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아아!”
마지막 순간까지 발악하던 보스는 리온의 손에 결국 숨이 끊어졌다. 눈더미를 놓쳐 버린 후엔 이유원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도 못 하고 바로 달려왔는데, 괜찮은 걸까.
평소와 달리 조금 거친 방법을 사용해 보스를 잡은 리온을 보며 광현과 민철이 혀를 내둘렀다.
“평소엔 주위에 뭐 튀기라도 할까 봐 사리면서 하더니 오늘은 진짜 살벌하네. 아, 맞다. 가이드들은…… 강리온?”
혀를 쯧쯧 차며 이야기를 하는데 리온은 듣지도 않고 조금 전 유원이 있던 곳을 향해 날아갔다. 물에 빠져도 주둥이만 둥둥 뜰 것 같은 놈이지만,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유원은요?”
“어떡해. 눈 더미에 휩쓸렸는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가 않아.”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아왔건만, 그 자리에는 ‘센터 간판씩이나 되시는 분이 멀티태스킹을 여유롭게 못 다루는 게 말이 돼요?’ 하고 비꼬는 유원이 아닌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예린이 있을 뿐이었다.
“…….”
리온이 말 한마디 없이 진지한 얼굴로 눈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 질긴 놈이 이렇게 죽을 리가. 분명 눈더미 아래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이 있을 터였다.
내가 부족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거야. 그 순간 눈더미에 맞고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망할 놈을 대피시키고 나서 일을 처리했어야 했는데.
아무리 재수 없고 꼴 보기 싫은 놈이었던 한들 제 동료였다. 차라리 자신이 다쳤으면 다쳤지, 눈앞에서 다른 사람이 다치는 것은 죽어도 보고 싶지 않은 리온이었다.
왜 그 말만 듣고 눈 더미를 그대로 내팽개쳤을까. 아무리 이유원이 하는 소리라도 들어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진정해. 이쪽, 이쪽에서 유원 씨 냄새난다.”
상황을 전해 듣고 달려온 광현이 눈더미 속 어딘가를 짚어 내며 말했다. 신체의 일부를 짐승의 것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그는 근접전이나 인물 수색에 강점을 보이는 베테랑이었다.
촤악―.
눈이 물결 갈라지듯 갈라지고, 그사이 추위에 얼굴이 얼어붙은 유원이 나타났다. 다행히 깊은 곳에 묻혀 있지는 않았는지 얼굴이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제외하고는 외상이 없어 보였다.
“상태는 괜찮아. 갑자기 눈이 덮쳐 왔다 보니까 놀라서 기절한 것 같아.”
급하게 유원의 상태를 살펴본 예린이 말했다. 그 재수 없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충격을 받았는지 얼어 있던 리온이 그제야 숨을 쉬었다.
“미친놈…… 이럴 거면서 뭘 내려놓으래. 누가 누구보고 몸을 챙기라는 거야.”
리온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게이트에서 누군가 다치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자신은 멀쩡한데 동료가, 그것도 가이드가 다친 경우는 처음이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진짜 왜 그랬지. 리온이 한참 동안 주저앉은 채로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정신 차려. 안 그래도 눈 더미에 깔린 애를 이대로 내버려 둘 거야? 게이트 열렸을 테니까 빨리 가자. 그래야 병원을 보내든 따뜻한 곳에 눕히든 할 것 아냐.”
“바로 출발할게요.”
보다 못한 예린이 리온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정신을 차리게 하자 리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식간에 일행 전체를 들어 올린 리온이 게이트를 향해 날았다.
“야, 야. 멀미나. 조금만 천천히…….”
“리온 씨. 이러다 우리도 얼어 죽겠어요.”
보스의 죽음과 함께 눈보라는 잦아들었다만 상공에서 차고 매서운 공기를 그대로 가로지르게 된 사람들은 죽을 맛이었다.
제발 조금만 천천히 이동해 달라며 죽는 소리를 냈지만 리온은 며칠 동안 걸어온 길을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주파했다.
“보스 다 잡고 죽을 뻔했네…….”
“의료반, 의료반!”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겨울옷을 벗고 헥헥거리는 일행들과 달리 리온은 찜통더위에 외투를 벗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의료반을 찾았다.
“가까운 병원 어느 방향이에요?”
“저 방향으로 차 타고 10분 정도…….”
게이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센터의 일반 직원 하나가 놀라 대답했다. 리온은 대답을 듣자마자 허공으로 솟구쳐 직원이 알려 준 방향으로 쏜살같이 날았다.
“뭐야, 한여름에 무슨 저런 차림을…….”
“저 사람 에스퍼 강리온 아니야?”
반팔 티를 입고도 땀이 뻘뻘 날 만큼 더운 한 여름 날씨에 두꺼운 털옷을 입고 땀을 비 오듯 흘리는 남자는 당연히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리온이 응급실로 들어서자마자 응급실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중 몇몇은 리온을 알아본 듯 핸드폰을 들어 카메라를 들이밀기도 했다.
