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제 늙었다, 늙었어.”
태환이 죽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때는 나름 센터 내에서 에이스로 꼽히던 태환이었는데, 현역인 후배들을 상대로는 영 역부족이었다.
“당연하지. 여긴 완전 전투형이고, 우린 이제 생활형이잖아?”
“그놈의 잔소리는 왜 안 늙냐?”
희수가 태환에게 가이딩을 해 주며 잔소리를 하자, 태환이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나 죽는 소리를 내는 것에 비해 하루 만에 끌어올린 감각이 그리 많이 녹슬어 있지는 않았다.
처음에야 헤매는 모습을 보이는가 싶었지만, 몇 번 바닥에 처박히고 난 이후로는 후배들에게 밀릴 수는 없다는 오기가 생기기라도 한 건지 눈빛부터가 변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너무 부끄러워지잖아요.”
아까 태환의 힘에 밀려나 바닥에 나동그라졌던 민철이 목뒤를 긁적거리며 툴툴거렸다.
“머리 꽤 세게 박은 것 같던데, 괜찮아?”
“괜찮아요. 민현 씨가 바로 옆에서 치료해 줬거든요.”
“그래도 머리 막 흔들지는 마세요. 혹시 모르니까…….”
전투형 에스퍼들 옆에서 사람이 하나 날아갈 때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민현 역시 슬슬 이 상황에 익숙해졌는지 부상자가 나오면 곧바로 달려가 치료를 시작했다.
처음 팀에 합류하고 난 이후 벌벌 떨며 도망치고 싶어 하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S급, A급 가이드가 바로 옆에서 도와주는데 능력 아낄 것 없이 써야죠.”
민현이 부끄럽다는 듯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치유 계열 에스퍼는 정말 귀한데, 중앙 센터에 치유 능력자가 있어서 다행이네.”
“이전에는 치유 계열 에스퍼가 있었던 적이 없나요?”
“아니, 없었던 건 아니에요. 다만…….”
희수가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다 조금 머뭇거렸다. 갑자기 이야기가 끊기자 에스퍼들이 되려 깊은 관심을 보였다.
“에이, 왜 그러세요.”
“아니, 이야기해도 되나 싶어서.”
“이야기 꺼내 놓고 그러시면 더 궁금하잖아요.”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전혀 모르고 있는 후배들이 이야기를 재촉했다. 결국 망설이던 희수가 입을 열었다.
“한 번씩 나오긴 했는데…… 치유 계열은 전투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능력이다 보니 게이트 안에서 다칠 위험이 제일 많았거든. 그래서…….”
끝맺음이 나지 않아 더 무서운 말에 에스퍼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 일찍 그만뒀다는 것일까, 아니면 게이트에서 나오지 못하게 됐다는 걸까.
“…….”
여러 가지 가능성을 시사하는 말에 민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희수가 이럴 줄 알고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하며 이마를 짚었다.
“겁주려고 한 이야기는 아니고, 요즘은 체계도 잡히고 예전처럼 대책 없이 진행하지도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네, 네…….”
“요즘 에스퍼 사망률이 어느 정도였지?”
“1년에 한 명 정도인 것 같은데, 우리 때에 비하면 적지. 우리 때는 인원 부족으로 해외 지원을 받던 때도 있었잖아.”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선배들의 말에 민현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변해 갔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뒤로 넘어가기라도 할 것 같은 모습에 현서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이제 리온이만 남았나?”
“네.”
상성 확인을 위해 태환이 후배 에스퍼들을 하나씩 돌아가며 상대해 주고 있었다.
순차대로 현서까지 훈련을 마쳤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리온의 상대를 할 차례였다.
“이거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니냐? 나는 내 패도 다 깐 데다가, 은퇴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 아저씨인데 상대는 팔팔한 센터 간판 에스퍼라니.”
“적당히 할게요.”
“그건 그것대로 좀…….”
태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성 테스트가 끝나고 나면 다시 조를 짜서 훈련을 해야 하기 때문에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센터장이 직접 전조 증상을 확인했다니, 그의 예상은 확실할 터였다. 게이트는 일주일 내에 생성될 테고, 예상대로라면 그로부터 나흘에서 일주일 사이에 그 문이 열릴 것이다.
S급 게이트인 만큼 문이 열리기 전부터 근처에서 대기해야 할 테니 훈련 시간은 더욱 촉박했다.
“빠르게 끝내고 본 훈련 들어가자고.”
“네. 그럼 갑니다.”
맞춰 보는 차원의 훈련이기 때문에 리온은 모든 힘을 쓰지 않은 채 공격과 방어를 이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환은 속수무책으로 리온에게 밀리고 있었다.
쾅―, 쾅―.
염동력으로 공기를 압축시켜 눈에 보이지 않는 덩어리를 날리는 것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태환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바닥에 주저앉았다.
“항복, 항복. 괜히 간판 소리를 듣는 게 아니네. 같은 S급인데도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서야, 원.”
“선배님은 근거리형이고 저는 원거리형이라 상성이 더 안 맞기도 할 거예요.”
