 본 적은 없었다.
어젯밤의 일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먼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해 보면 예상치 못한 속 이야기를 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온이 결심한 듯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말했다.
“해 볼게요.”
“그래, 잘될 확률 99퍼센트라고 생각하고 해 봐. 솔직히 지금도 둘이 일은 잘 처리하잖아? 사이까지 좋아지면 완벽하지.”
“좀 조용한 성격이긴 하지만, 유원이도 좋은 애니까 잘될 거야.”
그래, 그 99퍼센트. 리온이 그 숫자와 유원을 떠올렸다. 이 지긋지긋한 S급 게이트에서 나갈 때는 유원과 조금 다른 사이가 되어서 나갈 수 있기를.
리온이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