“전 방금 게이트에서 나온 에스퍼고, 이쪽은 함께 들어갔던 가이드인데 게이트 안에서 눈더미에 깔린 상태로 잠깐 방치됐어요.”
“우선 환자분 이쪽으로 눕혀 주세요.”
리온이 유원을 응급실 침대 위에 눕히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왜 이렇게 힘들지. 그렇게 생각하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있는데 옆 침대에 누운 환자의 보호자가 리온에게 말을 걸었다.
“저, 안 더워요?”
리온은 그제야 제가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옷도 벗지 않고 날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보도 아니고, 8월에 이렇게 입고 있으면 당연히 덥지.
“정신이 없어서…… 감사합니다.”
리온이 두꺼운 털옷과 모자, 장갑을 벗어 발치에 내려 두었다. 다행히 털옷 안에는 게이트에 들어갈 때 입고 있었던 반팔티 옷이 들어 있었기에 리온은 망설임 없이 옷을 벗을 수 있었다.
“옷이 다 젖었네.”
정신도 없이 달려오는 동안 옷 안이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엉망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손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는데 그를 알아본 듯한 사람 하나가 리온에게로 다가왔다.
“저, 혹시…… 에스퍼 강리온 씨 아니세요?”
“아, 네. 맞아요.”
“저 진짜 팬이에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환자의 보호자인 것 같은 젊은 여성 하나가 발을 동동 구르며 기뻐했다.
“지금까지 한 인터뷰도 다 봤고, 저도 리온 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스무 살 생일 지나자마자 에스퍼, 가이드 수치 측정 받아 봤었는데 수치 미달 떠서……. 아, 이게 아니라.”
잠시 횡설수설하며 자신의 팬심을 드러내던 여성이 등 뒤에 감추고 있던 것을 꺼내 내밀었다.
“옷이 많이 젖어 보여서요. 이거 저희 오빠가 입원해서 챙겨 온 옷인데, 괜찮으시면 입으세요.”
“네? 아니에요. 괜찮아요.”
“별거 아니에요. 오빠도 괜찮다고 했고…… 이렇게 만난 것도 제 인생에 큰 행운인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어서요.”
여성이 제발 받아 달라는 듯 눈을 반짝이며 부탁했다. 결국 나중에 센터로 찾아오시면 옷을 돌려 주겠다는 말을 하고 나서야 그녀가 내민 옷을 받아 든 리온이 잠시 옷을 갈아입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아이씨, 이 옷은 또 어떻게 해야 하지. 병원에다 비닐봉지 없냐고 물어보면 완전 진상이겠지?”
“아, 이유원 씨 보호자 되시죠?”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어느새 유원이 깨어나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 쟤 옷도 안 벗겨 줬네.
다행히 간호사가 두꺼운 옷을 대신 벗겨 주었는지 반팔 차림을 하고 있는 유원이었다.
“갑작스럽게 큰 충격을 받아서 순간 기절하신 것으로 보이고요, 큰 외상이나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웬만하면 정밀 검사를 받아 보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요. 혹시 따로 불편하신 곳이 있으신가요?”
“아뇨. 괜찮습니다.”
유원이 아직 하얗게 질린 입술로 말했다. 사실 아직 눈 폭탄을 맞은 온몸이 쑤시긴 했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뼈가 아릴 정도로 느껴졌던 추위 역시 한여름인 게이트 밖으로 나오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오히려 털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인지 조금 덥기까지 했다.
“야, 야. 말도 없이 그렇게 날아가면 어떻게 해.”
게이트에서 나온 후 대충 정신을 추스르자마자 두 사람이 있는 병원으로 달려온 광현이 리온의 등을 아프지 않게 때리며 나타났다.
“뭐래, 상태는 괜찮대?”
“그냥 충격 때문에 기절했던 것 같대요. 링거 놔 줄 테니까 다 맞으면 퇴원하라고 하셨어요.”
침대 위에 반듯하게 앉은 유원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다행이네, 의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광현이 유원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링거 맞기 전에 옷부터 갈아입어. 강리온이 너 털옷 그대로 입혀서 가는 것 보고 나 식겁했잖아. 아마 내일 일어나면 백 퍼센트 감기 걸릴걸?”
그 와중에 갈아입을 옷을 챙겨 온 모양이었다. 감사하다며 고개를 꾸벅 숙인 유원이 잠시 옷을 갈아입기 위해 커튼을 쳤다.
“센터장에 보고는 내가 했다. 너도 많이 놀랐을 건데 들어가서 쉬어. 쟤 링거 다 맞을 때까지 내가 봐줄 테니까.”
“아니에요. 제가 있을게요. 저 때문이기도 하고.”
“그게 왜 너 때문이야. 김민철한테 들었다. 걔가 먼저 그거 내려놓고 보스한테 합류하라고 했다며?”
“그래도…….”
유원이 링거를 맞는 동안 잠시 응급실을 빠져나온 리온과 광현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리온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제 입술을 물어뜯었다.