됐다, 됐어. 체면 살려 주기는. 차라리 은퇴하라고 고사를 지내지, 왜.”
태환이 땀을 닦으며 툴툴거렸다. 잠깐 사이 땀을 꽤 흘린 태환과 달리 리온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송했다.
“선배님 또 괜히 약한 소리하신다. 일 년 가까이 심심하면 게이트 공략에 불려 다니는 쟤네도 5분 이상 못 버텨요.”
“그건 저희 능력이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거든요…….”
리온의 위로 아닌 위로에 후배들이 볼멘소리를 뱉었다.
어쨌거나 리온을 마지막으로 태환의 상성 테스트는 끝났다.
다음 훈련에 들어가기 전 공략 팀 전원은 훈련장 한가운데에 빙 둘러앉아 서로의 능력, 그리고 어떤 조합이 가장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리온 대후배님은 약점이 없어, 약점이.”
“그렇진 않아요.”
화제의 초점이 리온으로 바뀌자 태환이 너스레를 떨었고 리온은 바로 부정했다.
“왜? 컨트롤도 잘하고, 위력도 대단하고. 염동력이라 응용하기도 편하잖아?”
“그렇긴 한데, 하도 공중전 위주로 하다 보니 하늘이 막히거나 좁은 지형에서는 오히려 완전히 멘붕이 오더라고요. 좁은 던전이나 나무가 빽빽한 숲 같은 곳에선 좀 버벅거리는 편이에요.”
“거기다가 다혈질이라서 한번 흥분하면 막 나가고…….”
“조용히 해.”
리온이 옆에서 한마디를 거드는 주찬의 등짝을 가볍게 때렸다.
“그리고 시야 안에 들어오는 곳은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는데, 동시 동작이 잘 안되는 편이라…….”
“아하…… 훈련을 좀 소홀히 했구나? 하기야 임무 처리하기가 바쁘면 그렇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 아니면 요샌 동시 동작 훈련은 따로 안 하나?”
“있어요. 리온 선배가 똥개 훈련받는 것 같다고 싫어하셔서 그렇지.”
리온이 태환의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사고 난다. 아무리 강해도 그렇지, 온갖 돌발 상황이 일어나는 곳이 게이트 안이라고.”
‘그 돌발 상황, 이미 겪었는데요…….’
리온이 설산 게이트에서의 아찔한 경험을 떠올리곤 표정을 굳혔다.
“그래도 이번 훈련하면서 같이 연습하고 있어요.”
“맞아요. 이 훈련이랑 병행할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던데요.”
현서와 수진이 리온의 편을 들어 주며 그의 등을 다독였다. 리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더 열심히 해야죠. S급 게이트니까, 평소보다 두 배, 세 배로 정신 똑바로 차릴 거예요.”
“그래. 그래야지.”
과거에 붙잡혀 자책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에스퍼들은 훈련을 하면서 발견한 서로의 장단점과 앞으로의 훈련 방향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훈련에 매진하는 동안 시간은 잘도 흘렀다.
* * *
[21년만의 S급 게이트에 술렁이는 사람들. 항공편 매진 잇따라]
[인천 도심에 생성된 S급 게이트…… 에스퍼 중앙 센터 “만반의 준비를 기하는 중”]
[‘역대 최강의 에스퍼’ 강리온, 위기의 한국을 구원할까]
[한국에선 그 자취를 감추었다 여겼던 S급 게이트가 21년 만에 인천 도심 한가운데 나타났습니다. 에스퍼 중앙 센터에서는 이미 상황을 예측하고 대비 차원에서 S급 게이트 공략을 위해 특수팀을 편성했다는 입장을 내놓았는데요. ‘역대 최강의 에스퍼’라고 불리는 강리온 씨를 중심으로 한 공략 팀은…….]
“우린 완전 들러리 취급이네.”
오늘 아침, 결국 예상대로 S급 게이트가 생성됐다.
서울과 인접한 도시인 인천에 게이트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대한민국은 뒤집어지다시피 했다. 수도권 거주자들은 겁에 질렸고, 언론은 앞다투어 취재 경쟁을 벌였다.
“들러리라니요. 뒤에 소개해 주잖아요.”
[A급 화염 능력자인 이주찬 씨, B급 치유 능력자인 김민환 씨…….]
“봐봐, 네 소개도 해 준다. 야.”
훈련을 이어 가던 중 점심 식사를 하러 찾은 식당에서 자신들에 대한 소식을 보게 된 에스퍼들과 가이드들이 젓가락질을 멈추고 TV 화면을 보고 있었다.
[공략 팀의 가이드들도 정예를 추렸다고 합니다. S급 에스퍼 강리온 씨의 매칭 가이드인 S급 가이드 이유원 씨 역시 해당 팀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는데요.]
“이야, 잘생겼다. 유원이가 화면에 나오니까 뉴스가 아니라 무슨 드라마 같네.”
리온과 유원만이 TV에 시선조차 주지 않고 식사를 이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